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이 2번 바뀌고도 남을 시간 동안 제자리, 그것도 정상을 지켜온 사람은 굉장히 무던하거나 몹시 철저하거나 둘 중 하나다. 올해 국내 데뷔 25주년, 세계 데뷔 20주년을 맞은 팝페라 가수 임형주(37)는 철저히 대중이 아는 그 ‘임형주’로 살아왔다. 임형주는 12세인 1998년 ‘Whispers of Hope’로 국내에 데뷔했고, 5년 뒤인 2003년 ‘Salley Garden’으로 국제 무대에 첫발을 내디뎠다. 황무지나 다름없던 한국 팝페라를 개척해나가고 세계적인 팝페라 테너로 자리 잡기까지 목 관리를 위해 술, 담배, 커피를 일절 입에 대지 않는 것은 물론 쉬지 않고 세계 곳곳의 무대에 섰다. 한창 바쁠 때는 1년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보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코로나19로 임형주는 cpbc FM 라디오 프로그램 ‘임형주의 너에게 주는 노래’ DJ를 하며 국내 활동에 집중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 오후 7~9시 주 5일 생방송은 예전이라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엔데믹을 맞아 해외 스케줄이 늘고 건강상의 이유로 2년 6개월간 지켜온 라디오 DJ 자리에서 물러난 임형주는 다시 조금씩 세계 활동을 재개 중이다. 올 9월에는 몽골에서 열린 프란치스코 교황 집전 미사에 초청받아 식후 폐막 행사 엔딩 무대를 장식했고, 내년에는 일본 데뷔 20주년을 맞아 일본에서 베스트 앨범을 낸다.

프리 프로덕션 미팅차 일본을 다녀온 임형주를 11월 11일 이른바 ‘빼빼로데이’에 서울의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한 가족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임형주는 호구조사를 시작으로 오히려 질문을 쏟아냈다. 2009년 그와 처음 인터뷰했을 때는 보지 못한 모습이다. 2008년 데뷔 10주년을 맞아 설립한 아트원 문화재단과 교육사업에 대한 포부를 밝히던 야무진 20대 청년은 30대가 되어도 틀린 말을 바로 수정하는 철저함과 동안 얼굴은 여전했지만, 어딘가 달랐다.

결혼하는 게 진짜 독립이라고 생각

일본은 잘 다녀왔나요.

내년이 일본과 홍콩, 대만 데뷔 20주년이에요. 코로나19 이전 일본에 자주 다닐 때는 한 달에 세 번 간 적도 있었는데 오랜만에 다녀왔어요. 일 마치고 유후인에 들러 온천도 즐기고 좋았어요.



2009년에는 저한테 “공연하랴, 음반 녹음하랴, 공부하랴, 학생들 가르치랴 정말 바빠요. 놀지도 못하고, 연애도 못하고 그렇게 지냅니다”라고 했어요.

진짜요? 저는 그때도 그렇게 살았군요. 하하. 그때보단 삶을 보는 게 관조적으로 바뀌었어요. 20대에는 지금보다 훨씬 긴장하며 살았거든요. 그러니까 지금보다 훨씬 더 말랐겠죠. 확실히 나이는 거저먹는 게 아니에요. 예전에는 일이 잘 안 되면 ‘Why me?’ ‘왜 나한테만?’이라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It doesn’t matter’ ‘상관없어 괜찮아’ 하고 말아요. 노래를 부를 때도 예전보다 힘을 빼는 경우가 많아졌고, 소리를 더 예쁘게 내려고 집착하지도 않아요.

좋은 변화네요. TMI입니다만 14년 전 임형주 씨를 만나고 온 날 임형주 씨와 동갑인 제 남동생과 비교가 돼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너무 빨리 달리면 그만큼 번아웃도 일찍 오잖아요.

욕심은 지금도 있어요. 다만 코로나19가 제 인생에 쉼표를 찍어줬어요. 그렇지 않았으면 번아웃이 왔을 거예요. 해외를 오가느라 제 버킷 리스트였던 라디오 DJ도 못 했을 거고요. 그런데 남동생은 결혼했나요? 지금 건너편의 가족 보이죠? 저렇게 다정한 가정을 보면 부러워요. 저는 결혼하고 자녀가 있는 분들이 저보다 훨씬 더 성공한 삶 같아요. ‘나도 언젠가 한 가정의 가장이 될 수 있을까?’ ‘예쁜 아이들을 낳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하는데 결론은 늘 똑같아요. 사람은 각자 할 일이 있나 봐요.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더 해보려고요.

어머님은 결혼하라는 얘기 안 하나요.

어머니가 잔소리하시면 스트레스가 쌓일 텐데 신기할 정도로 푸시가 없어요. 오히려 얼마 전에는 제가 “이렇게 결혼도 못 하고 죽으면 억울해서 어쩌죠?” 하니까 어머니가 “100세 시대에 별걱정을 다 한다” 하셨어요(웃음). 저, 또 궁금한 게 있어요. 저도 여동생이 있지만 남매가 둘 다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나면 확실히 전보다는 많이 못 보죠?

아무래도 그렇죠. 각자의 삶이 있으니까요.

그렇겠네요. 전에는 사람들이 “사는 게 바빠서”란 말을 하면 잘 이해하질 못했어요. 이제는 사는 게 진짜 바쁘면 “같이 밥 한번 먹자”란 말이 인사치레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가끔 카카오톡에 생일 맞은 사람들 목록이 뜨면 선물과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요. “생일 축하해. 우리 본 지 오래됐지만 이렇게 문득문득 생각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우리가 특별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라고요. 이제 제 나이가 이렇게 지낼 때가 됐나 봐요.

그래도 문득문득 생각나는 사람들이 곁에 많이 있단 사실만으로도 행복한 삶 같아요.

저는 원래 어디 가서든 ‘늘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많이 썼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문득문득 행복하세요’라고 해요. 왜냐면 늘 일에 치여 사는데 어떻게 매일 행복할 수 있겠어요. 세상 물정 모르는 얘기였던 거죠(웃음).

인생곡 ‘아베마리아’와 ‘천 개의 바람이 되어’

1998년 당시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이소라의 프로포즈’에 출연해 청아한 목소리로 자신의 데뷔 앨범 타이틀곡 ‘난 믿어요’를 불렀던 6학년 어린이는 이후 최연소, 최초의 삶을 살았다. 특히 17세인 2003년, 뉴욕 카네기홀 역사상 세계 남성 성악가 중 최연소로 독창회를 열고 세계 데뷔를 한 이후 삶은 더 화려하다. 소니뮤직(2003), EMI뮤직(2007), 워너뮤직(2010), 유니버설뮤직(2014) 등 세계 4대 메이저 음반사와 모두 독집 앨범 유통 계약을 체결한 최초의 한국인 아티스트란 대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You Raise Me Up’ ‘Nella Fantasia’ ‘하월가’ 등 발표하는 곡마다 큰 인기를 누린 임형주에게도 아픈 손가락은 있다. 바로 세월호 추모곡으로 유명한 ‘천 개의 바람이 되어’다. 원래는 2009년 2월 16일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일에 맞춰 발매된 곡이었다. 각종 추모 행사와 방송 및 온라인상에 널리 사용되자 임형주는 2014년 5월 1일 세월호 참사 추모곡으로 재발매했고, 그 이듬해 이 곡의 음원 수익금 전액을 기부했다.

지난 2020년 예능 프로그램 ‘밥은 먹고 다니냐?’에 출연한 임형주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함께 슬퍼했을 뿐인데 세월호 추모곡을 발표한 후로 방송 섭외가 끊겼다. 미리 잡혀 있던 스케줄마저 모두 취소됐고 국가 행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고 이 곡에 얽힌 뒷이야기를 털어놓은 바 있다. 큰 사랑을 받은 대표곡이 한편으론 가수 인생을 위협하게 된 아이러니라니,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올 9월에는 데뷔 25주년 기념 콘서트와 함께 좀 특별한 해외 공연이 있었죠. 교황 바로 앞에서 노래 부를 때 떨리지 않던가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역대 교황 가운데 처음으로 몽골을 방문한 분이에요. 그런 뜻깊은 방문에서 제가 집전 미사 폐막 행사 엔딩 무대를 선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는데, 다음 날 교황님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칸타레! 칸타레!” 하시는 거예요. 노래를 불러달라는 요청을 받고 무반주로 카치니의 ‘아베마리아’를 불렀어요. 노래 부르다 침 튀기지 않았나 걱정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들려드리게 될 줄 몰랐어요. 깜짝 놀랐지만 정말 특별한 경험이에요.

심지어 ‘아베마리아’는 지난 2005년 길상사에서 열린 종교화합음악회에 초청받아 법정 스님과 김수환 추기경 앞에서도 부른 적이 있더라고요.

제 인생곡이라 할 수 있죠. 저는 그동안 발표한 곡들 중 대표곡을 꼽아보라면 ‘아베마리아’와 ‘천 개의 바람이 되어’를 꼽고 싶어요. 특히 ‘천 개의 바람이 되어’는 최근까지도 임영웅, 폴킴, 임태경, 김세정 등 여러 장르 후배들이 불러주는 등 이젠 임형주 하면 ‘천 개의 바람이 되어’가 됐어요.

‘천 개의 바람이 되어’는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지만, 의도와 달리 정치색이 담겼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잖아요. 당시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글쎄요. 노래가 사랑받을수록 핍박을 받기도 하고 힘들었죠.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영광과 고난의 역사라고 하잖아요. 저한테 ‘천 개의 바람이 되어’는 빛과 그림자 같은 곡이에요. 이 노래가 없었다면 계속 팝페라 임형주, 애국가 소년 임형주로 불리다 끝났을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이 노래가 있어서 또 다른 음악 인생의 챕터가 열렸다고 생각해요.

각종 국가 행사 무대에 많이 서고 유네스코 본부 친선 대사 같은 대외 활동을 열심히 한 것도 그런 오해에 영향을 미쳤을 듯해요. 요즘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으로 활동하잖아요. 만약 정치권에서 러브 콜이 온다면 수락할 의향이 있나요.

실제로 20대 대선 때 국민의힘과 민주당에서 공동선대위원장 제의가 일주일 간격으로 들어왔었어요. 그때 제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자문위원을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저는 정치에 대한 꿈은 1도 없어 거절했어요. 다만 문화예술 행정에는 관심이 있어요. 예술 기관 단체장이나 예술감독 제의가 온다면 도전해보고 싶어요. 후배들이 나아갈 길을 닦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제가 민간으로 문화재단을 운영해봤자 국가적인 차원에서 행정 시스템을 개편하지 않으면 한계가 있더라고요.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에 관심이 많던데요. 최근 만 10세에 서울과학고등학교에 입학했던 백강현 군이 한 학기 만에 학교를 그만두는 일이 있었잖아요. 분야가 다르긴 해도 영재 선배로서 이런 케이스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익히 알려진 대로 임형주는 예원학교 성악과 수석 졸업 후 미국 줄리아드 예비학교를 거쳐 이탈리아 산펠리체음악원 성악과와 로마시립예술대학 성악과 최고연주자과정을 졸업했다).

진짜 좋은 질문이에요. 저는 백강현 군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저도 친구들의 질투심을 겪어봤거든요. ‘이소라의 프로포즈’에 출연한 후 학교에 갔는데 한 아이가 오더니 “내가 널 밀치면 쓰러져줄 수 있어?”라고 묻는 거예요. 이유를 물으니 어떤 애가 저를 밀치면 자기한테 1000원을 주기로 했대요. 애들만 그런 것도 아니에요. 어른들이 “쟤는 너무 애늙은이야” “아이답지 않게 노래도 징그럽게 부른다”며 저를 두고 수군거리기도 했어요. 이런 칭찬과 동시에 손가락질도 받는 삶을 살아봤기에 제가 더 영재교육 시스템과 제도를 개선하는 데 일조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영재들을 위한 멘털 케어가 필요해요.

임형주 씨도 멘털 케어가 필요했나요.

저도 상처가 많았어요. 많은 분이 제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온실은 온실이나 그 안에서 잡초처럼 자랐어요. 저 엄청 독해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해요.

그래미 어워즈 심사 위원으로 본 K-팝

이렇게 25년을 버틴 거군요. 25라는 숫자가 주는 무게감 때문에 아무래도 여러 사람이 나이가 많다고 오해하지 않나요.

억울해요. 제가 데뷔한 지 오래되기도 했고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때 애국가를 불렀으니까 다들 지금 한 40대 정도 됐겠거니 생각하세요. 저랑 동갑인 가수 보아 씨도 회사에 가면 다 이사님이라 부르고 방송국에 가도 스태프가 자기를 어려워한다고 방송에서 얘기했잖아요. 어쩔 수 없나 봐요. 포기했어요. 이제는 ‘선생님’ 소리를 들으면 ‘나를 리스펙트해주는구나, 고맙다’ 생각해요.

실제로 선생님이기도 하죠. 이탈리아 로마시립예술대학 성악과 석좌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니까요.

석좌교수는 1년에 몇 차례 특별 마스터클래스 위주로 수업을 해요. 2015년 명예교수로 시작해 이듬해 석좌교수가 된 거니까 ‘교수님’ 소리 듣는 건 이제 좀 적응이 됐어요. 예원학교 친구들 중에도 이제 교수가 많은데요. 통상적으로 보면 제가 좀 빠른 편이었죠. 남들보다 일찍 시작한 덕분에 인생 2막도 빨리 준비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일찍 시작한 덕분에 지금 현역이면서 미국 ‘그래미 어워즈’ 심사 위원으로도 활동할 수 있는 게 아니겠어요. 임형주 씨 SNS에서, 내년 2월 열리는 그래미 어워즈 후보 선정을 위한 비밀 전자투표를 마쳤다는 글을 봤어요.

맞아요. 그래미상을 받아도 대단한 성과인데 심사 위원이자 투표인단이 된 건 엄청난 영광이에요. 다만 그래미 어워즈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안 된다는 이야기는 꼭 하고 싶어요. 이번에 K-팝 아티스트들이 대거 도전했는데 아무도 후보로 지명받지 못했잖아요. 아이돌뿐만 아니라 K-클래식 아티스트도 다 탈락했어요. 오랜 전통의 최고 대중음악 시상식이 시대적 추세를 반영하지 못하고 도태되는 듯해요. K-팝 아이돌들이 판매 수치 그래프를 보나, 음악 평론을 보나 부족함이 없었거든요. 이번 일은 메인스트림을 빠른 시간 안에 장악하고 있는 K-팝에 대한 눈에 보이지 않는 방어막을 친, 일종의 차별이라고 생각해요.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이나 노래가 있나요.

저는 BTS ‘화양연화’ 시리즈 전부와 뉴진스의 ‘Ditto’를 좋아해요.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Sugar Rush Ride’나 잔나비 곡들도 좋아하고요. 최근에는 라이즈를 눈여겨보고 있어요. 요즘 아이돌은 어쩜 이리 다 잘생기고 예쁘고, 노래도 춤도 잘할까요. 저는 늙어도 트렌디한 할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충분히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 아이돌 이야기하는 걸 봐서는요.

제 취향이 굉장히 젊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저한테 기대하는 이미지가 있어서 애어른으로 사느라 이런 취향을 숨겨왔어요. 제가 2:8 가르마를 고수하는 이유도 이 머리 스타일로 사람들이 저를 기억하니까 유지하는 거예요. 어떤 면에서는 임형주가 임형주를 연기하고 있는 거죠.

내가 나를 연기하고 살면 피곤할 것 같아요.

안 피곤하다면 거짓말이죠. 젊은 거장, 바른 이미지가 저한테는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족쇄예요. 인간 임형주는 많은 걸 희생하고 살고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영화랑 드라마 보는 걸 엄청 좋아해요. 혹시 대만 드라마 ‘상견니’ 보셨어요? 제가 요즘 ‘상친자’(‘상견니’에 미친 자라는 의미의 유행어)예요. ‘상견니’ OST도 엄청 들어요. 한번 보실래요? (유튜브에서 다양한 로맨스물을 찾아 보여주며) 저는 이런 교복 입은 청춘들의 풋풋하고 아련한 로맨스물이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어요. 피터팬증후군이 내면에 있나 고민될 정도로 좋아요. 하지만 제가 주변에 추천하면 다들 “철 좀 들어라” 그래요.

혹시 학창 시절에 교복 입고 그런 연애를 못 해봐서 그런 건 아닐까요.

아니에요. 교복을 원 없이 입어보진 못했어도 학교 다닐 때 연애는 해봤어요. 그보다는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시작으로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상견니’, 중국 자본으로 찍긴 했지만 대만 감독이 만든 영화 ‘먼 훗날 우리’ 등 대만 청춘 멜로물들은 정말 웰메이드 작품이에요. ‘상견니’를 보면 대만에 여행 가고 싶어져요. 이런 게 문화의 힘이죠. 요즘 우리나라 콘텐츠가 장르물에 집중하고 있지만 저는 진짜 주 종목은 멜로라고 생각해요. ‘스물다섯 스물하나’ ‘나의 해방일지’ 같은 드라마는 우리나라 정서에서만 만들 수 있는 작품이거든요.

“인생은 생중계, 안식년에는 유튜브 방송으로 만나요”

여러 분야에 두루 관심이 많은 임형주는 버킷 리스트에 라디오 DJ가 올라 있었다. 그는 이번에 라디오 DJ를 하며 다양한 사람과 소통할 수 있어 행복했다. 그래서 11월 27일 발매하는 정규 9집 ‘Life On Air’ 역시 노래와 멘트가 있는 라디오 콘셉트로 기획했다. 타이틀곡인 오리엔탈풍 팝페라곡 ‘소멸하는 밤’ 외에 후속 타이틀곡 ‘기억해줘요’, 성가곡 ‘Nearer My God To Thee’ 등 총 10곡을 사전 이벤트를 통해 팬들이 직접 보내온 사연과 함께 담았다. 임형주가 읽어주는 사연은 디지털 음원으로는 나오지 않는 데다 손해를 감수하고 딱 999장만 발매할 예정이라 팬들 사이 소장을 위해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할 듯하다.

지금 보니 영재교육도, 콘텐츠도 분야만 다를 뿐 선택과 집중 전략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왕이면 잘할 수 있는 부분을 택해서 집중하는 게 효과적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내년에 안식년을 갖고자 해요. 몇 달 정도 쉬면서 일단은 파격적으로 유튜브 채널에만 집중하려고요. 시대가 바뀌었잖아요. 이제는 미국 발매 이런 말이 의미가 없어요. 스포티파이나 유튜브 뮤직을 통해 전 세계로 유통되니까 전 세계 동시 발매인 셈이죠. 안식년을 가지면서 지금까지의 25년을 결산하고 또 다른 25주년의 챕터를 열어보려 해요.

새로운 챕터에는 어떤 내용을 담을 건가요. 플레이어와 코치 비중이 달라지나요.

뮤지션으로서의 활동은 좀 줄이고 후배 양성이나 문화예술 행정 공부를 하고 싶어요. 솔직히 저는 여한이 없어요. 제 기준에서 많은 것을 이루었기 때문에 체력이 될 때 인간 임형주의 개인적인 삶을 살아보고 싶어요. 이거야말로 선택과 집중이네요.

민감한 부분이긴 한데, 성대도 나이가 들잖아요. 혹시 그런 변화를 느껴서인가요.

그건 아니에요. 오히려 앞으로 한 5년 동안이 제 목소리의 전성기일걸요. 다만 체력이 목소리를 받쳐주질 못해요. 라디오에서 하차한 이유도 갑상선 기능이 좀 떨어져서예요. 제가 1.1kg으로 태어나서 선천적으로 장기들이 다 작아요. 주치의가 종종 저한테 폐활량이 안 좋은데도 이렇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건 “정말 신이 주신 재능”이란 말을 하세요. 그런데 보통 테너들은 목소리에 원숙미가 묻어나는 30대나 40대가 가장 노래를 잘할 때예요. 저는 발성이 다 자리 잡기 전에 전성기가 너무 빨리 와서 재능을 더 잘 발휘하지 못한 게 아쉬워요.

이 좋은 목소리가 담긴 이번 신보를 999장만 발매하는 게 아쉬워요. 999장인 이유가 설마 1장은 임형주 씨가 갖고 1000장 한정 음반을 만들려는 건가요.

어떻게 알았어요? 3년간의 행복했던 DJ 활동을 의미 있게 갈무리하면서 이왕이면 좀 상징적이고 싶었어요. 수익은 포기한 거죠.

팬들 입장에서는 선물 받는 기분이겠네요. 임형주 씨의 음악 인생도 생일 때 이모가 선물해준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의 베스트 음반으로 시작된 거잖아요. 그때 선물을 받지 않았더라면 지금 토요일 오후 가족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을까요.

아직도 그 CD를 가지고 있어요. 가끔 마음이 흔들릴 때 꺼내 봐요. ‘이모는 왜 나한테 이 앨범을 줘서 내가 성악을 하며 힘들게 살도록 만들었을까?’라고 실제로 생각해본 적도 있어요. 저는 다른 길로 돌아가더라도 음악을 하고 있을 것 같아요. 정확히 어떤 일일지는 모르지만 문화예술 쪽에 종사하고 있을 건 확실해요.

한바탕 수다를 마치며 임형주는 한정판 신보 대신 정규 8집 CD에 사인해 기자에게 건넸다. 그런 임형주에게 기자도 집에서 발굴해 온, 2009년에 받은 사인 CD를 보여줬다. 앳된 얼굴이 담긴 앨범 커버 위에는 정말로 “늘 행복하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늘’이 ‘문득문득’으로 바뀌는 세월 동안 임형주는 신곡 홍보와 좋아하는 영화 얘기를 오가며 인터뷰마저 즐기는 ‘여유 만렙’이 되어 있었다.

임형주가 추천하는 12월의 플레이리스트

<sub>평소 클래식부터 우리 가곡, 최신 K-팝까지 고루 듣는 임형주에게 12월에 어울리는 노래를 소개해달라 요청했다. “라디오 DJ 같아 재미있다”는 임형주는 자신의 신곡을 제쳐두고 실제로 겨울마다 즐겨 듣는 노래 5곡을 추천했다.

달린 러브 ‘Christmas (Baby Please Come Home)’ 
임형주가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즐겨 듣는 노래. 전주에서부터 크리스마스의 흥겨운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셀린 디온 ‘O Holy Night’ 
머라이어 캐리, 휘트니 휴스턴 등 다양한 버전의 ‘O Holy Night’ 중 셀린 디온이 부른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는 임형주. 셀린 디온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지만 부드러우면서도 호소력 짙은 셀린 디온의 음색이 이 곡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다.

사카모토 류이치 ‘Merry Christmas Mr. Lawrence’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전장의 크리스마스’의 주 테마곡. 1983년 작품이라 영화는 모를 수 있어도 곡을 들으면 “아, 이 곡” 할 만큼 지금도 사랑받는 사카모토 류이치의 대표곡 중 하나다. 임형주는 지금은 고인이 된 사카모토 류이치를 삶의 롤 모델이자 우상으로 꼽았다.

강수지 ‘혼자만의 겨울’ 
임형주는 초등학생 때 사촌 형이 사준 강수지 카세트테이프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카세트테이프를 보며 ‘혼자만의 겨울’을 들으면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해 좋아한단다.

나카시마 미카 ‘雪の華(눈의 꽃)’ 
임형주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설명이 필요 없는 명곡”이다.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 OST로 사용된 박효신의 한국어 리메이크 버전과는 또 다른 애절한 맛이 있다.</sub>

#임형주 #천개의바람이되어 #아베마리아 #BTS #여성동아

_{사진제공 디지엔콤
사진출처 벅스 임형주S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