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7일 \'개성공단 아파트형 공장\' 기공식에 참석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그는 시동생과의 경영권 분쟁이라는 아픔을 뒤로한 채 \'대북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4월27일 오전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51)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시동생 정몽준 의원이 대주주로 있는 현대중공업그룹이 현대그룹 주력계열사인 현대상선 지분을 다량 매입해 최대주주에 오른다는 것. 예상치 못한 ‘시동생의 공격’에 당황한 현 회장은 수차례 정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날 검찰은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해 현 회장은 더욱 충격에 휩싸였다.
2006년 봄은 현정은 회장에게 ‘잔인한 계절’이다. 현 회장은 지난 5월 중순 현대그룹 사내 통신망에 띄운 ‘사랑하는 현대그룹 임직원들에게’라는 제목의 글에서 “계절은 봄에서 여름을 재촉하는 초록의 싱그러움이 더하지만 지금 제게는 꽃들의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고 그 속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며 시동생 정몽준 의원과의 경영권 분쟁에서 느낀 소회를 전했다. 그가 더욱 비통함을 느끼는 이유는 남편 고 정몽헌 회장이 가장 아꼈던 동생 정 의원에 대한 배신감 때문. 고 정몽헌 회장의 고교 동창이기도 한 김병훈 현대택배 사장(57)은 최근 현 회장의 심경을 이렇게 전했다.
“고 정몽헌 회장은 동생 정몽준 의원에게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정 의원이 2002년 대선 출마를 준비하던 당시, 정 회장은 ‘법적인 제재 때문에 그룹 차원에서 도와줄 순 없지만 다른 방법으로 지원하고 싶다’며 동생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으니까요. 남편이 그토록 믿고 아꼈던 시동생이 자신과 아무런 상의 없이 현대상선 지분을 대량 사들였기에, 현 회장은 더욱 당혹스러워했습니다.”
현대중공업 측이 내세운 명분은 자사의 최대 고객인 현대상선에 대한 외국인의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험이 높아져 고객 확보 및 투자 차원에서 지분을 매입했다는 것. 이들은 “현대상선 지분 매입에 경영권 행사 의도는 전혀 없다”고 일관된 주장을 펴고 있다. 하지만 현 회장은 “현대중공업그룹이 백기사(적대적 M&A 공격을 막아주는 세력)이고, 단순 투자목적으로 지분을 매입했다면 현대그룹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5천억원이란 거액을 들여서 시가보다 높은 값에 주식을 매입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시집 와서 30년, 누가 뭐래도 나는 정씨 집안 사람…”
현대중공업그룹은 한때 현대그룹이 대북송금 특검, 현대상선 분식회계 등으로 그룹 생존권마저 위협받을 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현대그룹이 도움을 받지 않겠다는데 현대중공업그룹이 굳이 돕겠다고 나선 형국이다. 현 회장은 3년 전 남편의 죽음을 뒤로하고 현대호의 선장이 돼 어려움을 겪을 때 시삼촌인 KCC 정상영 명예회장과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놓고 일전을 벌인 아픔이 있다. KCC도 처음에는 백기사를 자처하다가 적대적 M&A를 시도한 전력이 있어 현대그룹은 현대중공업그룹의 숨은 의도를 의심하고 있다.
일부 언론은 “현대상선과 현정은 회장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진 정몽준 의원이 복수의 의미로 현대상선의 지분을 매입했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왕자의 난’이 벌어지던 2000년 고 정몽헌 회장이 현대상선을 통해 현대중공업그룹의 지분을 사들인 적이 있는데, 이를 위협적으로 판단한 정몽준 의원이 정 회장을 찾아갔지만 형수인 현 회장이 문조차 열어주지 않았다는 것. 이러한 소문에 대해 현대그룹 관계자는 적극 반박했다.
“당시 정몽헌 회장이 현대상선을 통해 현대중공업 지분을 사들인 것은, 현대그룹을 살리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던 ‘그룹 운영위원회’의 결정이었습니다. 정 회장이 동생인 정 의원을 불러 이에 대한 배경 설명을 했고, 정 의원도 그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현대상선이 보유한 주식은 다시 정 의원에게 돌아갔고요. 정 의원이 정 회장의 집에 찾아간 것은 사실인데, 그때 현 회장은 시동생에게 식사대접을 잘해 돌려보냈습니다. 정 회장은 동생의 지분을 빼앗을 의도가 전혀 없었는데, 소문이 와전돼 안타깝습니다.”
지난해 3월20일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선영에서 열린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4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정몽준 의원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현 회장은 사내통신망에 올린 글에서 “현대자동차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와중에 발생한 시동생의 난은 저에게 가족의 의미를 되묻게 하는 아픔이며, 국민들에게 드린 실망감으로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는 일”이라고 털어놓았다. 또한 “지난 2002년 대선 당시 정 의원이 말을 바꾸고 신의를 배신한 것처럼 언제든 말을 바꾸고 경영권 보호를 가장한 기만행위의 검은 속내를 드러낼 가능성이 충분하다”며 정 의원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정씨 집안으로 시집와서 30년의 세월을 살았고 어떤 경우라도 정씨 집안 사람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호소를 통해 그는 자신이 현대가문으로부터 소외될 수 없음을 강조했다. 한편, 현대중공업그룹은 현 회장의 글에 대해 “현대상선 지분 매입은 투자목적이며 굳이 대응할 필요를 못 느낀다”고 일축했다.
현 회장은 지난 5월19일 고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의 1주기를 맞이해 경기도 양수리 선영을 방문하고 서울 삼성동 현대산업개발 사옥에서 열린 추모행사에 참석해 ‘정씨’ 가문의 일원으로 도리를 다했다. 시종 담담한 표정의 현 회장은 추모행사에 참석한 어른들에게 깍듯이 인사했고, 행사 중간 점심 자리에서는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딸 정성이 이노션 고문 등 현대가 여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그는 이날 시동생 정몽준 의원과 만나려 했지만, 정 의원은 외부 약속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아 두 사람의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정 의원과 만나 현대상선 지분을 매입한 의도를 확인하고 “현대상선 유상증자에 참여하지 말아달라”는 뜻을 전하려 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 회장과 정 의원의 만남이 이뤄진 것은 이튿날인 5월20일 저녁. 고 정세영 명예회장의 자택에서 열린 제사에 나란히 참석한 것. 하지만 정 의원은 경영권 분쟁에 관한 입장을 뭍는 취재진의 질문에 “가족 행사에까지 찾아와서 취재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답변을 거부했고 두 사람이 이날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현 회장에게는 배짱 두둑한 기업인의 피가 흐른다. 조부 현준호씨는 호남은행 설립자고, 부친 현영원씨는 현대그룹과 사돈이 된 후 자신이 운영하던 신한해운을 현대상선에 흡수시킨 기업가다. 현 회장의 외조부 김용주씨는 전방그룹 창업주이며, 김창성 전방그룹 명예회장은 현 회장의 외삼촌이다. 친가·외가 두루 기업을 경영하는 것을 보고 자란 그는 명성과 지위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경영 경험이 없는 가정주부가 잘할 수 있겠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현 회장은 간결하게 한마디를 던진 적이 있다.
“경험이 없다는 것과 경영능력이 없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현 회장은 정 회장 사망 이후 가정주부에서 여성 CEO로 변신, 대북사업 등에서 숱한 난관에 부딪히면서도 현대그룹의 기틀을 잡아나갔다. 정몽헌 회장 사망 당시 2천3백억원의 적자를 냈던 현대그룹은 현정은 회장 체제 출범 1년 만인 지난 2004년 그룹 매출 6조7천억원, 이익 5천8백억원을 기록하며 흑자로 전환했다. 지난해에는 무려 7천4백억원의 순이익을 달성했다. 대북사업에서는 지난해 7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백두산 관광의 물꼬를 트는 등 남편의 못다 한 꿈을 이어갔다. 현대아산의 인사문제에 있어서도 소신과 원칙을 지키는 뚝심과 배짱을 발휘했다.
임직원의 수험생 자녀에게 목도리 선물하는 등 감성적 리더십 발휘
뿐만 아니라 그는 2010년까지 6개 계열사 매출을 20조원으로 끌어올려 재계 10위(현재 19위)권에 입성하겠다는 야심 찬 ‘2010 프로젝트’를 세상에 선보였다. 그는 뚜렷한 비전을 제시하며 흩어져 있던 임직원들의 마음을 한데 모으기 시작했다.
남성적인 문화가 강한 현대그룹에 감성경영의 뿌리를 내린 것도 현 회장이 거둔 남다른 성과다. 현 회장은 2004년 8월, 한동안 중단됐던 계열사 합동 신입사원 수련대회를 부활시켰다. 그는 신입사원과 금강산 산행, 해변체육대회, 장기자랑을 함께하며 “신입사원들이 각 계열사에서 밝고 활기찬 모습으로 회사 분위기를 새롭게 바꿔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남편과 사별한 후 가정주부에서 여성 CEO로 전격 변신한 현정은 회장은 특유의 뚝심과 추진력으로 적자에 허덕이던 현대그룹을 경영 1년만에 흑자 기업으로 돌려놓는 성과를 일궈냈다.
그는 매년 말 계열사 임직원에게 이메일로 감사 연하장을 보낸다. 지난해 7월에는 복날을 맞아 계열사 임원 가족에게 포장용 삼계탕 9백여 마리분을 편지와 함께 보내기도 했다. 편지에는 “열심히 일하시는 임원들과 이들을 아낌없이 지원해주시는 가족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건강은 바로 지금 지키는 것이지 때가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초복 당일 구내식당에서도 직원들에게 삼계탕 특식을 선사했다.
지난해 6월 중순에는 현 회장이 초등학생 자녀를 둔 임직원들에게 ‘아이 안에 숨어 있는 두뇌의 힘을 키워라’는 책을 선물했다. 겨울에는 임직원의 수험생 자녀에게 목도리를 보내는 등 현 회장은 여성 최고경영자(CEO) 특유의 감성경영을 펼치며 그룹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책과 삼계탕, 목도리는 직원들로부터 “직장생활을 하는 동생을 생각하는 큰누나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선물이었다”는 평을 받았다.
김병훈 현대택배 사장은 현 회장의 리더십에 대해 “계열사 경영에 일일이 참여하기보다 각사의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되, 현 회장은 윤리경영·지속가능경영의 감시자 역할을 수행하며 기업경영의 효율을 높였다”고 평가했다. 또한 “남성적인 조직문화로 유명한 현대그룹에 현 회장의 세밀한 감성이 접목되면서 큰 시너지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각에서는 현정은 회장이 사내통신망에 글을 올려 사람들의 감성에 호소한 것을 빗대 ‘눈물경영’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현 회장은 정작 남들 앞에서 눈물 한 방울 내비친 적이 없다. 자신만을 바라보는 사원들을 위해서라도 결코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년 만에 경영권 방어에 나선 현정은 회장은 유상증자, 우호지분 확보 외에도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현대중공업그룹 측 공격에 대응할 방침이다. 위기 때마다 뚝심과 통찰력을 발휘해 어려움을 돌파해온 현 회장의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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