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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모님 결혼식에 초대할게” 프랑스 비혼 출산의 A to Z

김지은 박사

2025. 01. 03

지난 10년간의 프랑스 유학 생활은 사회문화적 틀을 깨는 과정이었다. ‘가족’이란 단어 앞에 당연히 붙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결혼’도 이곳에서는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다. 이들이 결혼 없이 누구보다 가족 지향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데는 가정의 형태와 무관하게 사회로부터 적극적인 출산·육아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달 전, 친한 가족이 셋째를 낳았다. 첫째들끼리, 또 둘째들끼리 같은 학년이고 집도 가까워 공동육아나 다름없이 아이들을 함께 키워왔다. 친구네는 아들만 둘이라 셋째는 딸이길 간절히 원했는데, 그 바람이 이루어졌다. 나는 나름의 큰 결단을 내렸다. 첫째가 돌 때쯤 사놓고도 한 번을 제대로 못 입힌, 자수가 예쁘게 놓인 고가의 하얀 드레스를 선물하기로 한 것. 드레스를 받은 친구 부부는 정말 예쁘다고 탄성을 지르며 “막내에게 이 드레스를 입히려면 올해 안에 결혼식이라도 해야겠네!”라고 말했다. 친구 부부는 깔깔 웃는데 나만 어리둥절해서 “너네 아직 결혼 안 했어?”라고 물었다.‌
“응! 애가 셋인데도 P(엄마)는 아직 결혼 생각이 없대.”‌
그러자 P는 “이 드레스 보니 마음이 바뀌려고 해!”라며 웃어 보였다.

가족정책의 고려 대상은 부부 아닌 ‘아이’

통계에 따르면 프랑스의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1.68명이다. 유럽 최고 수준인 데다가 한국의 2배를 웃돈다. 이 중 비혼 출산 비율이 전체의 65% 이상을 차지했다. 아기 100명 중 65명이 결혼하지 않은 부부에게서 태어나는 것이다. 이 또한 유럽 최고 수준이다. 비혼 부모가 프랑스의 높은 출산율을 견인하고 있는 셈이다. 한 개인이 출산을 결정하고 한 생명이 태어나기까지의 과정은 다양하겠지만, 프랑스의 ‘가족의 탄생’에는 분명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비교를 위해 한국의 상황을 먼저 보자. 한국에서는 일단 자녀 계획까지의 과정이 험난하다. 대부분 ‘출산 전 결혼’이 불문율이기 때문에 아이를 낳기 전 결혼 준비를 먼저 해야 한다. 결혼 역시 개인과 개인이 아닌 집안과 집안의 결합으로 여겨지는 만큼 ‘마음’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익히 다들 알고 있을 무수한 과정을 거쳐 결혼에 성공하고 드디어 아이를 낳아볼까 결심을 한다. 하지만 이 역시 마음만으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현실적으로 육아·교육비의 경제적 부담, 가족 내 역할 분담에서 오는 정서적 부담, 이제껏 쌓아온 커리어에 대한 미련 등이 발목을 잡는다. 출산하기 전부터 감당해야 할 일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제 프랑스의 사례를 살펴보자. 물론 한국에만 명절 잔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에서도 남녀가 만나 관계가 사뭇 진지하고 길어지면 주변인들, 특히 부모님이 슬슬 물어보기 시작한다. “너희 애들은 언제 낳을 거야?” 아무도 결혼에는 관심이 없다. 커플도 마음이 동한다. 남들처럼 둘이나 셋을 낳으려면 지금쯤은 시작해야 하겠는데 싶다. 그리고 아이를 낳는다. 자녀가 생기는 순간, 부모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제도적인 지원과 보호의 대상이 되는 ‘가족’이 탄생한다. 프랑스의 가족정책은 부모에게는 관심이 없다. 결혼 유무는 물론이고 동성 부부인지, 한부모가정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이다. 부모의 상황과 무관하게 출산·육아 지원 정책의 혜택이 같은 이유다. 오히려 한부모가정은 총가계수입이 양 부모 가정보다 낮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지원금 종류나 금액은 더 많아진다.

이렇듯 프랑스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데 ‘결혼’은 거의 존재감이 없다. 이처럼 결혼과 출산이 분리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제도가 있으니, 바로 팍스(PACS : Pacte Civil de Solidarit)다. 1999년 도입된 팍스는 쉽게 말해 ‘시민연대협약’이자 ‘두 성인 간의 법적 파트너십’이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성별에 상관없이 성인 두 사람이 공동의 삶을 꾸려갈 수 있도록 만든 제도다. 프랑스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팍스를 맺은 커플은 20만9827쌍으로 제도 도입 후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같은 해 전통적인 결혼을 한 부부는 24만1710쌍으로 팍스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당초 민법상 동성 커플의 존재를 인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인 팍스는 오히려 이성 커플 간 결속 제도로 각광받는 중이다. 결혼과 거의 동등한 법적 보호를 받지만 계약을 체결하고 해지함에 있어 결혼보다 법적, 행정적 절차가 훨씬 간단하다. 비용도 저렴하다. 주변을 보면 팍스를 맺게 되는 결정적 이유는 크게 2가지, 집과 임신이다. 두 사람이 함께 살 집을 렌트하거나 구매할 때, 팍스 상태이면 훨씬 유리하다. 또 아이가 생기면 의료보험, 세금, 자녀 양육 지원 등의 혜택을 받기 위해 팍스를 선택한다. 결혼을 한 후 이혼하면 프랑스의 악명 높은 길고도 답답한 행정절차를 밟아야 하고 이 과정에서 금전적 부담도 무시할 수 없어서다. 동거와 결혼의 중간 단계로 인식되는 팍스를 택함으로써 제도적 지원도 받고, 가정의 결속도 가져가려는 이유다.

부모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게 예삿일

프랑스인 로즈는 한 방송에서 프랑스의 신개념 프로포즈 방법을 설명했다.

프랑스인 로즈는 한 방송에서 프랑스의 신개념 프로포즈 방법을 설명했다.

프랑스인들의 비전통적 가족문화를 보고 그들이 가족을 경시한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다. 프랑스의 유명 가족사회학자인 프랑수아 드 싱리는 “프랑스 사회에서 가족은 여전히 중요하고 결혼도 성행하고 있다”며 “그 형태와 문맥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내가 경험한 프랑스인들은 제각각인 가족 상황과는 별개로 대부분 매우 가족 중심적인 가치관과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 결혼을 했든, 팍스든, 한부모가정이든 가족의 형태와 무관하게 내 주변에서 함께 10세 이전의 취학 아동을 키우는 부모들의 일상은 비슷하다. 평일에는 출근 전 오전 8시 반까지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퇴근 후 오후 6시까지 데리러 간다. 저녁 7시쯤 아이와 함께 식사를 하고 얼른 아이들 학교 숙제를 봐준다. 아이들이 밤 8~9시 사이에 잠자리에 들면 짧지만 달콤한 육퇴 후 시간을 즐긴다. 토요일 오전에는 아이들이 원하는 예체능 활동 셔틀을 하고, 오후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에 가거나 종종 친구 생일 파티에 데려다준다. 일요일 점심 식사는 ‘앙 파미(en famille)’, 즉 가족들과 모임을 갖는 때가 많다. 일요일 아침, 길에서 바게트를 10개씩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어느 대가족의 느긋하고도 북적거리는 점심 식사를 상상해볼 수 있다.

마침 오늘 내 직장 동료 하나가 부모님 결혼식 날이라 출근을 하지 않았다. 본인을 낳은 지 40년 만에 결혼을 하시기로 했단다. 오래된 팍스 혹은 동거 커플이 결혼을 선택하는 이유는 매우 개인적이고 다양하다. 주변의 사례를 중심으로 풀어보자면, 우선 원래부터 팍스를 결혼 전 단계로 생각한 경우가 있다. 마치 ‘가계약’처럼 일단 팍스를 맺고 돈 모아서 몇 년 후에 결혼식을 하기로 하는 것. 프랑스는 20~30대의 수입이 높지 않은 데다가 파리와 같은 대도시는 생활비도 만만치 않다. 결혼식을 원해도 경제적인 이유로 미루는 경우가 많은 까닭이다. 이에 생활이 안정된 후 가족 이벤트 형식으로 낮에는 시청에 가서 결혼 서약을 하고, 저녁에는 가족끼리 파티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해외로의 이주도 팍스에서 결혼으로 전환하는 배경 중 하나다. 팍스를 법적 관계로 보지 않는 나라가 있기 때문에 해외에서 비자, 세금 등의 행정절차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서다. 특히 은퇴 후 동남아 등지에서 살고자 하는 노부부 가운데 이런 경우가 많다. 이 외에도 팍스 커플은 배우자 사망 시 상속권이나 연금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절차가 복잡해서 이를 대비해 결혼으로 전환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한때 “ㅇㅇㅇ는 부모님 결혼식 참석도 안 했다며? 너무 한 거 아니냐”는 프로불참러 유머가 유행했다. 프랑스에는 부모님 결혼식에 가본 사람들이 흔해서, 유머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 될 수도 있다. 또 다른 동료는 요즘 동성 팍스 파트너와 출산을 계획 중이다. 새 생명을 고대하는 설렘과 함께 부인과 검사, 정자 기증자 물색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다양한 가족 형태를 존중하는 문화와 제도적 지원이 함께하는 프랑스의 사례가 한국에 참고가 됐으면 한다.

김지은, 영국 UCL 교육학 박사 짧고 굵게 즐길 생각이었던 프랑스 파리 생활이 어느덧 10년 차. 그간 두 아이를 모두 파리에서 낳아 키우고 있다. 현재 파리 한 국제학교에 교사로 근무하고 있으며, 브런치에서 ‘지은필’이라는 필명으로 프랑스의 육아 및 교육을 중심으로 한 글들을 연재하고 있다.

#프랑스출산율 #비혼출산 #여성동아

‌‌사진 게티이미지
‌사진출처 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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