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할리우드 스타 린제이 로한은 한글이 디자인된 옷을 입고 유명 패션지 ‘나일론’ 화보를 찍어 화제를 모았다. 그 의상에는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이 가수 장사익의 붓글씨로 쓰여 있었다. 올 3월 내한한 프랑스 여배우 줄리엣 비노시도 한글로 디자인된 옷을 가져갔고, 피겨요정 김연아는 세계선수권 대회 우승 후 한글이 새겨진 티셔츠에 스카프를 착용하고 아이스쇼 무대에 섰다.
이 모든 게 디자이너 이상봉의 작품이다. 그의 손을 통해 한글은 세계인이 사랑하는 문양으로 거듭났다. 그가 한글을 패션에 이용해 처음 선보인 건 세계 최고 무대로 불리는 파리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에서다. 2002년부터 이 컬렉션에 진출한 이상봉은 2006년 한글 문양으로 옷을 디자인해 패션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한글은 제게 큰 행운을 가져다줬어요. 한글 옷을 처음 선보인 다음 날, 현지 신문 1면에 리뷰 기사가 실린 걸 보고 깜짝 놀랐죠. 그렇게 반응이 뜨거우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거든요. 한글이 갖는 아름다움은 ‘조합’이에요.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유일한 언어로서 모던하고 표현할 수 있는 범위도 넓죠. 그동안 우리는 한글을 진화시키지 못하고 모셔두기만 했어요.”
벌써 일곱 시즌째 파리에서 한글 패션을 발표하다 보니 직원들 사이에서는 ‘한글에 너무 집착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학문으로만 접근해온 한글을 문화로써 대중에 알린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앞으로도 한글 디자인의 가치를 꾸준히 더욱 발전시키고 싶다고 한다.
최근 이상봉은 세계를 무대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패션의 메카인 미국 뉴욕에 쇼룸 개념의 현지법인 ‘블랭크 스페이스(Blank Space)’를 설립한 것. 이 공간에는 의상뿐 아니라 도자기, 벽지 등 생활소품류의 작품도 전시된다. 이상봉은 “패션과 문화를 함께 아우르는 공간이자 젊고 패기 넘치는 작가들의 기회의 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가 해외진출의 거점으로 뉴욕을 선택한 이유는 바이어들의 접근성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기존에는 파리에 있는 홍보대행사에서 모든 업무를 도맡아 하는 바람에 미국 잡지사에서 화보 촬영을 하려고 하면 파리에서 물건을 공수해 진행하는 불편함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뉴욕에 법인이 설립된 이후에는 그런 번거로움을 덜게 됐다.
패션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뉴욕 무대. 하지만 누구나 그곳에 설 수 있는 건 아니다. 이상봉 역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특히 지난해 환율이 폭등하면서 심한 자금난을 겪었다고 한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겠냐”며 너털웃음을 짓는 그는 “파리에서 전시회는 96년부터 시작했는데, 그때도 IMF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힘들수록 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힘이 나더라”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여태껏 1백 번 넘게 패션쇼를 열었는데도 쇼를 앞두고는 항상 악몽에 시달려요. 쇼는 시작됐는데 객석이 텅 비었거나, 객석은 꽉 차 있는데 제가 옷을 다 못 만들어 발을 동동 구르는 내용의 꿈들이죠(웃음). 매번 쇼를 준비하는 동안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도 막상 쇼가 끝나고 나면 설명하기 힘들 정도의 공허함이 느껴져요. 오히려 일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죠. 디자이너가 되지 않았다면 분명히 우울증에 걸렸을 거예요.”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창작의 고통. 이상봉 역시 그로 인해 자살충동까지 느낀 적이 있다고 한다. 94년 외국에서 ‘샤머니즘’을 주제로 한 쇼를 준비할 때였는데, 쇼 개막을 한 달 앞둔 시점까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쇼가 엉망이 되는 것을 보느니 다 포기하고 조용히 죽어버리자’는 마음까지 먹었다고. 이상봉은 당시를 인생 최대의 위기로 꼽았다.
“그래도 인생이 재미있는 게 극한 상황에 다다르면 생각지 못한 또 다른 길이 열린다는 거예요. 쇼를 준비하면서 거의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시장에 있는 한 한복집을 찾았는데, 그곳에서 유명한 무당 이혜경씨를 만났죠. 순간 바로 이거다 싶었어요. 당시 이혜경씨는 자서전 출간에 맞춰 출판기념회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딱한 제 사정을 듣더니 바로 파리로 함께 가겠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쇼 오프닝 퍼포먼스로 무당굿을 했고 성공리에 패션쇼를 마칠 수 있었어요.”
“수선가게 꿈꾸던 청년, 세계적인 디자이너 되기까지…”
사람들은 그가 처음부터 디자이너의 피를 타고났다고 생각하지만 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과거(?)가 있다. 어려서부터 글쓰기를 좋아한 이상봉은 시나리오 작가를 지망하며 서울예대 방송연예학과에 진학했고, 그때부터 연극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인생을 연극에 묻겠다’고 다짐했던 그는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꿈을 접었다.
“공연을 한 달 앞두고 연습장을 뛰쳐나왔어요. 지금 무대에 올라 공연을 하면 평생 연극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미 그때 책임져야 할 가정이 있었기 때문에 제멋대로 ‘연극의 늪’으로 빠져들 수 없었어요.”
어려서부터 그의 집은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했다. 아버지는 평생 병상에 누워계셨고 어머니가 가장 역할을 하며 살림을 꾸려갔다. 어린 시절 그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원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다 군에 입대하던 날, 그는 자신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그동안 품었던 원망을 한번에 날려버렸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가 입대한 지 3일 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는 제대 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 채 방황의 시기를 보냈다. 그때 운명처럼 아내를 만났다.
“친구와 다방에 있는데 저희 테이블 뒤에 여자 두 명이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더라고요. 그중 허리까지 내려오는 생머리의 여인이 눈에 확 들어왔어요. 얼굴도 보지 않고 ‘시간 되면 한번 만나자’며 쪽지를 건네고 도망갔죠. 당시만 해도 음악다방에서 모든 역사가 이뤄졌거든요(웃음). 다음 날 한 시간이 넘도록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아 포기하고 다방문을 나서 계단을 내려오는데 그제야 아내가 계단을 황급히 올라오더군요. 나중에 들어보니 구두굽이 부러져 고치고 오느라 늦었다고 해요(웃음).”
서로 첫눈에 반한 두 사람은 일주일 뒤 냉수 한 잔을 떠놓고 둘만의 결혼식을 올렸다. 이상봉은 “당시 아내는 내 인생의 유일한 돌파구였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동거한 지 6개월 만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고, 이상봉은 친척 어른의 소개로 일반 회사에 취직했다. 하지만 첫 직장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내성적인 성격인데다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다 보니 1년 정도 지나서는 날마다 코피를 쏟고 하혈을 했던 것. 보다 못한 아내는 “돈도 중요하지만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라”며 그를 학교로 다시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상봉은 대학 졸업 후 생계를 고민하던 중 신문 광고란에 실린 의상학원의 모집공고를 보고 인생의 행로를 바꿨다. 디자이너로서의 삶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어려서부터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지만, 남들과 똑같은 게 싫어서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 입곤 했어요. 의상학원을 선택한 건 수선집 하나 차리면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겠다 싶어서였죠.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재미있고 가슴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걸 느끼겠더라고요. 하루에 세 개 클래스를 반복해 들으면서 하루 종일 옷 생각밖에 안 했죠. 2년 과정을 마친 뒤에는 ‘국제패션디자인연구원’이란 곳에서 1년 동안 정식으로 디자인 공부를 했는데, 그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도 없을 거예요.”
연구원 과정을 거치면서 패션에 남다른 두각을 보인 이상봉은 연구원 졸업 후 바로 유명 부티크 실장으로 스카우트 됐고, 몇 년 뒤 자신의 이름 석자를 딴 ‘이상봉 부띠끄’를 개업했다. 패기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자신만만하던 시절, 그는 롯데백화점에 ‘소호’라는 세컨드 브랜드를 입점시키며 디자이너로서 유명세를 떨쳤다.
“돌이켜 생각하면 젊은 시절 참 건방지고 착각도 심했던 것 같아요(웃음). 백화점 입점과 관련해 상무 면접을 봤는데 ‘좋아하는 외국 디자이너가 누구냐’는 질문에 ‘나 이외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정도죠. 하지만 그게 솔직한 심정이었어요. 외국에 나가 새로운 트렌드를 익히라고 조언해주는 분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저는 ‘내가 완전해지기 전까지는 남의 옷을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곤 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국내파’라는 타이틀이 더욱 자랑스럽고 애틋하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언제나 서른일곱, 최대한 천천히 내리막길 걷고 싶어요”
그는 슬하에 아들, 딸을 두고 있다. 아들은 아트디자인을 전공한 뒤 현재 런던에서 남성복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고, 의상학을 전공한 딸은 뉴욕에서 매니지먼트 관련 일을 하고 있다. 이상봉은 2007년 딸의 웨딩드레스를 직접 만들었다. 몇 년 전 연예인 커플에게 웨딩드레스를 선물했다가 그들이 이혼한 뒤로 웨딩드레스를 만든 적이 없는 그이지만 딸의 간곡한 부탁은 거절할 수 없었다고 한다.
“며느리는 안 만들어줬는데 딸에게만 웨딩드레스를 선물하려니 미안한 마음이 들더군요(웃음). ‘아빠 옷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해서 딸의 고집을 꺾지 못했죠. 덕분에 처음으로 딸아이의 몸을 찬찬히 만져 볼 수 있었는데, 가봉할 때는 일주일 새 아이의 몸이 어찌나 말랐던지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그동안 모델들한테는 조금만 살이 쪄도 눈물이 쏙 빠지게 야단을 쳤는데, 내 딸이 마르는 건 싫었나봐요. 결혼식장에서는 단상 위에서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이제 온전히 내 품을 떠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울컥하기도 했어요.”
젊은 시절 옷 짓는 데만 매달려 산 그는 가정에서는 ‘빵점짜리’ 아빠였다고 고백한다. 아들과 목욕탕에 한번 가보지 못한 게 가장 후회된다고. 그래서 그는 후배나 직원들에게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많은 걸 함께 경험하라고 조언해준다고 한다.
“얼마 전 아들이 런던에서 전시회를 열었는데, 아직 경험이 많지 않은데도 차분하게 잘 진행하는 걸 보고 마음이 흐뭇했어요. 오픈 행사 때 초대 손님들이 많아서 또 한번 놀랐죠. 저는 성격이 내성적이라 친한 친구가 많지 않은데, 아들은 저를 닮은 것 같으면서도 친구들이 참 많더군요. 그런 아들이 부럽기도 하고 대견하게 느껴졌어요.”
이상봉은 나이를 묻는 질문에 언제나, 누구에게나 “서른일곱”이라고 답한다. 누구나 나이 드는 게 반갑지 않지만, 언제나 한결같은 감성을 유지해야 하는 디자이너에게 나이 듦은 더욱 두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저 스스로도 편견을 갖고 싶지 않아 나이를 잊고 살아요. 나이가 들수록 경험과 노련미가 쌓이는 반면, 감각적인 면에서는 후퇴하기 마련이거든요. 제 나이를 서른일곱으로 정해놓은 건 죽을 때까지 젊은 척하겠다는 게 아니라, 최대한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감각을 잃어가겠다는 의미예요. 하루아침에 갑자기 추락하고 싶진 않거든요.”
어떤 사람은 이상봉의 옷을 보고 “자기만의 색깔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의 틀에 갇혀 있는 건 진정한 이상봉이 아니다.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마음껏 풀어놓는 것,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도전정신을 발휘하는 것이야말로 ‘이상봉다움’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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