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 80년대 서울 강남 개발을 둘러싸고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벌이는 암투를 그린 SBS 드라마 ‘자이언트’에서 선 굵은 연기를 보여준 이범수(41). 드라마가 종영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그는 강모의 흔적을 지우기가 쉽지 않다고 고백한다.
“아직까지는 강모가 제 분신 같아요. 마지막 촬영을 끝냈는데도 발걸음이 안 떨어져 방송국을 한 시간 정도 배회했을 정도예요.”
영화배우로 활동하다 드라마로 행동 반경을 넓혀 ‘외과의사 봉달희’ ‘온에어’ 등에 출연한 그가 드라마에서 단독 주연을 맡은 건 이번이 처음. 더욱이 ‘자이언트’는 SBS 창립 20주년 대하드라마이기에 어깨가 무거웠을 법하다.
“작품을 하면서 주인공으로서 부담감, 사명감이 들더라고요. 물론 이런 감정을 갖는다는 건 명예로운 거겠죠. 주인공이기 때문에 짊어질 수 있는 감정이니까요. 배우들이 저마다 마지막 촬영을 끝내고 떠난 촬영장에 남아 ‘자이언트’의 3만 컷 중 마지막 컷을 찍게 되니까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 들던데요(웃음).”
극 초반에는 시청률이 10% 밖에 나오지 않아 부담감이 가중됐다고 한다. 그러나 ‘자이언트’는 남성 시청자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무게감 있는 드라마’로 거듭나며 마지막 방송에서 40%대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범수는 이렇듯 드라마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탄탄한 이야기 구조 덕분”이라고 해석한다. “단순히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복수하는 내용이 아닌 극중 인물들이 기나긴 세월 속에서 느낀 회한을 담았기 때문”이라는 것. 하지만 드라마가 뒷심을 발휘한 데는 연기자들의 노력 또한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실제 제 모습, 목표 향해 달려가는 이강모와 비슷해요”
“삼복더위에 삼청교육대 촬영을 했는데, 그늘 한 점 없이 덥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무척 힘들었어요. 하지만 역사의 현장에 있던 분들에게 누가 되면 안 되기에 진심으로 연기했죠. 아무런 이유 없이 삼청교육대로 차출돼 말 못할 고생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한번은 삼청교육대에서 동료가 죽은 다음 날, 남은 동료들과 두 손 꼭 잡고 ‘사노라면’을 부르는 장면을 찍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찌릿찌릿 전율이 올 정도로 가슴이 뭉클했어요. 울려고 애쓰거나 눈에 안약 넣고 가짜로 연기한 게 아니고 감정에 몰입해 벅차오른 감정을 느꼈거든요. 제가 생각해도 당시에 연기를 잘했던 것 같아요. 시청자들도 이런 진정성을 보고 ‘자이언트’를 좋아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네요(웃음).”
그가 연기한 이강모는 불굴의 의지를 지닌 남자. 무일푼으로 성공해 부모를 죽인 원수에 복수한다. 뿐만 아니라 헤어진 가족도, 애타게 사랑한 연인도, 자신을 배신한 친구도 끝까지 품에 안는다. 이런 강모와 그는 실제로 얼마나 닮았을까.
“이강모는 완벽에 가까운 인물이죠. 글쎄요,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달려가는 모습은 비슷한 것 같아요. 옳다고 생각한 일에 온몸을 던지는 ‘소신’이 있는 것도 비슷하고요. 저도 강모처럼 정의를 믿거든요. 살아가면서 느끼는 건데 정의는 언젠가 승리하더라고요. 그리고 저도 한번 친해진 사람과는 오래 알고 지내는 편이에요. 극 중에서 ‘백파’가 ‘사람을 함부로 쓰지 말되, 한번 쓰려면 의심하지 말라’고 하는데 맞는 말씀이에요.”
이범수는 인생 선배이기도 한 이강모에게 ‘용기’를 본받고 싶다고 했다. “용기가 있어야 자신도 지키고 가족도 지키고 불의에 맞설 수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상대방과 당당히 맞서기 위해서는 실력과 신념을 갖춰야 한다는 걸 알게 된 것도 이강모 덕분이다. 어쩌다 한번은 요행이 통할 수 있지만 인생사에서 매번 요행을 기대할 수는 없는 까닭이다.
팬들과 함께 ‘자이언트’의 마지막 방송을 보던 이범수는 “아무것도 아닌 저를 응원해주신 팬들께 감사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어찌 보면 뚝심 있는 이강모에게 이범수의 얼굴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16세 때 선글라스 끼고 머리에 기름 바르는 모습이 멋져 보여 배우의 꿈을 꾸다 1990년에 개런티 30만원을 받는 단역을 맡아 데뷔한 뒤 20대와 30대 조연 배우 시절을 거치면서 그만의 페이소스가 묻어나는 배우가 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는 자신의 어려운 시절을 이강모의 과거에 대입해 설명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연기대상 기대하지 않는다면 거짓말”
“이강모가 힘들어했듯이 조연으로 연기하면서 설움 느끼지 않았느냐고들 물으시는데, 그 질문에는 노코멘트하고 있어요. 이미 10년 전에 조연 생활을 끝냈으니까요. 무명 생활에서 막 벗어났던 2000년대 초반에는 그런 질문에 어떤 심정이었는지 자세히 말씀드렸는데, 지금도 그런 얘기를 하면 제가 괜히 ‘루저’가 된 것 같거든요.”
대신 그는 “‘네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경 구절이 나를 지탱해줬다”는 말로 당시 심경을 표현했다. 그러고 보니 팬들과 ‘자이언트’의 마지막 방송을 함께 보던 이범수는 “아무것도 아닌 저를 응원해주신 팬들께 감사하다”고 눈시울을 붉히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동안에는 뭐 하나 하게 되면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어쩌다 뒤를 돌아보면 제 곁에 늘 ‘리틀타이거’(팬카페)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1999년도인가. ‘다음’에 제 팬카페가 생겼다고 하기에 당시에는 압구정에 한 카페가 생긴 줄 알았어요. 제가 어떤 면에서는 빠른데 또 다른 면에서는 많이 몰라서 그나마 절충하면서 살고 있거든요(웃음). 그때는 제가 영화에서 조연으로 출연하고 있을 때인데, 49명의 팬들이 곁에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고마웠어요. 그래서 요즘에도 틈만 나면 ‘리틀타이거’ 분들을 자랑해요(웃음).”
이범수는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과 함께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이번 작품에서 배우 인생의 중간 총정리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제 자신의 연기에 점수를 매긴다면 A+를 주고 싶어요. 연기에 있어서 후회나 미련이 없거든요. 간혹 너무 졸려서 눈이 안 떠지고 혀가 꼬부라지는데 심각한 연기를 해야 할 때면 정말 하늘에 기도하면서 연기했습니다. 20대 초반부터 50대가 될 때까지 다양한 연령층을 소화하면서 동시에 복수를 하기 위해 야망을 불태우다가 사랑도 하고 가족들도 아끼는 모습을 보여야 했기 때문에 틈나는 대로 지난 방송을 보면서 감정 선을 되살렸어요. 자칫하면 다중 인격자로 보일 수도 있거든요. 매순간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촬영을 끝낸 뒤에 ‘이건 더 잘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느끼진 않아요. 다만 역할에 너무 몰입하다 보면 신경쇠약에 걸릴 수도 있다는 걸 실감하긴 했죠(웃음).”
열심히 했기에 당당한 그는 연기대상에 대한 기대감도 감추지 않았다. 이범수는 숱한 좌절 속에서도 강인한 정신력으로 시련을 딛고 일어선 강모 역을 제대로 소화해 상대역인 조필연을 연기한 정보석과 함께 연말 SBS ‘연기대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기대 안 한다면 거짓말이고 2010년을 힘들게 달려온 배우로서 욕심내볼 만한 일이죠. 지금 ‘시크릿가든’ ‘대물’ 등에서 훌륭한 배우들이 각자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만 작품의 의미, 시청률을 감안하면 (‘자이언트’에) 좋은 결과가 있을 거란 기대를 안 하는 건 아니에요. 드라마도 무리한 설정 없이 작품성 있는 결말로 끝을 맺고, 강모도 무조건적인 성공이 아니라 가족, 사랑, 행복의 의미를 되새겨준 것 같아 배우로서 뿌듯해요.”
지방에서 밤샘 촬영해도 귀가해 아침 먹고 출근
2008년 지인 소개로 만난 국제회의통역사 출신 이윤진씨와 지난 5월 결혼한 그는 드라마 촬영 때문에 신혼여행도 미뤄야 했다. 드라마 종영으로 미뤄온 신혼여행을 떠나게 된 그에게 신혼생활을 즐기지 못해 아쉽지 않은지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웃음)? 신혼 생활이 없진 않았어요. 아무리 늦게 촬영이 끝나도 집에 가서 아침밥은 꼭 먹고 나왔거든요. 집은 강남 도곡동인데, 강원도에서 촬영하든 전라남도에서 촬영하든 집에 가서 옷 갈아입고 와이프 얼굴 보고 ‘오늘 뭐 했어’ ‘오늘 어땠어’ 대화하고 출근했어요. 다만 집에서 30분씩, 1시간씩 머물다 오는 경우가 많긴 했죠. 촬영장에서 집까지 오가는 게 어렵진 않았어요. 제게 좋은 체력을 주신 하늘에 감사할 따름이죠(웃음).”
이런 그에게 아내는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보약을 챙겨주고 심신이 피곤한 이범수를 배려해 “모든 걸 편안하게 해 주었다”고 한다. 그의 아내는 미니홈피를 통해 남편을 내조하기도 했는데, 대본 외우기 전 장난감 미니카 운전에 열중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이범수의 사진을 올리는가 하면 50대로 분한 이범수의 모습을 공개해 이범수와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는 데 일조했다. “아내 덕분에 오늘의 자신이 있다”고 말하는 그의 아내는 현재 임신 7개월째. 그래선지 “더욱 애틋한 마음이 든다”고 한다.
“아내가 안쓰럽게 잠든 모습을 보고 한번은 편지를 쓰고 나왔어요. 입덧이 심해서 고생하는 아내에게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평생 살면서 두고두고 갚겠다는 내용이었는데요. 글쎄요, 제 마음을 알아줬는지는 모르겠어요(웃음).”
더욱이 그는 첫째 딸 ‘쭌’(태명) 덕분에 하루하루가 행복해 “하늘을 나는 것 같다”고 한다. 아이가 6월에 생겨서 ‘쭈~운(june)’이라는 태명을 직접 지었다는 그는 “입체 초음파로 얼굴을 봤는데 나 어릴 때와 똑같아 기대되지만 한편으로는 희한할 것 같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둘째도 기회 닿는 대로 낳겠다며 가족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이는 그를 보자 뜨거운 가족애가 연기만이 아니구나 싶었다.
당분간 휴식을 취하고, 영화를 찍으면서 깊이 있는 캐릭터를 연기하며 호흡을 고른 뒤 안방극장으로 다시 찾아오겠다는 그는 저무는 2010년을 보내는 의미가 남다르다는 말로 인사말을 대신했다.
“제가 ‘자이언트’의 이강모를 얼마나 사랑했느냐 하면요 이강모는 2010년 거의 저의 전부였어요. 붙들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어요. 그렇지만 발전을 위해서는 껍질을 깨야 하는 것 같아요. 제가 드라마 공식 홈페이지에 작별의 서운함을 딛고 새로운 미래를 위해서 노력하겠다는 말을 남겼는데 진심이에요. 안주하지 말고 다시 빈손으로 새로운 것을 시작해야죠. 이제 더 이상 ‘자이언트’를 보실 수 없겠지만 가슴 속에는 기억해주시면 좋겠어요. 앞으로 더 좋은 작품에서 열심히 하는 모습으로 보내주신 사랑에 보답하겠습니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