

영화 수입·배급사 ‘찬란’이 지난 해 수입한 영화. ‘서브스턴스’와 존 오브 인터레스트’.
찬란에게 가장 찬란했던 한 해
영화사 ‘찬란’은 언제 설립됐나요.
2010년 10월에 회사를 세웠고 첫 영화인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를 다음 해 4월에 개봉했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쉴 때 우연히 칸영화제 기간 전후로 유럽 여행을 다녀왔어요. 영화제에서 굉장히 멋있는 포스터의 영화를 보게 됐는데 그 작품이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였지요. 다큐멘터리 영화지만 한국에서 개봉해도 괜찮을 것 같아 영화를 구매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저는 영화 배급사를 운영하기 전이었는데, 마침 함께 여행 간 친구가 영화 제작사 대표여서 그 친구의 명함을 주며 영화를 사고 싶다고 했죠. 처음에는 구매를 거절당했는데, 영화가 끝내 어떤 배급사에도 팔리지 않아 저에게 기회가 오게 됐습니다. 그렇게 찬란도 시작됐고요.
찬란은 어떤 영화사인가요.
예술 영화나 독립 영화 위주로 수입하거나 배급하고 있습니다. 다른 예술 영화 배급사와 비교하면 호러 장르를 집중적으로 구매하고 있습니다. 예술 영화만 하면 수익에서 한계점에 부딪히거든요. 아무래도 호러 영화는 저예산으로 구매할 수 있고, 창의적인 작품도 많은 편이라 관객들이 보기에 매력적일 거라 생각했어요. 영화 ‘유전’을 첫 번째로 해서 호러 영화 배급을 시작했죠.
최근에 수입한 호러 장르물인 ‘서브스턴스’가 관객 55만 명을 돌파했어요.
‘서브스턴스’는 충격적인 장면도 있고, 엔딩 부분에서 호불호도 있는 작품이에요. 확장성이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 정도 관객까지는 기대하지 못했어요. 보통 호러 장르는 시상식에 후보로도 올라가기 힘들다고 해요. ‘서브스턴스’가 다양한 시상식에 이름을 올리고 주연 배우인 데미 무어가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홍보가 많이 됐어요. 지난해 12월 초에 개봉했는데 관객들의 발길이 설 연휴까지 이어지면서 좋은 성과를 얻게 됐죠.
‘서브스턴스’를 보신 후 바로 구매 결정을 하셨나요.
칸영화제에서 마켓 스크리닝(공식 상영 전에 바이어들을 대상으로 미리 영화를 상영하는 것)을 했는데 ‘서브스턴스’ 상영 중간에 나가는 배급사들도 많았어요. 저도 끔찍한 장면이 많아서 눈을 거의 가리고 봤고요. 그런데 정말 흥미로운 작품이긴 했어요. 같이 영화를 본 다른 직원들도 하나같이 너무 재미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작품성이 좋으면서 오락성까지 갖춘 영화는 흔치 않거든요.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꼭 구매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구매 후 배급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구매 자체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내용이 자극적이기도 하고, 데미 무어의 인지도 덕분에 국내에서 기사가 많이 나오면서 구매를 원하는 배급사가 많아졌거든요. 가격 경쟁이 붙어서 판매가가 조금씩 올라갔고, 급기야는 영화 세일즈사가 연락을 안 받더라고요. 일정 마지막 날 오전에는 약속도 잡지 않고 무작정 사무실에 찾아가기도 했어요. 우여곡절 끝에 저희가 한국에 도착해서야 거래하자는 답변을 받았어요. 결국 처음에 제안했던 가격의 5배 정도를 줬을 만큼 지금껏 선보인 작품 중에 가장 비싸게 구매했어요. 물론 들여온 작품 중 흥행도 가장 크게 했고요.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은 오직 가격뿐인가요.
우선 빠르고 적극적으로 구매 제안을 해야 하고요. 그다음이 좋은 가격을 제안하는 거예요. 먼저 적극적으로 제안해야 기회가 주어지거든요. 뒤늦게 가격만으로 거래하려고 하면 그것도 쉽지 않아요. 영화를 보고 살지 말지 빠르게 판단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죠.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오락성은 다소 떨어지는 작품인데 어떻게 구매를 결정했나요.
2023년 칸영화제에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처음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영화의 완성도와 작품성, 영화를 본 후의 여운 모두 완벽한 작품이었거든요. 하지만 흥행하기에는 어렵다고 판단됐어요. 또 이 영화의 세일즈사가 높은 가격을 항상 유지하고 그 기준보다 낮으면 아예 판매하지 않거든요. 예상되는 관객 수는 최대 5만 명인데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았습니다. 여러 이유로 바로 구매할 마음이 없었는데, 영화를 보고 3일이 지나니 이 영화는 꼭 구매해야겠다는 맘이 들더라고요. 작품이 워낙 완벽해 주요 영화제에서 수상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거든요.
이동진 평론가가 5점 만점을, 박평식 평론가가 4.5점을 별점으로 주면서 흥행에 도움이 됐어요.
결국 구매를 했는데, 작품을 들여온 2023년 초반은 영화 시장이 너무 안 좋았어요. 제가 직원들한테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고 사과까지 했을 정도지요. 그런데 지난해 3월에 이동진 평론가님이 아카데미 시상식 중계방송을 진행하시면서 이 영화를 개봉 전에 미리 보고 싶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중계방송 당시 “아카데미 작품상을 자신이 뽑으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다”라고 하시면서 평점도 5점을 남기셨어요. 또 ‘평론계의 소금쟁이’라 불리는 박평식 평론가님이 10여 년 만에 평점 4.5점을 주시면서 화제성이 올라갔죠. 그렇게 지난해 6월에 영화를 개봉해서 20만 명이라는 적지 않은 관객을 모을 수 있었어요.
2023년 말부터 ‘예술 영화 붐’이 인 것도 ‘존 오브 인터레스트’ 흥행에 한몫했다고 볼 수 있나요.
2023년 말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 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추락의 해부’가 각각 50만 명, 10만 명의 관객을 모으면서 예술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어요. OTT가 생기면서 웬만한 영화는 집에서 편하게 볼 수 있잖아요. 관객 입장에서는 극장에서 영화를 봐야 한다면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보고 싶은 거죠. 무난한 상업 영화보다는 예술 영화가 선택받는 트렌드가 형성된 것 같습니다.
‘서브스턴스’나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배우 소지섭 씨가 수입해온 걸로 아는 사람들도 많아요.
소지섭 씨는 찬란의 투자자입니다. 제가 예전에 일하던 스폰지이엔티라는 회사에서 ‘영화는 영화다’라는 작품을 제작했는데 그때 연이 닿았지요. 당시 소지섭 씨가 그 작품에도 투자하셔서 영화 투자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소지섭 씨는 자신의 소속사를 통해 2012년 ‘폭풍의 언덕’을 시작으로 1년에 두세 편 정도 투자를 하셨어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상황이 어려워졌을 때는 연간으로 꾸준히 투자하셨고요. 저희한테는 굉장히 힘이 되는 투자자입니다.
여러 작품을 흥행시킨 2024년은 찬란에게 어떤 해였나요.
2024년은 상업성과 작품성의 균형을 잘 맞춰서 좋은 결과가 나온 해였죠. 호러 영화를 많이 다뤘던 저희 배급사의 특징을 살려서 독특한 호러물인 ‘악마와의 토크쇼’ 그리고 높은 작품성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 대중성과 예술성을 두루 갖춘 ‘서브스턴스’가 연이어 흥행에 성공했으니까요. 찬란을 운영한 15년 중 가장 성적이 좋은 해였습니다. 영화를 봐주신 많은 분께 감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내년에도 좋은 성적을 내야 할 텐데…’라는 걱정이 되는 해였습니다.
‘마음을 움직이는가’가 영화 선택 기준
‘이 영화 구매해도 되겠다’는 대표님만의 기준이 있나요.
먼저 마음을 움직여야 해요. 물에 돌을 던지면 파동이 생기듯이 울림이 있어야죠. 일정 수준 이상의 완성도가 있느냐와 한국 시장에서도 통하는 대중성이 있는지도 중요하고요. 그런데 사실 좋은 영화는 다른 사람들도 다 알아보거든요. 그래서 시장 안에서 구매 경쟁이 매번 치열합니다.
상업성과 작품성 사이에서 나름의 균형을 찾는 건가요.
균형을 찾으려고 하죠.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지도 않더라고요(웃음). 어떤 때는 작품성에 한참 치우친 영화로 결정하기도 하니까요. 상업성은 특히나 예측되지 않는 부분이에요. 엔터테인먼트는 변수가 너무 많아서 관객들의 반응을 예상하기 힘드니까요.
상업 영화사가 아닌 예술 영화사를 차린 이유는요.
예전에 몸담았던 영화사가 제작사이자 수입사로 예술 영화를 많이 수입했었어요. 회사를 그만두면서 해왔던 일, 가장 잘하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전 회사에서 6~7년 정도 영화 마케팅 일을 해서 크게 문제가 없을 거라고 판단한 거죠. 그리고 예술 영화 시장이 구매 가격대가 낮은 편이라 진입 장벽도 높지 않아요. 소규모 영화라도 좋은 작품을 수입해 개봉하면 어느 정도 회사가 유지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찬란을 시작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나요
처음에는 제 의지대로 일하는 것에 대한 즐거움이 더 컸어요. 그런데 수많은 실패에 부딪히면서 힘들어지기도 하더라고요. 영화 ‘미드소마’도 저희가 배급했는데, 지금까지 많은 화제가 되고 있지만 개봉 당시에는 관객 수를 10만 명도 못 채웠어요. 한마디로 적자가 났죠. 그렇게 실패를 계속하다 보니 사업의 무거움도 많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래도 결국 영화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어요. 친구들도 영화를 전공하거나 영화 잡지사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고요. 그래서 친구들과 같이 영화 잡지 창간을 결심했는데, 잡지를 거의 만들었을 때 IMF가 터지더라고요. 그 후 3년 정도 버텼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친구들과는 뿔뿔이 흩어지고 영화 잡지 ‘스크린’으로 가게 됐죠. 그런데 글을 짜내서 쓰는 스타일이라 매달 마감을 해야 하는 기사 작성이 너무 힘들더라고요. 결국 스폰지이엔티라는 영화사에서 마케팅 업무를 하게 됐습니다.
항상 영화를 커리어로 선택하셨던 이유가 궁금해요.
잡지사에서 나와 직업을 옮길 즈음 영화 직군이 아닌 곳에서 입사 제안을 받은 적도 있지만 신기하게 계속 영화 관련 직업을 선택하게 되더라고요. 영화사를 직장으로 택하고 후회가 없었던 건 아니에요. 마케팅을 하면서 처음 1년이 무척 힘들더라고요. 잡지사는 매달 한 권의 책이 발간된다는 뿌듯함이 있잖아요. 그런데 영화사는 힘들게 개봉했는데 흥행에 실패하면 개봉 안 하느니만 못한 상황이 되더라고요. 그럴 때 괴로움이 컸죠.
그럼에도 영화 배급 일을 계속하는 이유가 뭔가요.
계기가 하나 있었어요. 2004년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라는 영화의 마케팅을 맡았는데, 그때 관객들의 반응과 제가 영화에 가졌던 애정이 만나서 좋은 시너지가 나는 느낌이었어요. 이 영화가 엄청난 흥행을 한 건 아닌데도 작품을 사랑해주는 팬들을 보면서 재미와 보람을 느꼈죠. 그 영화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여성 대표로서 힘들었던 적은 없나요.
초반에는 좀 많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영화 배급사를 하다 보면 영업이나 스크리닝 등 외부 활동이 많거든요.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는 ‘어린 여자 대표가 하는 작은 회사’라는 선입견이 있다는 걸 느꼈죠. 작은 규모의 영화만 한다고 많이 생각하시더라고요. 그래도 여성 대표로서 가진 장점이 있어요. 세심하게 마케팅에 신경 쓰고 신뢰감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데는 자신이 있습니다.
현재 준비 중인 작품은 뭔지 궁금합니다.
4월에 개봉할 영화로, CGV와 함께 ‘베러맨’이라는 작품을 준비하고 있어요. ‘위대한 쇼맨’으로 유명한 마이클 그레이시 감독 작품이에요. 가수 로비 윌리엄스의 전기를 다뤘고요. 한국 시장에 잘 맞고 재미있는 볼거리가 많은 뮤직 판타지 장르라서 기대하고 있어요. 또 지금 준비 중인 독특한 작품은 1980년대 영화 ‘스탑 메이킹 센스’인데요. 공연 실황을 다룬 전설적인 다큐멘터리예요. 실제 공연 모습이 생생하게 들어 있어서 보는 재미가 충만할 거예요. 6월 정도로 개봉 시기를 생각하고 있어요.
찬란이 한국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길 바라나요.
한국에서 개봉하는 영화들의 다양함을 담당하고 싶어요. 블록버스터나 수많은 상업 영화도 재밌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는 예술적인 향유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잖아요. 문화적인 다양성의 한 축을 책임지는 회사가 되고 싶습니다..
#찬란 #예술영화 #서브스턴스 #여성동아
사진 조영철 기자 사진제공 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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