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항암제 렉라자 미 FDA 승인 주역 조병철 연세암병원 폐암센터장
폐암은 암세포 크기에 따라 작으면 소세포폐암, 작지 않으면 비소세포폐암으로 나뉜다. 비소세포폐암이 전체 환자의 80% 정도를 차지하며, 이 가운데 40%가량이 암세포에 상피성장인자수용체(EGFR) 돌연변이가 있다. EGFR은 세포 증식과 관련해 신호를 전달하는 단백질로, 변이가 생기면 암세포가 빠르게 증식하고 항암제를 써도 잘 죽지 않는다. EGFR 변이는 대부분 서양인보다 아시아인에게서 발생 비율이 높고, 아시아인 기준으로 양성 비율이 40~55%에 달한다.
현재 EGFR 돌연변이 비소세포폐암 치료의 경우 아스트라제네카가 개발한 3세대 표적항암제 ‘타그리소’가 1차 표준 치료제다. 그런데 2015년 FDA 허가를 받은 이후 약 8년간 시장을 독점해온 타그리소의 대항마가 등장했다. 바로 유한양행에서 만든 국산 항암제 ‘렉라자’다. 먹는 치료제인 렉라자는 얀센의 표적항암제 ‘리브리반트’ 정맥 주사제와의 병용요법으로 지난 8월 20일 FDA에서 1차 치료제로 승인받았다. 병용요법의 승인 근거가 되는 MARIPOSA(마리포사) 임상시험에서 타그리소 단독요법과 비교해 질병 진행 및 사망 위험을 30% 감소시킨다는 결과를 얻었다.
렉라자는 국산 신약 최초로 블록버스터(연 매출 1조 원 규모 의약품) 신약이 될 것이란 전망이다. 숱한 글로벌 제약사들도 8년 동안 못 해낸 일을 유한양행이 해내기까지 조병철 세브란스병원 종양내과 교수의 공이 컸다. 병용요법 개발을 주도한 조병철 교수는 렉라자와 리브리반트 각각의 전임상과 국제 임상시험도 담당했다. 신촌 세브란스병원 에비슨의생명연구센터에서 만난 조 교수는 “2016년 렉라자와 리브리반트 연구 제의가 비슷한 시기에 각각 들어온 것부터가 기적이다. 심지어 렉라자는 사정상 거절했던 연구를 운명처럼 또 만났다”면서 “이 얘기를 다 하려면 밤새워야 한다”며 벅찬 표정을 지었다.
무생물인 약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을 사명으로
렉라자는 유한양행이 2015년 바이오회사 오스코텍의 미국 자회사 제노스코로부터 전임상 물질을 도입해 개발한 약으로, 2018년 얀센에 기술을 수출했다. 2021년 1월 EGFR T790M 돌연변이 양성 2차 치료제로 국내 승인을 받았고, 2023년 6월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국내 1차 치료제로 확대 허가를 받았다. 특히 유한양행은 1차 치료제 허가 이후 바로 조기 공급 프로그램(EAP)을 실시해 보험 급여 전인 지난해 7월부터 12월까지 6개월 동안 900여 명의 환자에게 렉라자를 무상 공급했다. 국내 고가 신약 중 보험 급여 등재 때까지 무상 지원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무상 공급을 통해 환자들은 한 달에 700만 원에 달하는 약값을 아끼고, 유한양행은 약값을 부담하는 대신 방대한 임상 데이터를 얻었다.
타그리소의 경우 국내에서는 2018년 12월 허가받아 사용돼왔으나, 약가 등의 문제로 2차 치료 급여에만 적용돼오다가 렉라자와 동시에 올 1월 1일부터 1차 치료제로 보험 급여 적용을 받게 됐다. 급여 확대 이후 현재 타그리소는 40㎎ 1정당 10만1759원, 80㎎ 1정당 19만123원이고 렉라자는 80mg 1정당 가격이 6만3370원이다. 렉라자를 권장 용량대로 1일 1회 3알 복용할 경우 4주간 복용 시 532만3080원이지만, 환자는 약가의 5%(약 26만 원)만 부담하면 된다.
모든 과정을 지켜본 조병철 교수는 “한 약품이 독점을 형성하면 약가를 안 깎는다. 그동안 타그리소를 1차 치료제로 비급여 처방받는 환자들은 한 달에 800만~1000만 원을 써왔다”며 “렉라자가 무상 공급 등 치료 접근성에 힘쓰면서 타그리소도 렉라자와 같은 시기에 급여 확대된 것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타그리소와 비교해 렉라자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타그리소와 비교한 데이터를 올 9월 세계폐암학회에서 발표했는데, 타그리소에 비해 뇌 전이나 간 전이가 있는 환자, 엑손21(L858R) 치환 변이 환자 등 고위험군에 더 효과적이에요. 심장 부작용도 덜하고요. 병용요법으로 하면 타그리소 단독 사용보다 무진행 생존 기간(질병 진행 없이 내성이 나타나기 전까지의 생존 기간)도 7개월 정도 더 증가시킵니다.
미국 FDA 승인을 받은 국산 약이 많은데, 렉라자가 주목받는 이유가 있나요.
그간의 신약은 약효가 좋더라도 수십 가지 기존 약 중 하나였어요. 폐암은 1년에 전 세계적으로 250만~300만 명의 새 환자가 생깁니다. 이 중 40만 명이 치료제로 오로지 타그리소밖에 없던 상황에서 선택지가 하나 더 생긴 거예요. 실질적으로 많은 환자에게 쓰일 수 있다는 면에서 굉장히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이 연구를 하면서 제가 하는 일이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란 걸 또 한 번 배웠어요.
특히 렉라자 단독요법이 아닌 리브리반트와의 병용요법으로 FDA 승인을 받은 것은 일종의 전략이었나요.
항암제는 기존 약제보다 좋아야지만 승인을 받을 수 있어요. 동등해서는 승인이 안 납니다. 게다가 8년 동안 독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약제가 있는 상황에서 환자들이 원하는 건 기존보다 초격차로 좋은 약이잖아요. 환자들의 바람은 결국 오래 사는 것이에요. 병용 전략을 택한 이유는 무진행 생존 기간을 증가시켰고, 전체 생존율 데이터도 긍정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병용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은 건가요.
우연한 계기였어요. 엑손20 삽입 변이를 가진 50대 여성 환자가 있었는데, 당시 해당 변이에 대한 약이 없었어요. 그 환자 아들이 어떻게든 살려달라고 한 게 자꾸 떠올라, 그 환자를 전 세계 최초로 엑손20 삽입 변이에 리브리반트를 투여하는 임상 등록을 했어요. 그때 놀랍게도 투여 후 일주일 만에 암 덩어리가 없어졌어요. 그 엑스레이를 얀센 글로벌 팀에 보냈고, 이후 81명의 피보탈 코호트(pivotal cohort)를 토대로 FDA 신속 승인을 받았어요. 그러면서 얀센이 3세대 EGFR을 찾아보기 시작했는데, 마침 저에게 개발 중인 렉라자가 있었던 거죠.
결국 렉라자와 리브리반트 임상시험을 둘 다 주도했던 게 신의 한 수였네요.
렉라자와 리브리반트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져요. 리브리반트의 경우 미국 약인데, 당시 얀센이 어디에 써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의뢰하니까 미국 연구자들이 거부했고 결국 한국의 저에게까지 기회가 왔어요. 종양학 역사상 각각의 전임상부터 임상 1상, 임상 3상, 병용 1상, 병용 3상까지 다 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러니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요(웃음).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적은 없었나요.
몇 번 있었죠. 가장 기억나는 날은 임상 1상을 끝내고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세계폐암학회에서 발표하던 때예요. 글로벌 제약사와 함께하는 게 아니니까 작은 공간에서 5분간 발표하는 미니 오럴 세션을 주는 거예요. 추석 연휴도 반납하고 갔는데 무시당하니 화가 나더라고요. 심지어 그날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까지 놓쳤어요. 공항에서 하룻밤을 꼴딱 새웠는데, 생각할수록 분했어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제가 “이거 안 된다” “너무 늦었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들은 건 한국에서예요. 현대자동차에서 처음 포니를 내놓을 때, 삼성전자에서 스마트폰을 만들 때도 다 안 된다고 했지만 지금은 전 세계 사람들이 현대차를 타고 갤럭시를 쓰잖아요. 저는 렉라자가 국산 항암제의 글로벌 시장 진출 스타트를 끊었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힘들게 만든 좋은 약을 비싸서 환자들이 못 쓴다면 안타까웠을 텐데 유한양행이 초기에 무상공급이란 큰 결단을 내려줬네요.
일단 저는 지금 유한양행을 홍보하는 게 아닙니다(웃음). 저도 이 약제가 유한양행에 간 게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렉라자를 처음 만난 건 2013년이에요. 당시 한 작은 바이오회사에서 어떤 약물을 소개하며 공동연구를 제안했는데, 제가 3명 정도 연구원을 둔 조교수였을 때라 진행할 여건이 되지 않았었죠. 그러다 싱가포르 연수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유한양행에서 다시 제안이 왔어요. 2년 전의 그 약물이 유한양행으로 라이선스 인이 됐더라고요. 그 후로 노바티스, 베링거인겔하임 등 글로벌 바이오테크 제약사들이 비슷한 연구개발을 중단하는 상황에서도 한국의 작은 제약사가 코로나19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란 허들까지 넘었잖아요. 특히 조기 공급 프로그램은 창업자인 유일한 박사의 ‘제약보국(製藥報國)’ 일념을 보여준 것이라 생각해요.
조병철 교수는 병용요법을 기적과 행운에 비유했지만, 기적은 그냥 찾아오지 않는다.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 조 교수는 2013년 싱가포르 연수 당시 2년 동안 2주마다 한국을 오가며 사비를 털어 연구실을 키웠다. 그는 “당시에는 열정이 넘쳤다. 연수지를 미국이 아닌 싱가포르로 정한 이유도 비행기 요금과 비행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렉라자와 리브리반트 프로젝트를 맡았을 즈음에는 연구원이 10명에서 100명으로 그야말로 빅뱅이 일어났다”면서 “현재 단일 연구팀으로만 100명이 넘는 곳은 전 세계에서 여기가 유일할 것이다. 100명이 넘는 연구단이 있으니까 이 모든 일을 하게 된 거지 그렇지 않으면 한국 신약을 누가 도와주겠느냐”며 회상에 젖었다.
40대 환자의 노모가 써준 편지, 신약 개발 의지 불태워
조병철 교수가 10년 째 챙겨먹고 있다며 직접 사진 찍어 보내준 아침식단.
교수님을 찾는 사람이 정말 많네요.
임상 연구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실수가 있어서는 안 돼요. 그만큼 추가로 할 일이 많고 혼자서는 절대로 못 합니다. 전문적인 능력을 지닌 팀원들과 같이 움직여야 해요. 굉장히 많은 서류 작업을 해야 하고요. 예전에는 3~4일씩 집에 안 들어가고 연구실에서 살았는데, 제가 올해로 쉰세 살이에요. 요즘은 집에 매일 들어갑니다.
아무리 꼼꼼하게 해야 하는 연구라지만, 일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원래 노는 거, ‘풍류자적’을 좋아해요. 다만 제 일이라고 생각하면 직진하는 스타일이에요. 또 그 일을 하는 목적 자체도 명예로워야 하고요. 렉라자와 리브리반트 개발이 딱 그랬어요. 환자를 살리는 약을 만드는 데 열정을 안 바칠 수 없죠. 또 제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해야 무생물인 약에 생명력이 생겨 사람을 살리는지 이제야 체득했어요. 더 열심히 해야죠.
암 중에서도 사망률이 높은 폐암을 택한 이유가 있나요.
EGFR 돌연변이 폐암이 어떤 환자들에게 생기냐면, 40대에서 60대 주부에게 많이 생겨요. 그분들이 가장 많이 하는 얘기는 아이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대학 졸업할 때까지 살아 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런 말을 들으면 혼자 있을 때 그 말들이 귀에 윙윙 맴돌아요. 물론 저는 모든 환자를 사랑합니다만, 부모와 자식이 서로 걱정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더 안 좋죠.
2008년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환자를 진료해오면서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나요.
11년 전 40대 여성 폐암 환자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편지를 지금도 간직하고 있어요. 환자는 2013년에 돌아가셨는데 아직도 그 환자의 어머니가 기억나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환자가 조금만 더 버텨줬다면 신약을 써볼 수 있었을 텐데, 당시에는 써볼 약이 없었어요. 그래서 신약 개발 제안이 왔을 때 꼭 성공시켜야겠다고 결심했던 것 같아요.
그런 여성 환자 중에는 흡연자보단 비흡연자가 더 많을 텐데요. 최근 10년 사이 비흡연 폐암 환자가 많이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수십 년 동안 많은 연구를 했지만 왜 비흡연자한테 EGFR 돌연변이 폐암이 많이 발생하는지 답을 못 찾아냈어요. 흡연은커녕 술도 한 모금 안 마시고 진짜 바른 생활만 하는 분들한테도 생겨요. 간접흡연도 하나의 원인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명확하게 설명이 안 돼요.
현재 진행하고 있는 연구 가운데 ‘제2의 렉라자’를 기대해봐도 될까요.
국내 회사에서는 유한양행에서 개발하는 HER2 유전자 돌연변이를 타깃으로 하는 표적치료제와 CJ바이오사이언스의 마이크로바이옴 활용 면역 항암제, 지아이이노베이션의 다중항체를 이용한 면역 항암제 등을 개발하고 있어요. 해외 회사에서는 누발란트의 ROS1 억제제와 ALK 억제제를 개발 중이고요. 저는 FDA 승인을 받은 글로벌 혁신 항암제를 10개 이상 제 손으로 직접 만드는 게 꿈이에요. 현재 리브리반트, 렉라자와 리브리반트 병용, 미국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의 ROS1 돌연변이 표적 항암 신약 레포트렉티닙까지 FDA 승인을 받은 게 3개이고, 렉라자 단독 승인도 기대하고 있어요. 반드시 할 거예요.
의지가 대단하십니다. 평소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10년째 아내가 챙겨주는 아침 식단이 있어요. 우유에 섞은 오트밀과 그래놀라, 견과류, 케일·당근·토마토주스, 데친 브로콜리, 삶은 달걀, 낫토, 흑초물, 믹스베리를 갈아 넣은 무가당 요구르트, 아메리카노 2잔을 아침마다 먹어요. 점심은 가급적 소식하고, 운동은 일주일에 3〜4회 땀 날 정도로 해요. 그런데 지금 얘기한 건 제 루틴일 뿐, 암 환자분들은 식사를 잘 챙기셔야 합니다. 또 사실 나이는 저한테 중요하지 않아요. 왜냐면 신약 개발은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 잘하거든요. 무엇보다 제가 FDA 승인을 10개 이상 받겠다는 마음을 굳건히 가지면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때까지 건강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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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지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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