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종영한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이하 ‘모자무싸’)에서 그는 또 한 번 평범한 인간의 내면을 설득력 있게 드러냈다. 오정세가 연기한 박경세는 영화를 5편이나 만든 감독이지만 늘 불안에 시달린다. 20년째 데뷔하지 못한 친구 황동만(구교환)을 은근히 시기하면서도 우월감을 놓지 못하고, 영화 제작자인 아내 고혜진(강말금)의 눈치를 보며 위태롭게 흔들린다. 오정세는 지질하고 비겁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를 저울에 단 듯 균형감 있게 그려냈다.
극 중 경세는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의심하는 인물이지만, 오정세 자신은 긴 무명 시절에도 스스로를 무가치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오디션에 떨어질 때조차 ‘나 같은 배우를 놓치다니 손해 보셨네’라고 생각하려 했다는 그의 말에선 치열한 경쟁의 세계에서 오랜 시간 버텨온 이의 단단한 내공이 느껴졌다.
“물밑에서 끊임없이 발을 젓는 오리 같다”는 스스로의 표현처럼, 오정세는 매 작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하게 캐릭터를 만들어간다. 최근 영화 ‘와일드 씽’에서는 신비주의 콘셉트의 발라드 가수 최성곤으로 파격 변신했다. 한쪽 눈을 가린 중단발 헤어에 브이넥 블라우스 비주얼은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고, 극 중 그 노래 ‘니가 좋아’는 중독성 강한 멜로디로 수능 금지곡이 됐다. MBC 드라마 ‘오십프로’에선 기억을 잃은 전직 인간 병기 불개 역으로 변신해 ‘극한직업’에서의 콤비 신하균과 호흡을 맞춘다. 오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하게 인물을 만들고 장면을 훔칠 준비를 하는 오정세를 만났다.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에서 지질한 박경세 감독을 연기한 오정세는 영화 ‘와일드 씽’에선 만년 2위 발라드 가수 최성곤 역을 맡아 큰 웃음을 안긴다.
“엉뚱한 제목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 반가웠어요”
‘모자무싸’ 대본을 받았을 때 어땠나요.제목부터 너무 좋았어요. 자기만의 가치와 존재 이유를 찾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들의 이야기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기대감도 있었고요. 실제 대본을 읽었을 땐 감정선과 인물 설정이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특히 동만과 은아의 관계가 인상적이었는데요. 초반의 동만은 솔직히 옆에 없었으면 좋겠다고 느껴질 정도로 불편한 인물이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동만이 잘됐으면 좋겠다’ 하고 응원하게 되더라고요. 은아가 그런 동만을 지탱하고 손잡아주면서 같이 걸어가는 과정도 좋았고요.
구교환 배우와 맞붙는 신이 많았습니다. 연기 호흡은 어땠나요.
구교환 배우를 보면 황동만이 항상 현장에 와 있는 느낌이었어요. 스스로 얼마나 고민해서 저 인물로 들어갔을까 싶을 정도였어요. 좋은 호흡을 받으니까 저도 마음이 열렸고, 믿음이 깔린 상태에서 연기하니까 더 잘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동백꽃 필 무렵’의 홍자영(염혜란)부터 이번 작품의 고혜진(강말금)까지 ‘아내 복’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요. 하하하. 든든한 버팀목 같은 아내들을 만났죠. 이번에도 넘어지고 실수하더라도 강말금 배우가 옳은 길로 인도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뿅망치 맞는 장면은 대본으로 봤을 땐 부부간의 가벼운 장난으로 읽혔는데, 강 배우와 호흡을 맞춰보니 슬프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올라오더군요.
‘애욕의 병따개’ ‘붙을 결심’ ‘팔 없는 둘째 누나’ 등 박경세 감독의 영화 제목도 재미있었어요.
제 취향이었습니다(웃음). 연기하기 가장 어려운 장르가 코미디인데, 이 제목들은 ‘나 웃기지?’ 하고 밀어붙이지 않으면서도 웃음이 나게 하잖아요. 그런 엉뚱한 제목의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는 설정도 너무 재미있고 반가웠어요.
등장인물마다 결핍이 느껴지는데, 박경세라는 인물의 결핍은 무엇이었나요.
다른 사람의 눈에는 이미 성공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는데도 경세는 계속 떨어질까 봐 두려워하고, 더 올라가고 싶은 욕망 때문에 불안해하는 인물이었어요. 정점에 있는 것 같아도 내면은 동만과 크게 다르지 않은 거죠.
박경세 캐릭터에 영감을 준 감독이 있었나요.
직접적인 모티프는 ‘동백꽃 필 무렵’부터 이번 작품까지 함께한 차영훈 감독님이었어요. ‘동백꽃 필 무렵’ 쫑파티에서 배우들은 다 행복해하고 신나 있는데, 정작 가장 큰 프로젝트를 책임졌던 감독님은 막내 스태프에게까지 고맙다고 하면서 엉엉 우시더라고요. 그 모습이 너무 사람 냄새가 나고 사랑스럽게 느껴졌어요. 경세를 연기하면서는 그런 감독님의 감정선을 많이 떠올렸어요. 모두가 기뻐하는 순간에도 경세는 더 크게 울컥하고, 더 벅차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대사가 굉장히 많았는데 힘들지 않았나요.
극 중 오정희의 말처럼, 모든 대사가 ‘입술에 얹어보고 싶을’ 정도로 좋아서 처음에는 ‘이 대사를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100%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이 컸거든요. 그런데 촬영을 하다 보니 생각이 조금 바뀌었어요. 100%가 아니라 98%만 구현하자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어요. 대사도 중요하지만 그 안의 정서와 자유로움도 필요하다고 느꼈거든요. 너무 대사에만 집착하면 오히려 강박이 되더라고요.
본인과 박경세 감독의 닮은 부분이 있다면요.
크게 닮은 인물은 아니었어요. 저는 시기와 질투가 큰 편은 아니거든요. 너무 올라가지도 말고 너무 내려가지도 말자는 주의예요. 개인적으로는 3등 정도가 좋다고 생각해요. 1등은 너무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2등은 ‘1등이 되지 못했다’는 위로를 많이 받잖아요. 그런데 3등은 적당히 주목도 받으면서 변방에 머물 수 있어서 마음이 편한 것 같아요.
박경세는 지질한데도 밉지는 않아요. 그 균형은 어디서 나온 건가요.
작가님이 이미 뼈대를 잘 구축해주셨다고 생각해요. 경세는 철없고 욕심도 많지만 결국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할 줄 아는 인물이거든요. 동만의 이야기를 가져가 성공한 뒤에도 오래 괴로워하다가 결국 고백하고, 마지막에는 아내에게 “나 1등만 하려고 아등바등 살아왔네. 이제 3등만 할게”라고 말하잖아요. 그런 용기 있는 고백이 시청자들에게 인간적으로 다가간 것 같습니다.
경세가 보조 작가와 사랑에 빠져 아내를 떠나는 전개가 나올까 봐 걱정했습니다.
저는 보조 작가와의 관계를 연기하면서 ‘남녀 관계’라는 키워드를 최대한 지우려고 했어요. 함께 창작 활동을 하며 서로를 북돋아주는 관계로 접근했거든요. 동선을 짤 때도 둘만 따로 붙어 있는 느낌보다 여러 사람과 자연스럽게 섞이는 방향을 원했어요. 보조 작가가 아이디어를 말할 때도 정면으로 마주 보는 대신 모니터를 사이에 두는 식의 연출을 제안했고요. 그런 장치들이 남녀의 감정보다는 창작적 교감으로 보였으면 했어요.

“나를 캐스팅하지 않으면 손해일 텐데…”
본인에게도 극 중 ‘8인회’ 같은 든든한 존재가 있나요.제가 연극영화과 전공이 아니다 보니, 학교에서 같은 꿈을 가진 동문들끼리 끈끈하게 뭉치는 모습을 보면 항상 부럽고 동경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러다 26년 전쯤에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한 배우 모집 기관에 합격하게 됐죠. 거길 들어가면 금방 배우로 대단하게 성공할 줄 알고 마냥 기뻐했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거기서 만난 친구들과 ‘다도리타’라는 연기자 모임을 만들어 현재까지 연락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다른 직업을 가진 친구들도 있지만, 제게는 배우 인생의 뿌리와도 같은 든든한 존재들입니다. 그 시절에는 1년에 한 번씩 송년회를 할 때 그냥 술만 마시는 게 아니라, 우리만의 ‘영화제’를 열었어요. 1년 동안 각자 촬영했던 단편 영화, 단역으로 나온 장면, 심지어 뮤직비디오 한 컷까지 다 긁어모아서 상영했죠. 멜로 섹션, 공포 섹션 등 나름대로 장르도 나누고 찰흙으로 트로피를 빚어서 시상도 했습니다. 보통 뒤풀이 비용이 인당 2만 원인데, 상을 받은 사람은 회식비로 10만 원을 내야 해서 서로 상을 안 받으려고 난리를 피우던 유쾌한 모임이었습니다(웃음). 그 멤버 중에 양익준, 박병은 배우 등이 지금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어요.
스스로의 가치를 의심하거나 흔들린 순간은 없었나요.
일이 잘 안 풀린다고 해서 어둠 속이나 동굴 속으로 깊이 걸어 들어간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오디션에 떨어지거나 상황이 어그러졌을 때, 그걸 자존감의 문제로 연결 지어 ‘나라는 존재는 무가치해’ 하며 스스로를 무너뜨리진 않았습니다. 그 과정 역시 결국 성장해나가는 단계 중 하나라고 여겼으니까요.
그 시기를 묵묵히 버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나요.
시작할 때부터 저는 ‘길게 가는 배우’가 목표였어요. 배우라는 직업이 인기가 확 좋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푹 꺼지기도 하는 사이클이 반복되는 일이기 때문에, 매번 일희일비하다가는 제 마음이 먼저 지치고 상처 입어 나가떨어질 것 같았어요. 그래서 잘됐을 때 너무 어깨에 힘주며 기뻐하지 말고, 안될 때도 너무 처지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특히 내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 부딪혔을 때는 ‘생각의 스위치’를 툭 바꾸는 게 큰 도움이 돼요. 오디션에 계속 떨어지던 초반에는 참 힘들고 괴로웠는데, 어느 순간 생각을 완전히 바꿔버렸어요. 작품에서 떨어졌을 때 ‘왜 떨어졌을까?’ 하고 자책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나 진짜 좋은 배우인데 날 떨어뜨리다니, 저분들 정말 손해 보셨네. 안됐다’ 하는 마음을 가져본 거죠(웃음).
연기자로서 스스로에게 확신이 생긴 계기가 있었다면요.
연기라는 게 참 신기하게도 계단식으로 뚝딱 성장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작품을 한 편 더 했다고 해서 눈에 띄게 단단해지거나 업그레이드되는 게 아니라 새 작품을 할 때마다 똑같이 긴장되고, 대본을 봐도 매번 모르겠고, 정답은 왜 이렇게 안 찾아지는지 막막함의 연속이에요. 여기가 정답이겠거니 하고 가보면 거기가 아니고, 또 저기가 정답인가 싶어 다시 헤매고 돌아오는 과정이죠. 완벽한 정답을 찾아 안주하기보다는, 또 다른 정답을 향해 끊임없이 찾아 헤매고 시도하는 과정 그 자체가 배우의 숙명이 아닐까 싶어요.
여러 작품에서 꾸준히 ‘신스틸러’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저는 늘 수면 아래에서 바쁘게 발을 젓고 있는 오리 같다고 생각해요. 그런 노력이 어떤 작품에서는 타이밍과 운이 맞아 ‘신스틸러’라는 과분한 반응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또 어떤 작품에서는 미처 드러나지 못한 채 그냥 스쳐 지나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좋은 반응을 얻을 때면 ‘아, 내가 수면 아래에서 쉬지 않고 발을 저었던 그 시간이 헛되지 않고 이렇게 조금씩 영향을 미쳤구나’ 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니가 좋아’ 부르며 민망함과 싸워
‘와일드 씽’에선 자칭 ‘고막 남친’ 최성곤 역을 맡아 웃음을 주고 있는데요.‘와일드 씽’의 성곤이를 만들 때도 나름대로 수면 아래에서 발을 정말 치열하게 저었습니다(웃음). 감독님께 아이디어 제안을 엄청 많이 했어요. 헤어스타일도 단발머리와 긴 머리를 두고 마지막까지 고심하며 테스트를 거쳤는데, 단발은 너무 평범하고 자연스러워 보이더라고요. 제작진이 긴 머리가 확실히 강렬하다고 의견을 모아줘 그 비주얼이 탄생했습니다. 현장에서 율동이나 디테일한 설정들을 정말 다양하게 시도해봤는데, 감독님이 편집을 유쾌하게 잘 살려주신 덕분에 재미있는 장면들이 나온 것 같습니다.
극 중 부른 노래 ‘니가 좋아’의 중독성이 엄청납니다.
이렇게까지 난리가 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요즘 지인들에게 “나도 모르게 자꾸 흥얼거리게 된다, 짜증 난다”는 연락을 많이 받습니다(웃음). 사실 촬영 현장에서는 처절한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제가 원래 노래를 잘 못하는 편이라, 나중에 후반 작업으로 음정을 만져줄 것을 감안하더라도 현장 라이브를 소화해야 하니까 압박이 컸죠. 음정은 하나도 안 맞는데 얼굴 표정만큼은 ‘세상에서 내가 제일 감미롭고 최고’라는 듯 뻔뻔하게 가야 하니까, 너무 창피하고 민망해서 속으로 엄청나게 싸웠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재충전은 어떻게 하나요.
일과 쉼의 경계가 뚜렷한 분들도 있던데, 저는 일을 하면서 재충전을 합니다. 캐릭터를 구축하면서도 스트레스를 받고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현장에 가는 게 설레고 즐겁거든요. 굳이 리프레시를 위해 해외여행을 멀리 떠나지 않아도, 일상 자체를 여행처럼 즐기는 편이에요. 몇 시간씩 차를 타고 지방 촬영장을 오가거나 좋은 공연을 보기 위해 이동하는 순간도 ‘버리는 시간’이라 생각하지 않고 저만의 아늑한 여행길이라 여기며 즐깁니다.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장르나 탐나는 캐릭터가 있나요.
‘다음엔 이런 대작을 해야지, 이런 독특한 인물을 연기해봐야지’ 하고 전략적으로 계획을 세우는 편은 아니에요. 그런 욕심보다는 그저 ‘다음번엔 나에게 어떤 새로운 인물이 배달될까?’ 하는 설렘과 기대감이 훨씬 큽니다.
지금, 이 순간 스스로의 무가치함과 외롭게 싸우고 있을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우선 우리 작품을 꼭 한번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보고 나서 마음에 위로를 얻으셨다면 절대 혼자만 간직하지 말고 주변의 소중한 분들에게 널리 널리 소문내서 같이 나눠주세요(웃음). 그리고 우리 작품 속에 나오는 가슴 먹먹한 대사처럼, “아파 죽겠다, 괴로워 죽겠다”며 쓰러지지 마시고 평온하게 하루하루를 잘 채워나가는 반짝이는 나날이 되길 응원합니다.
#모자무싸 #오정세 #니가좋아 #여성동아
사진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프레인TPC JTBC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