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박완서씨의 자택 정원에서 어머니와 담소를 나누는 호원숙씨(오른쪽).
따사로운 5월의 햇살이 내리쬐는 서울 경기여고. 여고생들의 까르르 웃음소리가 유쾌하게 퍼져나가는 교정은 눈부시게 푸르다. 우거진 녹음과 활짝 핀 꽃들이 저마다 향기를 내뿜는 교정을 걷노라니 마치 여고생으로 돌아간 듯 가슴이 설렌다.
개포동 경기여고 교사 안에 자리 잡은 경운박물관. 이곳에서 첫 수필집 ‘큰 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내 키가 커졌다’를 펴낸, 작가 박완서씨(75)의 맏딸 호원숙씨(52)를 만났다. 자연스럽게 빗어 넘긴 단발머리, 둥근 콧날, 소녀처럼 해맑은 미소…. 어머니를 쏙 빼닮은 그의 인상이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정겹다. 그는 1992년 어머니의 일대기를 다룬 ‘행복한 예술가의 초상’에 ‘모녀의 시간’이란 글을 썼고, 2002년 ‘우리 시대의 소설가 박완서를 찾아서’의 필자로 참가한 바 있다. 지금껏 ‘박완서의 딸’로 글을 써왔지만 이번 수필집을 통해 그는 ‘에세이스트 호원숙’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동안 제 글을 쓰려고 했던 적도 있었지만, ‘어머니가 이렇게 많이 쓰시니까 나는 안 써도 좋아’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70년대부터 집필활동을 시작한 어머니의 작품이 쌓이니까 그 업적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제가 떠올렸던 것과 똑같은 구절을 다른 사람들의 글에서 발견하며 ‘이제는 망설이지 말고 네가 먼저 써보라’는 내면의 소리를 들었어요. 그래서 여고 동창회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모교인 경기여고가 운영하는 경운박물관의 운영위원으로 봉사하던 호씨는 2004년부터 1년 넘게 ‘아침 산책’이라는 제목으로 동창회 사이트에 글을 썼다. 1백 편 넘게 연재가 이어지며, 호씨의 글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이번 수필집은 바로 그의 인터넷 연재글을 모아 펴낸 것이다.
“글이 반듯하고 정갈하다”는 어머니 평가 받고 기뻐
그는 수필을 통해 매일 아침 우리가 만나는 식물들의 표정, 아름다운 시구와 성서의 구절에 대한 단상, 전시회에서 본 그림들의 잔상, 사랑하는 가족들의 모습 등을 잔잔하게 그려냈다. 이해인 수녀는 호씨의 글에 대해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것들까지도 사색의 깊은 우물에 넣어 감칠맛나는 언어로 건져올리는 그의 인생관은 아름답고 긍정적이며, 수수하고 지혜롭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문단의 선배인 어머니 박완서씨는 딸의 글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책을 내기 전 어머니께 원고를 보여드리지 않았는데, 어머니는 제 글을 인터넷에서 진작부터 봐오셨다고 해요. ‘생각보다 잘 썼다. 글이 반듯하고 정갈하다. 종교를 가진 신자들에게 돌려 읽히고 싶다’고 하셔서 정말 기뻤습니다.”
작가로서 또한 자연인으로서 늙어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마음이 그의 글에서 애틋하게 드러난다. 딸들을 개성 있고 남다르게 입히기 위해 늘 창조적으로 옷을 만들고, “인생에 엄살떨지 말라”고 가르친 어머니는 그에게 경탄과 찬미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맏딸인 그가 어머니의 ‘보호자’ 혹은 ‘매니저’ 역할을 자청하고 있다. 오죽하면 한 이웃이 “저 집은 박 선생님이 딸 같고 딸이 엄마 같아”라고 말했을까.
“저한테 의지하시는 어머니를 보며 참 현명한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보통 나이가 들수록 자신이 모든 걸 다 하려고 욕심을 부리는데, 어머니는 놓아야 할 부분을 알고 가볍게 살아가시고자 하세요. 요즘은 어머니가 글을 쓰는 데 몰두하면, 저는 저작활동 이외의 모든 외부활동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얼마 전 숙명여대 도서관이 ‘세계여성문학관’을 개관하며 어머니 코너를 만들었는데, 제가 실무 담당자로 나섰어요. ‘상실의 시대’를 쓴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비서진과 매니저를 거느리고 있다는데, 제가 바로 어머니의 매니저인 셈이죠.”
처음엔 그도 작가의 길로 들어선 어머니를 원망한 적이 있었다. 우리 가족의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만의 세계로 날아가버려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서운함에 마음이 저려와 밥도 물도 먹을 수 없었다는 것. 그러나 그는 이내 어머니의 든든한 도우미가 됐다. 신문사나 출판사에 어머니의 집필 원고를 배달하고, 어머니가 저작에 몰두할 수 있도록 가사노동을 분담한 것. 그는 “(경기여고 2학년 재학시절) 모범생인 내가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당선자 시상식에 참가하는 어머니의 사진을 찍기 위해 처음으로 조퇴를 했고, 등교하기 전 ‘여성동아’ 사무실에 어머니 연재소설 원고를 갖다주곤 했다”며 ‘여성동아’와의 오랜 인연을 떠올렸다.
어머니의 외모뿐 아니라 글솜씨까지 물려받은 호원숙씨는 박완서 선생의 다섯 자녀 중 유일한 문학 전공자다. 평범한 전업 주부로 살다가 50세가 넘어 첫 수필집을 낸 것마저, 40세에 소설가로 등단한 어머니의 삶의 여정과 비슷하다.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뒤 잡지 ‘뿌리 깊은 나무’의 편집기자로 일했던 호씨는 결혼과 동시에 가정생활에만 전념했다. “어머니와 여러모로 많이 닮으신 것 같다”는 인사에 그는 환한 웃음으로 답한다.
“사실 외모는 아버지를 닮았다고들 하는데…. 쌍꺼풀진 큰 눈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았어요. 어머니와 저는 감각이 참 많이 닮았어요. 어떤 풍경이나 그림을 볼 때 눈길이 항상 같은 곳을 향하고, 좋아하는 책이나 사람도 비슷하거든요. 정리정돈 잘하는 어머니의 생활습관은 닮지를 못했지만요(웃음). 닥치는 대로 글을 읽는 ‘문자중독’ 성향도 닮은 것 같아요.”
박완서씨는 남편 고 호영진씨와의 사이에서 다섯 자녀를 뒀다. 자녀가 모두 잘 성장한데다 집안이 화목해서 이들 가족은 동네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맏딸 원숙씨는 서울대 동문인 남편(신라대 관광경영학과 교수)과, 수학교사였던 둘째 딸 원순씨는 연세대 동문인 남편(사업)과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셋째 딸 원경씨와 사위는 각각 서울대 의대 교수와 성균관대 의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홍익대 미대 대학원을 졸업한 넷째 딸 원균씨는 대구대 화학과 교수와 결혼했고, 막내아들 원태씨는 서울대 의대에 진학한 수재였다. 하지만 이들 가족에게 88년 갑작스런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버지에 이어 동생 잃은 애끊는 슬픔, 가족간의 사랑으로 치유
모교인 경기여고가 운영하는 경운박물관의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는 호원숙씨. 현재 박물관이 개관 3주년을 맞아 ‘옛 속옷과 침선-겹겹이 깃든 기품’ 기념전을 여는데 그가 보도자료 제작 및 작품설명을 담당했다.
88년 폐암으로 투병하던 호씨의 아버지가 숨을 거뒀다. 다정다감하고 가정적이었던 아버지는 가족의 가슴에 빈자리를 남기고 떠났다. 그러나 상처가 채 아물기 전 또 하나의 비극이 닥쳤다. 석 달 후, 호씨의 남동생 원태씨가 25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 병원 레지던트로 일하던 그는 과로로 돌연한 죽음을 맞았다. 죽은 동생의 생일이 들어있는 4월이 되면, 호씨는 가슴앓이를 한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날 교정에서 의사 가운을 입고 찍은 사진만 남겨 놓고 간 동생. 그에 대한 애끊는 그리움과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동생을 ‘불효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정말 야속했어요. 그 아이는 생전에 항상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린 착한 아들이자, 좋은 동생이었거든요. 게다가 자기 의지로 죽은 것도 아니잖아요. 저는 동생을 불효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어머니로부터 차단시키느라 바빴어요. 아마 가족끼리 행복했던 기억, 가족간의 극진한 사랑이 없었다면 그 고통을 견디기 어려웠을 거예요.”
호원숙씨는 “어머니와의 거리 조절을 못하다가 어머니의 글을 보고 마음 깊이 감동한 것은 잔인하게도 동생이 죽은 다음부터”라고 말한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보며 어머니를 작가로서 존경하게 됐고,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와 ‘너무도 쓸쓸한 당신’은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 눈물로 겹쳐 읽었다는 것. 그는 글을 통해 “남편과 외아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쓰신 어머니의 작품 앞에서 진정으로 무릎을 꿇게 된다. 운명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서 이겨낸 어머니의 모습과 작품은 말할 수 없는 겸허와 존엄에 차 있어 저리도록 아름다웠다”고 고백한다.
호씨는 버리고 가볍게 살아가기를 실천하는 어머니를 동경한다. 고통을 과장하는 엄살도, 조금 좋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도 싫어하는 어머니로부터 그는 절제와 의지를 배웠다. 물질적인 욕심도, 명예욕도 부리지 않는 어머니의 청빈한 삶은 딸 원숙씨에게 뚜렷한 삶의 지표가 됐다.
하지만 ‘우리 문학사의 큰 나무’ 박완서씨의 존재는 딸 원숙씨에게 커다란 그늘을 드리웠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에게 “어머니가 큰 나무여서 (본인은) 기죽어 지낸 것 아니냐”며 상처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는 결코 나의 그늘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저는 어머니로 인해 기죽은 적이 없고, 어머니가 저를 기죽인 적 또한 한 번도 없었어요. 어머니는 자식들의 자율을 존중해주셨고, 각자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도록 가르치셨어요. 저는 제 나름의 영역이, 어머니는 어머니 나름의 영역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어머니와 비교할 수 없는 나이고 저의 내력과 운명과 꿈이 따로 있으니까요. 돌아가신 아버지는 글 쓰는 어머니를 경쟁자가 아닌 보호해줄 사람으로 여기며 평생 아끼셨죠. 어머니가 ‘나목’으로 데뷔하기 전 신문사에 장편소설을 응모한 적이 있는데, 아버지는 낙방한 원고를 신문사에서 소중하게 찾아오셨어요. 아버지가 어머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셨듯, 저도 그렇게 어머니를 사랑해요.”
“너는 딸이요 친구인 동시에 내 문학의 적절하고 따뜻한 비평가”라고 말한 어머니
박완서씨는 지난해 2월 ‘생활성서’에 기고한 ‘딸 호원숙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에서 맏딸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고마움을 표현했다. 모녀의 끈끈한 연대는 질투가 날 만큼 견고하고 아름답다.
“엄마는 신문사나 출판사 같은 데 가는 걸 몹시 수줍어해서 어떡하든지 기피하려고 했다. 엄마의 이런 사회성 부족을 네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지금 정도의 작가도 되기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원고 심부름이 네 전담이 됐다. 이제 연로해 원로가 된 언론인 중에는 흰 깃을 단 교복을 입고 신문사 편집국으로 연재소설을 나르던 너를 기억하고 안부를 묻는 분이 더러 있단다. 동생들 제쳐놓고 원고 심부름만은 꼭 너한테 시켰던 것은 너도 나만큼 원고를 소중히 여겨줄 것 같은 믿음 때문이었다.
근심이 생겨 너한테 털어놓을 말을 머릿속으로 굴리기만 해도 근심의 반은 사라지고, 미운 사람 욕을 너한테 하고 나면 미움이 사라지고 만다. 도저히 인력으로는 해결 안되는 어려움이 생겼을 때는 너한테 기도 좀 해달라는 부탁까지 하니 얼마나 한심하고 뻔뻔스러운 엄마냐. 그러나 이해해다오. 내 기도발보다는 네 기도발을 더 믿는 것은 모성애보다 더 깊은, 네 진국스러운 인간성에 대한 신뢰감이라는 것을. 너는 딸이요 친구인 동시에 근래에는 내 문학의 적절하고 따뜻한 비평가 노릇까지 겸해주었다.”
책을 가까이했던 어머니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문학’이란 글씨를 알았다는 호원숙씨는 이제 수필가로서 자신의 이력을 새롭게 새겼다. 절제의 미덕을 지닌 그의 글은 사실 가슴속 뜨거운 열정을 걸러낸 결과물이다. 50여 년의 세월 동안 묵히고 닦아온 문재(文才)를 비로소 세상에 드러내기 시작한 그는 요즘 글을 쓰며 가장 행복하다.
“사람들은 제 글을 보고 잔잔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저는 글을 통해 제 뜨거운 마음을 걸러내고 정화해요. 때로는 한껏 가라앉는 마음을 글을 통해 불러일으키기도 하고요. 평소 읽었던 책, 갤러리에서 마주친 그림, 주변 사람들이 모두 제가 글을 쓰는 원천이 돼요. 제가 글을 쓰며 느꼈던 기쁨과 평온한 기운이 독자들에게 그대로 전달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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