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가 선정한 ‘올해의 여성 100인’ 명단을 보자마자 박수빈 ‘계단뿌셔클럽’ 대표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는 흔쾌히 요청에 응했다. 섭외가 가장 난관인 보통의 인터뷰와 달리 박 대표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인터뷰 공간을 찾는 것이었다. 박 대표는 휠체어 사용자다. 전화로 알아보니 요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렌털 스튜디오는 거의 1층에 없었다. 엘리베이터 없이 계단을 이용하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드디어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을 찾았지만 ‘휠체어 이동이 자유로운지’를 물어보자 담당자는 “건물 1층에 턱이나 경사로가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가 이동 약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깨닫는 순간이었다.
박수빈 대표가 계단뿌셔클럽을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다. 계단뿌셔클럽은 ‘계단정보’를 모으고 조회할 수 있는 모바일 앱 서비스를 제공한다. 2021년 직장 동료 이대호 씨와 함께 ‘접근성 정보 수집 프로젝트’를 결성한 게 시작이다. 그해 5월 웹 개발에 착수, 8월에 펀딩으로 운영 자금 400만 원을 모으고 10월에 ‘계단정복지도’ 웹 버전을 출시했다. 6개월 만에 웹 개발까지 마무리한 것으로 미루어 박 대표의 추진력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동 약자를 위한 접근성 정보를 모으겠다는 일념 아래 프로젝트를 만들고 목표를 달성해왔다.
박 대표가 만든 계단정복지도 앱에는 다양한 건물의 층 정보, 입구 정보, 출입문 유형 등이 명시돼 있다. ‘계단정복활동’이라고 불리는 정보 수집에는 여태까지 300여 명이 참여했다. 박 대표에게 “그들 모두가 자원봉사자인가요”라고 묻자 그는 “우리가 친구의 문제를 해결할 때 봉사한다고 표현하지 않잖아요”라고 답했다. 박 대표는 “감정적인 동요가 일면 자연스럽게 문제를 함께 해결하게 되는 것”이라며 이들의 정복 활동의 의미를 설명했다. 박 대표는 휠체어를 타고 가는 길에 만난 장애물을 ‘친구들’과 함께 용감하게 넘어서고 있다.
BBC가 선정한 ‘올해의 여성 100인’에 이름을 올린 소감 부탁드립니다.
기쁘다기보다는 당황스럽고 얼떨떨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당연히 안 된 줄 알았거든요. 이후 BBC로부터 메일로 질문이 와서 답변했는데, 그게 선정 과정 중 하나인 줄 알았어요. 다시 읽어보니 100인에 선정됐다는 거였어요. 메일을 잘못 이해했을 만큼 예상하지 못했죠.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축하받으면서 선정됐다는 사실을 실감했던 것 같습니다. 신기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해요.
BBC는 어떤 질문을 했나요.
‘혐오가 많은 요즘 세상에서 희망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주셨어요. 질문을 받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우리의 다정함과 우정이 결국에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근원인 것 같다’라는 대답을 보냈어요. 그전부터 계단뿌셔클럽 멤버들과 하고 있는 얘기였거든요. 다정함과 우정으로 친구가 되면 균열과 혐오가 어디 있겠어요? 친구는 금방 싸우고도 화해하고 다시 함께하는 사이니까요. ‘많은 사람이 서로 친구가 돼야 할 것 같다’는 답을 했습니다.
인간의 긍정성을 믿는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는 ‘개인기로 내가 살길만 잘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요.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 혼자만 잘 사는 것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누구나 나이 들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지는 순간이 오잖아요. 그리고 제 주변 지인들이 다정하고 좋은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창업하는 것도 가능했죠. 모두가 이렇게 행운아일 수는 없다는 생각에 함께 잘 살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하게 됐습니다. 또 계단뿌셔클럽을 운영하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함께 세상을 바꾸려고 왔구나’라는 생각에 역시 다정함이 희망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계단뿌셔클럽도 직장 동료, 친구들과 함께 창립했다고요.
창업 전에 공유 모빌리티 회사를 다녔어요. 직장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고민 중 하나가 ‘오늘 점심 어디서 먹지?’잖아요. 저와 제 동료들은 식사 장소를 찾을 때 메뉴보다 ‘휠체어가 갈 수 있나’를 먼저 고민해야 했죠. 그런 고민에 지쳐서 ‘검색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세상에 왜 접근성에 대한 정보는 없을까’를 생각했어요. 저처럼 접근성 문제를 고민하는 이동 약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회사 동료와 함께 창업을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 지인의 지인을 소개받아 개발자 3명을 더 모았어요. 처음에는 직장을 다니면서 사이드 프로젝트로 3년간 진행했는데요. 작년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계단뿌셔클럽에 매진하고 있어요.
계단뿌셔클럽에서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PM(프로덕트 매니저) 겸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어요. PM은 앱이나 서비스를 기획하거나 운영하는 역할을 합니다. 어떤 고객들이 해당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지를 확인하고, 서비스를 다시 출시하는 일도 하고요. 쉽게 말하면 서비스 기획자, 운영자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또 어떤 분들이 계단뿌셔클럽에서 일하나요.
접근성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이 필요한데요. 저희는 ‘크러셔 클럽’이라는 시즌제 멤버십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요. 한 시즌은 봄과 가을에 각각 3개월씩 운영해요. 크러셔 클럽의 멤버가 되면 주말에 2시간씩 이동 약자를 위한 정보를 수집하는 계단정복활동을 합니다.
크러셔 클럽 멤버는 자원봉사자들인가요.
어떤 의미에서는 자원봉사자에 가까운데 저희는 자원봉사자라고 부르지 않아요. 그분들도 본인이 봉사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으세요. 오히려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마음으로 사이드 프로젝트에 참여한다고 생각하죠. 우리가 친구 문제를 함께 해결할 때 봉사한다는 표현을 쓰진 않잖아요. ‘크루’도 그런 맥락에서 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사람이 모일 거라는 확신은 어떻게 생겼나요.
사이드 프로젝트로 시작한 팀이라서 처음에는 인력을 고용할 돈이 없었어요. 그렇다고 ‘봉사활동’으로 사람을 모집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잘 맞지 않을 것 같았죠. 창립 멤버 중 한 명이 “동네를 산책하면서 정보를 모으는 활동을 함께하자고 해보면 어떨까요?”라고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그때 걷기가 한창 유행이던 시절이었거든요. ‘우리 동네를 산책하면서 보람도 느껴보자’라는 취지로 시작했어요. 그런데 한두 분씩, 정말로 동네가 궁금하다면서 활동에 오시는 거예요. 초기에 오신 분들이 이 활동의 의미를 홍보해주시면서 사람이 모였어요. 그렇게 입소문을 타면서 커뮤니티가 점차 커지게 됐습니다.
참여하시는 분들과 어떤 이야기를 주로 나누나요.
계단정복활동 소감을 주로 들어요. “동네에 이렇게 계단이 많은지 몰랐다” “자주 가던 집인데 입구에 턱이 있는지 몰랐다” 이런 얘기를 하시는 걸 보고 우리가 의도한 것 이상의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보만 모으는 게 아니라 이동 약자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걸 많은 이가 알게 됐다는 데 보람을 느껴요. 인식을 환기해주는 효과가 추가로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활동에 참여할 수 있나요.
지금은 너무 추워서 따로 모집을 하지 않고 있어요. 비시즌이죠. 주로 봄가을에 크루와 게스트를 모집해요. 함께 정보를 수집하는 계단정복활동을 하는 방법이 있고요. 두 번째 참여 방법은 후원이에요. 계단뿌셔클럽은 비영리단체라 후원을 통해 유지되거든요. 이동 약자 문제 해결에 관심이 있다면 후원해주시면 됩니다. 저희는 그 후원금으로 문제 해결을 위한 의미 있는 활동을 해나가고 있어요. 인스타그램을 통해 활동 모습, 후원 정보 등을 알리고 있어요.
크루가 되면 주로 어떤 정보를 수집하나요.
구체적인 접근성 정보를 수집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접근성이 좋은 곳이 누군가에게는 나쁠 수도 있거든요. 왜냐하면 이동 약자의 모습은 다양하잖아요. 예를 들어 저는 지금 수동 휠체어를 타고 있지만 전동 휠체어를 타는 분들도 있고, 지팡이를 짚고 걷는 분도 계시잖아요. 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보는 다 다릅니다. 단순히 접근성이 좋다, 나쁘다고 평가하는 것을 넘어서 ‘입구에 계단이 한 칸이 있어요’ ‘엘리베이터가 있어요’ ‘경사로가 있어요’ 등 구체적인 정보를 수집하고 있고요. 이런 객관적인 정보 외에도 좀 더 자세하게 알려주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서술식으로 리뷰를 남기기도 합니다.
또 어떤 프로젝트를 하고 있나요.
아까 말씀드린 멤버십 프로그램인 ‘크러셔 클럽’을 한 축으로 두고 있어요. ‘뿌클로드’라고 해서 실제로 휠체어를 탄 에디터들의 후기를 정리해 발행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이 정보들이 잘 검색되게 하는 게 가장 큰 목표거든요. 계단뿌셔클럽 앱을 만드는 것까지가 저희가 하고 있는 일이에요. 이를 홍보하기 위해서 인스타그램 계정 운영과 뉴스레터 발행 등 여러 가지 활동도 부수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2024년 계단뿌셔클럽의 목표는 무엇이었나요.
3만5000여 곳의 정보를 모으는 일이었어요. 서울을 기준으로 7만7000곳의 정보를 모으면 웬만한 유동인구가 많은 곳의 정보는 다 모으는 셈이거든요. 현재는 90% 정도 달성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아직 앱에 지도가 없어요. 상호명과 그에 해당하는 접근성 정보만 있는데, 현재 지도를 만들어 베타 테스트 중이에요. 그 목표도 이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계단뿌셔클럽의 중장기적인 목표는 무엇일까요.
이동 약자와 그 친구들의 막힘없는 이동이죠. 이동이 수월하려면 정보탐색부터 쉽게 하는 게 최우선 과제예요. 중장기적으로는 전국의 주요 광역시, 여행지 등으로 카테고리를 나눠서 계단정복활동의 범위를 넓히고 싶습니다. 그리고 꿈은 커야 재밌잖아요. 2028년에 LA 올림픽이 있는데요. 패럴림픽이 열리는 것을 계기 삼아 글로벌로 진출하는 것이 저희의 큰 꿈입니다. 패럴림픽을 하면 이런 접근성 정보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계단뿌셔클럽 멤버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BBC 올해의 여성에 선정돼 제가 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지만, 사실 계단뿌셔클럽의 활동이 가능한 이유는 한마음 한뜻으로 참여해주시는 분들 덕분이에요. 저희의 활동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참여해주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그래서 저희 팀 전체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이런 말을 정말 못 하는데요. 이번 기회를 빌려 계단뿌셔클럽 멤버들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죠. 휠체어를 탄다는 이유로 못 하는 일이 생기면 화가 나요. 못 하는 게 없다는 걸 보여주려고 공부도 열심히 했어요. 산에도 올라가보고 싶어서 엄마 도움을 받기도 했고요. 그리고 저는 여행이나 친구들과 수다 떠는 것, 콘서트 가는 것도 정말 좋아해요. 그렇게 다양한 경험을 해보니까 세상에 좋은 게 많다는 걸 깨닫게 돼서 경험할 자유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욕심이 많으면 스스로 굉장히 피곤해요. 하지만 하고 싶은 게 많기 때문에 방법을 열심히 찾는 사람인 것 같아요.
언제부터 휠체어를 사용하셨나요.
다섯 살 때 사고가 난 이후로, 쭉 휠체어를 탔어요. 제 기억 속에 저는 항상 휠체어를 타고 있었죠. 휠체어를 타는 게 이상하거나 특별한 문제라고 느껴지진 않았어요. 누구는 키가 작고, 누구는 안경을 쓰는 것처럼요. 제가 휠체어를 타는 건 그냥 저에게 주어진 환경과 같다고 생각해요.
매사 긍정적이고 의지가 강한 것 같아요.
물론 모든 사람이 저 같지 않다는 걸 알아요. ‘나는 왜 이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힘들어할까’ 자책하는 분들도 있겠죠. 하지만 중요한 건 우리 사회의 ‘난이도’를 낮추는 거예요. 이동 약자들도 쉽게 허들을 넘을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죠.
현재 우리 사회의 난이도는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요.
외국에 가면 대중교통이나 쇼핑몰에서 휠체어를 타거나 유아차를 끄는 분들을 많이 볼 수 있어요. 인구 비례상 이동 약자 비율은 비슷할 텐데, 한국에선 훨씬 숫자가 적고요. 그건 환경의 문제죠. 국가와 사회는 이동 약자가 활동하기 쉽도록 장벽을 낮춰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어요. 사람들의 인식도 많이 달라져야 해요. 우리나라도 장애인들이 나와서 활동하는 것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이동 약자를 위해 대중교통이나 엘리베이터 이용 시 양보해주는 문화가 하루빨리 정착되면 좋겠어요.
수빈 대표님이 꿈꾸는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사람들이 서로에게 너그럽고 다정함이 많은 세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원래 한국인은 정도 많고 다정한데, 사는 게 너무 팍팍하다 보니까 이웃과 마주쳐도 웃지 않는 것 같아요. 다정함을 표현하는 게 부끄럽지 않은 사회가 되면 좋겠어요. 폭신폭신한 세상이 되고, 그 위에 좋은 사회적인 인프라가 깔려서 많은 사람이 막힘없이 세상을 누볐으면 좋겠습니다.
창업을 꿈꾸는 미래의 여성 후배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우선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이게 좋다더라’ ‘돈을 많이 벌려면 이걸 해야 한다’ 등의 얘기에 혹해서 쫓아가면 지속 가능하지 못해요. 재미도 없고요. 자기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는 진짜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건강 잘 챙기시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이 아프거나 피곤하면 까칠해지잖아요. 일을 잘하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친절하려면 건강이 중요하다는 걸 많이 느꼈습니다.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이 있다면요.
제 이야기를 보신 분들은 이동 약자의 삶에 한 번이라도 발을 담그신 거예요(웃음). 휠체어 사용자나 장애인을 만났을 때 더 편하게 받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또 엘리베이터나 대중교통에서 공간을 만들어주시거나 조금 기다려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누구라도 이동 약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동 약자를 만났을 때 배려하는 모습과 다정함을 나눠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성동아 #BBC #올해의여성100인 #계단뿌셔클럽 #박수빈
사진 윤태식
사진제공 박수빈
사진출처 BBC홈페이지 캡처
박수빈 대표가 계단뿌셔클럽을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다. 계단뿌셔클럽은 ‘계단정보’를 모으고 조회할 수 있는 모바일 앱 서비스를 제공한다. 2021년 직장 동료 이대호 씨와 함께 ‘접근성 정보 수집 프로젝트’를 결성한 게 시작이다. 그해 5월 웹 개발에 착수, 8월에 펀딩으로 운영 자금 400만 원을 모으고 10월에 ‘계단정복지도’ 웹 버전을 출시했다. 6개월 만에 웹 개발까지 마무리한 것으로 미루어 박 대표의 추진력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동 약자를 위한 접근성 정보를 모으겠다는 일념 아래 프로젝트를 만들고 목표를 달성해왔다.
BBC가 올해의 여성으로 ‘계단뿌셔클럽’의 박수빈 대표를 선정했다.
함께하는 거야, 이동 자유로운 세계
누구든 ‘계잔정복지도’에 ‘계단정보’를 입력할 수 있다.
기쁘다기보다는 당황스럽고 얼떨떨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당연히 안 된 줄 알았거든요. 이후 BBC로부터 메일로 질문이 와서 답변했는데, 그게 선정 과정 중 하나인 줄 알았어요. 다시 읽어보니 100인에 선정됐다는 거였어요. 메일을 잘못 이해했을 만큼 예상하지 못했죠.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축하받으면서 선정됐다는 사실을 실감했던 것 같습니다. 신기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해요.
BBC는 어떤 질문을 했나요.
‘혐오가 많은 요즘 세상에서 희망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주셨어요. 질문을 받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우리의 다정함과 우정이 결국에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근원인 것 같다’라는 대답을 보냈어요. 그전부터 계단뿌셔클럽 멤버들과 하고 있는 얘기였거든요. 다정함과 우정으로 친구가 되면 균열과 혐오가 어디 있겠어요? 친구는 금방 싸우고도 화해하고 다시 함께하는 사이니까요. ‘많은 사람이 서로 친구가 돼야 할 것 같다’는 답을 했습니다.
인간의 긍정성을 믿는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는 ‘개인기로 내가 살길만 잘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요.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 혼자만 잘 사는 것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누구나 나이 들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지는 순간이 오잖아요. 그리고 제 주변 지인들이 다정하고 좋은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창업하는 것도 가능했죠. 모두가 이렇게 행운아일 수는 없다는 생각에 함께 잘 살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하게 됐습니다. 또 계단뿌셔클럽을 운영하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함께 세상을 바꾸려고 왔구나’라는 생각에 역시 다정함이 희망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계단뿌셔클럽’의 ‘크러셔클럽’. 매년 봄과 가을에 멤버를 모집한다.
창업 전에 공유 모빌리티 회사를 다녔어요. 직장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고민 중 하나가 ‘오늘 점심 어디서 먹지?’잖아요. 저와 제 동료들은 식사 장소를 찾을 때 메뉴보다 ‘휠체어가 갈 수 있나’를 먼저 고민해야 했죠. 그런 고민에 지쳐서 ‘검색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세상에 왜 접근성에 대한 정보는 없을까’를 생각했어요. 저처럼 접근성 문제를 고민하는 이동 약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회사 동료와 함께 창업을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 지인의 지인을 소개받아 개발자 3명을 더 모았어요. 처음에는 직장을 다니면서 사이드 프로젝트로 3년간 진행했는데요. 작년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계단뿌셔클럽에 매진하고 있어요.
계단뿌셔클럽에서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PM(프로덕트 매니저) 겸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어요. PM은 앱이나 서비스를 기획하거나 운영하는 역할을 합니다. 어떤 고객들이 해당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지를 확인하고, 서비스를 다시 출시하는 일도 하고요. 쉽게 말하면 서비스 기획자, 운영자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또 어떤 분들이 계단뿌셔클럽에서 일하나요.
접근성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이 필요한데요. 저희는 ‘크러셔 클럽’이라는 시즌제 멤버십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요. 한 시즌은 봄과 가을에 각각 3개월씩 운영해요. 크러셔 클럽의 멤버가 되면 주말에 2시간씩 이동 약자를 위한 정보를 수집하는 계단정복활동을 합니다.
크러셔 클럽 멤버는 자원봉사자들인가요.
어떤 의미에서는 자원봉사자에 가까운데 저희는 자원봉사자라고 부르지 않아요. 그분들도 본인이 봉사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으세요. 오히려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마음으로 사이드 프로젝트에 참여한다고 생각하죠. 우리가 친구 문제를 함께 해결할 때 봉사한다는 표현을 쓰진 않잖아요. ‘크루’도 그런 맥락에서 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사람이 모일 거라는 확신은 어떻게 생겼나요.
사이드 프로젝트로 시작한 팀이라서 처음에는 인력을 고용할 돈이 없었어요. 그렇다고 ‘봉사활동’으로 사람을 모집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잘 맞지 않을 것 같았죠. 창립 멤버 중 한 명이 “동네를 산책하면서 정보를 모으는 활동을 함께하자고 해보면 어떨까요?”라고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그때 걷기가 한창 유행이던 시절이었거든요. ‘우리 동네를 산책하면서 보람도 느껴보자’라는 취지로 시작했어요. 그런데 한두 분씩, 정말로 동네가 궁금하다면서 활동에 오시는 거예요. 초기에 오신 분들이 이 활동의 의미를 홍보해주시면서 사람이 모였어요. 그렇게 입소문을 타면서 커뮤니티가 점차 커지게 됐습니다.
참여하시는 분들과 어떤 이야기를 주로 나누나요.
계단정복활동 소감을 주로 들어요. “동네에 이렇게 계단이 많은지 몰랐다” “자주 가던 집인데 입구에 턱이 있는지 몰랐다” 이런 얘기를 하시는 걸 보고 우리가 의도한 것 이상의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보만 모으는 게 아니라 이동 약자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걸 많은 이가 알게 됐다는 데 보람을 느껴요. 인식을 환기해주는 효과가 추가로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활동에 참여할 수 있나요.
지금은 너무 추워서 따로 모집을 하지 않고 있어요. 비시즌이죠. 주로 봄가을에 크루와 게스트를 모집해요. 함께 정보를 수집하는 계단정복활동을 하는 방법이 있고요. 두 번째 참여 방법은 후원이에요. 계단뿌셔클럽은 비영리단체라 후원을 통해 유지되거든요. 이동 약자 문제 해결에 관심이 있다면 후원해주시면 됩니다. 저희는 그 후원금으로 문제 해결을 위한 의미 있는 활동을 해나가고 있어요. 인스타그램을 통해 활동 모습, 후원 정보 등을 알리고 있어요.
크루가 되면 주로 어떤 정보를 수집하나요.
구체적인 접근성 정보를 수집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접근성이 좋은 곳이 누군가에게는 나쁠 수도 있거든요. 왜냐하면 이동 약자의 모습은 다양하잖아요. 예를 들어 저는 지금 수동 휠체어를 타고 있지만 전동 휠체어를 타는 분들도 있고, 지팡이를 짚고 걷는 분도 계시잖아요. 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보는 다 다릅니다. 단순히 접근성이 좋다, 나쁘다고 평가하는 것을 넘어서 ‘입구에 계단이 한 칸이 있어요’ ‘엘리베이터가 있어요’ ‘경사로가 있어요’ 등 구체적인 정보를 수집하고 있고요. 이런 객관적인 정보 외에도 좀 더 자세하게 알려주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서술식으로 리뷰를 남기기도 합니다.
또 어떤 프로젝트를 하고 있나요.
아까 말씀드린 멤버십 프로그램인 ‘크러셔 클럽’을 한 축으로 두고 있어요. ‘뿌클로드’라고 해서 실제로 휠체어를 탄 에디터들의 후기를 정리해 발행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이 정보들이 잘 검색되게 하는 게 가장 큰 목표거든요. 계단뿌셔클럽 앱을 만드는 것까지가 저희가 하고 있는 일이에요. 이를 홍보하기 위해서 인스타그램 계정 운영과 뉴스레터 발행 등 여러 가지 활동도 부수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2024년 계단뿌셔클럽의 목표는 무엇이었나요.
3만5000여 곳의 정보를 모으는 일이었어요. 서울을 기준으로 7만7000곳의 정보를 모으면 웬만한 유동인구가 많은 곳의 정보는 다 모으는 셈이거든요. 현재는 90% 정도 달성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아직 앱에 지도가 없어요. 상호명과 그에 해당하는 접근성 정보만 있는데, 현재 지도를 만들어 베타 테스트 중이에요. 그 목표도 이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계단뿌셔클럽의 중장기적인 목표는 무엇일까요.
이동 약자와 그 친구들의 막힘없는 이동이죠. 이동이 수월하려면 정보탐색부터 쉽게 하는 게 최우선 과제예요. 중장기적으로는 전국의 주요 광역시, 여행지 등으로 카테고리를 나눠서 계단정복활동의 범위를 넓히고 싶습니다. 그리고 꿈은 커야 재밌잖아요. 2028년에 LA 올림픽이 있는데요. 패럴림픽이 열리는 것을 계기 삼아 글로벌로 진출하는 것이 저희의 큰 꿈입니다. 패럴림픽을 하면 이런 접근성 정보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계단뿌셔클럽 멤버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BBC 올해의 여성에 선정돼 제가 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지만, 사실 계단뿌셔클럽의 활동이 가능한 이유는 한마음 한뜻으로 참여해주시는 분들 덕분이에요. 저희의 활동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참여해주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그래서 저희 팀 전체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이런 말을 정말 못 하는데요. 이번 기회를 빌려 계단뿌셔클럽 멤버들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욕심 많고 놀기 좋아하는 여자, 박수빈
박수빈은 어떤 사람인가요.욕심이 많은 사람이죠. 휠체어를 탄다는 이유로 못 하는 일이 생기면 화가 나요. 못 하는 게 없다는 걸 보여주려고 공부도 열심히 했어요. 산에도 올라가보고 싶어서 엄마 도움을 받기도 했고요. 그리고 저는 여행이나 친구들과 수다 떠는 것, 콘서트 가는 것도 정말 좋아해요. 그렇게 다양한 경험을 해보니까 세상에 좋은 게 많다는 걸 깨닫게 돼서 경험할 자유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욕심이 많으면 스스로 굉장히 피곤해요. 하지만 하고 싶은 게 많기 때문에 방법을 열심히 찾는 사람인 것 같아요.
언제부터 휠체어를 사용하셨나요.
다섯 살 때 사고가 난 이후로, 쭉 휠체어를 탔어요. 제 기억 속에 저는 항상 휠체어를 타고 있었죠. 휠체어를 타는 게 이상하거나 특별한 문제라고 느껴지진 않았어요. 누구는 키가 작고, 누구는 안경을 쓰는 것처럼요. 제가 휠체어를 타는 건 그냥 저에게 주어진 환경과 같다고 생각해요.
매사 긍정적이고 의지가 강한 것 같아요.
물론 모든 사람이 저 같지 않다는 걸 알아요. ‘나는 왜 이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힘들어할까’ 자책하는 분들도 있겠죠. 하지만 중요한 건 우리 사회의 ‘난이도’를 낮추는 거예요. 이동 약자들도 쉽게 허들을 넘을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죠.
현재 우리 사회의 난이도는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요.
외국에 가면 대중교통이나 쇼핑몰에서 휠체어를 타거나 유아차를 끄는 분들을 많이 볼 수 있어요. 인구 비례상 이동 약자 비율은 비슷할 텐데, 한국에선 훨씬 숫자가 적고요. 그건 환경의 문제죠. 국가와 사회는 이동 약자가 활동하기 쉽도록 장벽을 낮춰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어요. 사람들의 인식도 많이 달라져야 해요. 우리나라도 장애인들이 나와서 활동하는 것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이동 약자를 위해 대중교통이나 엘리베이터 이용 시 양보해주는 문화가 하루빨리 정착되면 좋겠어요.
수빈 대표님이 꿈꾸는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사람들이 서로에게 너그럽고 다정함이 많은 세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원래 한국인은 정도 많고 다정한데, 사는 게 너무 팍팍하다 보니까 이웃과 마주쳐도 웃지 않는 것 같아요. 다정함을 표현하는 게 부끄럽지 않은 사회가 되면 좋겠어요. 폭신폭신한 세상이 되고, 그 위에 좋은 사회적인 인프라가 깔려서 많은 사람이 막힘없이 세상을 누볐으면 좋겠습니다.
창업을 꿈꾸는 미래의 여성 후배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우선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이게 좋다더라’ ‘돈을 많이 벌려면 이걸 해야 한다’ 등의 얘기에 혹해서 쫓아가면 지속 가능하지 못해요. 재미도 없고요. 자기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는 진짜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건강 잘 챙기시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이 아프거나 피곤하면 까칠해지잖아요. 일을 잘하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친절하려면 건강이 중요하다는 걸 많이 느꼈습니다.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이 있다면요.
제 이야기를 보신 분들은 이동 약자의 삶에 한 번이라도 발을 담그신 거예요(웃음). 휠체어 사용자나 장애인을 만났을 때 더 편하게 받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또 엘리베이터나 대중교통에서 공간을 만들어주시거나 조금 기다려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누구라도 이동 약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동 약자를 만났을 때 배려하는 모습과 다정함을 나눠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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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윤태식
사진제공 박수빈
사진출처 BBC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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