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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영원한 히로인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와 ‘19 그리고 80 ’ 재공연 무대에 서는 연극배우 박정자

■ 기획·구미화 기자 ■ 글·장옥경 ■ 사진·박정자, 경향신문사 제공

2003. 10. 02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 박정자가 91년, 딱 50세의 나이에 열연했던 연극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로 다시 무대에 선다. 내년 초엔 19세 청년과 80세 할머니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화제가 됐던 ‘19 그리고 80’에 다시 출연할 예정이다. 환갑을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왕성하게 활동하는 박정자가 연극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했다.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와 ‘19 그리고 80 ’ 재공연 무대에 서는 연극배우 박정자

‘40여년 동안 연극이라는 외길을 걸어온 최고의 배우’라는 수식어가 지나치지 않을 듯한데 박정자(62)는 “최고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겁이 난다”며 손사래를 친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최고는 없는 거고, 만일 있다면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라며 자신은 다만 프로를 지향할 뿐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한번도 연극을 직업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고 한다.
“제게 연극은 숨쉬고 먹고 자고 걸어다니는 공기 같은 거였어요. ‘앞으로 배우로 살아야겠다’ 하는 결심 같은 건 없었어요. 그냥 이거말고, 다른 인생의 목표가 없어서 하다 보니 지금의 위치에 왔을 뿐이지요.”
그는 ‘카리스마 강한 배우’라는 평가에 대해서도 “바람이 불어도 쓰러질 염려가 없는 튼튼한 다리, 독특한 목소리와 예쁘지 않은 얼굴, 여기에 지금까지 맡았던 배역들이 카리스마를 생성하지 않았나 싶다”며 빙긋이 웃고 만다.
9월25일부터 11월 23일까지 산울림 소극장 개관 18주년 기념작으로 공연되는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는 그가 딱 50세 되던 지난 91년에 열연해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
‘엄마는…’은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희생하는 가난하고 순박한 엄마와 엄마의 이런 삶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길을 고집하는 딸 사이의 갈등과 고뇌를 다룬 연극. 91년 공연 당시 거의 1년간 장기 공연하며 5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고, 서울연극제 자유참가작 부분 최우수작품상·주연상·연출상·번역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훌쩍 흐른 지금, 환갑이 지난 나이에 같은 작품으로 다시 무대에 서는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한달 전부터 연습에 들어갔어요. 91년, 98년에 이은 세번째 출연인데 아주 긴장이 돼요. 사람들은 초연도 아니고 똑같은 무대에서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대사를 1천번 정도 했는데 무슨 부담을 갖느냐 하지만 그게 아니거든요.”
그는 아무래도 과거에 에너지도 더 넘치고, 잘한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와락 걱정이 앞선다고 털어놓는다.
“이번엔 에너지만 가지고 연기하지 않으려 해요. 원숙한 연기랄까, 절제된 연기에 무게를 두고 있어요. 잘 될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연기가 충분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남기지 않기 위해 공연을 앞두고 바짝 긴장하고 있다는 그는 이러한 반복된 도전은 연기자에게 ‘끝없는 숙제’나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했다.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와 ‘19 그리고 80 ’ 재공연 무대에 서는 연극배우 박정자

그는 ‘엄마는…’을 통해 오미희, 오지혜, 우현주 세 딸을 얻었다.
“98년에 공연할 때 연극을 통해 만난 세명의 딸들이 한자리에 모인 적이 있어요. 공연이 끝나고 난 뒤 세 딸이 모두 울었는데 특히 미희가 분장실에서 통곡을 하던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인상적이었어요. 옛날 생각도 나고 자기 설움도 북받치는 데다 오랜만에 나를 만나니 엄마를 만나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심정이 되었던가 봐요. 그때 딸들이 했던 공통적인 이야기가 ‘그때는 왜 그렇게 못했나. 좀더 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었어요.”
얼마 전에는 3대 딸 우현주가 전화를 해서 임신 소식을 알려왔다고 한다.
“현주가 그러더라고요. 자기는 3개월밖에 안됐는데도 이렇게 힘든데 엄마는 어떻게 만삭이 될 때까지 연기를 했냐고.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아들에게 너무 미안해요. 만삭의 몸으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에서 온달의 어머니 역할을 맡았는데 어느날인가는 정말 목구멍으로 아이가 덜컥 나올 것처럼 힘이 들더라고요. 엄마가 그렇게 힘든데 뱃속의 아기는 어땠겠어요?”
72년 결혼해 남우와 연수 두 남매를 둔 엄마로서의 박정자는 어떤 모습일까.
“여느 엄마와 다르지 않아요. ‘엄마는…’을 보면 극중에 화장실 장면이 나와요. 문도 안 닫고 오줌, 똥 누는 엄마의 모습이 나오는데 딸은 질색을 하죠. 엄마가 문을 닫고 볼일을 봤으면 좋겠는데 그러지는 않고, 더군다나 그 상황에서 가까이 오라며 차림새에 대한 잔소리까지 해대니 오죽하겠어요. 우리집도 비슷해요. 큰애 나이가 서른하나, 둘째가 서른. 둘다 나이가 꽉 찼는데 결혼에 대한 의지도 없고 만나는 이성도 없으니 제 속이 타지요. 게다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면 좋으련만 밤엔 늦도록 안 자고 아침엔 못 일어나니, 아직도 제가 일찍 일어나라고 잔소리를 해요.”
반면 “아내 역할은 없었다”고 말한다. 자유로운 분위기를 좋아해서 그냥 자유롭게 살았다는 것. 만삭의 몸으로도 아내가 힘든 일을 할 때 보통 남편들 같으면 당장 그만두라고 했을 텐데 그런 일이 없었냐고 묻자, 그는 오히려 자신이 막무가내였다고 답한다.
“언젠가 한번은 남편이 날더러 ‘이제 진력날 때가 되지 않았냐’고 해요. 아니,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에게 이제 진력날 때도 됐는데 그만두라는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직업을 가지고 전투적으로 매일 전쟁터에서 사는데 그만두라고 할 수 있겠냐고요?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냥 (아무 말 않고) 넘어갔어요.”
이렇듯 자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 남편이지만 깜짝 선물로 감동을 준 적도 있다. 5년 전 어느 날, 남편이 극장으로 장미꽃다발을 보낸 것.
“내 나이만큼의 꽃을 보냈는데 정말 리얼했어요. 나이를 모르고 살다가 내 나이를 아주 정확하게 안 기분이었다고 할까요. 이 사람이 내 나이를 알고 있구나 싶었지요.”

인생을 4막5장이라고 본다면 자신은 4막1장쯤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는 박정자. 때론 ‘세월이 너무 빨리 지나간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나이는 물리적인 것일 뿐이라고 스스로 다그친다. 나이 먹는 것에 대한 공포가 전혀 없다는 점도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그가 시간의 흐름을 두려워하지 않는 건 ‘엄마는…’이 끝난 후 내년 1월9일부터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공연될 ‘19 그리고 80’이라는 연극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
‘19 그리고 80’은 인생의 혼란기를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벗어나려는 ‘헤럴드’라는 19세 청년과 인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경험하고 평상심을 되찾은 80세 할머니 ‘모드’와의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박정자는 ‘19 그리고 80’이 “인간적으로나 배우로서 한 단계 성숙하게 하고, 많은 깨달음을 준 연극”이라며 지금에 와서 비로소 꿈이 생겼다고 소녀처럼 들뜬 모습을 보인다.
‘19 그리고 80’에 대한 그의 의욕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올해 초 공연에서 그는 생전 처음 물구나무서기를 했다가 목 디스크 진단을 받았다. 이후 의사의 권유로 극본을 수정해 공연을 계속했는데 내년 공연에선 꼭 다시 물구나무를 서겠다며 준비를 하고 있다. 자신이 물구나무서기를 했을 때 관객들이 박수를 치며 좋아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어 최근엔 평생 처음 헬스클럽에 등록까지 했다고 한다. 빠지는 날이 더 많지만, 멋지게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그날을 위해 ‘파이팅’을 외친다고.
그리고 관객들이 ‘쯧쯧, 올해는 박정자가 좀더 늙었구나’ 하는 연민을 가지며 볼 수 있을 정도로 오래도록 시간과 공간과 세월과 작품을 나누고 싶은 게 그의 꿈이다.
“저는 관객들이 제 연극을 한번만 보고 끝내기를 원치 않아요. 앞으로도 한해 한해 나이가 들어가면서 늙을텐데, 매년 관객들이 와서 제 연극을 보며 함께 늙어가기를 원해요. 세상이 날로 각박하고 인간성을 잃어가고 있잖아요. ‘이런 세상에 뭐 연극을 하고 있어’라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이런 세상일수록 더욱 연극이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숨 돌리고 살아가는 여유가 필요하니까요.”
그는 특히 ‘19 그리고 80’을 통해 위로와 용서 같은 감정들을 관객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고 했다. 연극이라는 단 하나의 등대에 의지해 끊임없이 새로운 바다를 향해 헤엄쳐가는 그는 자신의 소중한 꿈을 반드시 이뤄내지 않을까.

무대에 선 자신의 모습에 박수치고 연민하며 삶의 여유를 찾을 관객을 생각하면 나이를 먹는 게 두렵지 않다는 박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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