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전원일기’를 통해 20년 넘게 인자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더군다나 15년 동안 아프리카 등 소외 지역을 돌며 봉사활동을 해와 ‘한국을 대표하는 어머니상’으로 불리는 김혜자(65).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런 수식어가 “못마땅하다”고 한다. “오죽하면 ‘전원일기’에서 저를 죽여달라고까지 했겠어요(웃음). 처음 10년 동안은 책을 읽는 느낌, 공부하는 기분으로 연기했지만 10년이 넘어가니 질리기 시작하더군요. 제가 그러니 시청자들은 얼마나 지겨웠겠어요. 무난하긴 하지만 실제 제 모습과 맞지도 않고….”
얼마 전 그와 함께 아프리카 기아 현장을 다녀온 사진작가 조세현은 그를 ‘사랑스럽고 순수한 소녀이자 생의 화려함에 결코 속지 않는 허무주의자’라고 표현했다. 이제껏 알려진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가 바쁜 시간을 쪼개 12월 개막하는 연극 ‘다우트’ (doubt·의심)에 출연하는 이유는 어쩌면 자신의 본모습을 찾기 위한 일종의 도전이다. 한국에서 초연되는 ‘다우트’는 가톨릭 학교 원장수녀가 교사와 학생에 관한 미심쩍은 소문을 듣고 진실을 추적해나가는 과정을 진지하게 다룬 작품. 그는 의심 많고 냉철한 원장수녀 엘로이시어스 역을 맡았다.
“의심이 지나치게 많은 역이라 처음엔 거절하려 했어요. 무언가를 의심하는 건 긍정하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잖아요. 연출자한테 왜 저를 캐스팅했느냐고 물었더니 미국 공연에서는 그 역을 맡았던 배우들이 심술궂거나 강퍅하게 생겨 외모만으로도 캐릭터가 표현이 됐지만 자기는 그런 선입견을 깨고 싶었다고 하더군요. 한 달 시간을 달라고 하고 여러 번 대본을 반복해 읽었더니 그 여자가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연극무대는 ‘셜리 발렌타인’ 이후 5년 만이다. 한 달 사이 그는 대본에서 어떤 매력을 발견한 것일까.
“절대 웃지 않는 원장수녀가 딱 한 번 웃는 장면이 있어요. ‘나도 결혼한 적이 있지요. 히틀러 때문에 남편을 잃긴 했지만’이라고 말하면서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짓는데 대본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진 않지만 그 대사로 미루어 원장수녀는 행복했던 신혼 초에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그로 인해 사람을 믿지 않게 된 것 같더군요. 사실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사람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기도 하죠. 그렇기에 세상엔 확신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자기가 낳은 아기를 차례로 죽인 프랑스 여자의 사건을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믿어온 모성마저도 의심하게 되잖아요.”
연극 ‘다우트’ 주연을 맡아 5년 만에 무대에 서는 김혜자. 그는 연기자이기에 앞서 15년 동안 가난한 아이들의 대모 역할을 해온 따뜻한 ‘인간’이기도 하다. 손녀딸과 함께(오른쪽 끝).
“배우로서 나이 든다는 건 서글픈 일이지만 괴로움과 번민 많았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63년 KBS 공채 1기로 데뷔, 올해로 연기 경력 43년을 맞은 그에게 여배우로서 나이가 들어가는 건 어떤 느낌과 의미인지 물어보았다.
“‘선셋 대로’라는 영화 보셨어요? 굉장히 화려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은퇴한 여배우에게 어느 날 할리우드에서 전화가 와요. 여배우는 잔뜩 기대에 부풀어 무슨 일일까 궁금해하는데 알고 봤더니 자동차 때문이었어요. 그 여배우가 세상에 단 한 대밖에 없는 희귀한 차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차가 필요했던 거죠. 그처럼 배우로서 나이가 든다는 건 서글픈 일이지만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나를 바칠 무언가가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기도 해요.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으냐고요? 그 모든 괴로움과 번민이 다시 반복될 걸 생각하면 끔찍해요.”
김혜자를 만난 곳은 그가 살던 집을 개조해서 만든 서울 홍대 앞 한 카페였다. 마당에는 발을 담글 수 있는 작은 수영장이 있고 장미와 라일락을 비롯한 각종 꽃들이 사시사철 번갈아 피는데 요즘엔 국화가 주인공이다. 그는 홍대 앞이 번화해지기 시작하던 98년, 24년 동안 살던 이 집을 처분하고 좀 더 조용한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제가 살던 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았네요. 라일락이랑 오래된 나무들은 자르지 말라고 부탁했더니 지금도 그대로 있어요.”
12월 막을 올리는 연극 ‘다우트’에서 그는 그동안의 인자한 어머니상 대신 냉철하고 의심 많은 원장수녀 역을 맡았다. 그는 “연기에는 완성이 있을 수 없다. 끊임없이 도전하며 새로운 모습을 창조할 뿐”이라고 말한다.
이 집은 남편과의 추억이 머물러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연기자로 데뷔하던 해 그는 “너무나도 잘생긴 남편을 만나는 바람에” 결혼했다. 남편은 그를 자신의 아내 이전에 ‘배우 김혜자’로 인정해준 최고의 ‘팬’이었는데 이사 직전 세상을 떠났다. 고통이 극심하다는 췌장암 말기였다.
“선고를 받고 나서 한 달반밖에 못 살았어요. 췌장암은 암 중에서도 특히 많이 아프다고 하던데 남편은 죽는 날까지 ‘아프다’ 소리 한 번 안 하고 제 걱정을 했죠. ‘나 없으면 당신은 아무것도 못하는데’ 하면서요.”
남편이 세상 떠난 후 그 자리를 대신해주는 고마운 아들
연기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만년 소녀’를 아내로 데리고 사는 일이 수월치 않았겠지만 남편은 있는 그대로의 그를 아끼고 사랑해주었다고 한다. 그런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그는 가끔 사람들로부터 ‘저렇게까지 세상 물정을 모를 수 있나’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고. 그럴 때마다 그를 따스하게 감싸준 건 바로 아들이었다.
“그날도 그런 일로 속상해하고 있는데 우리 아들이 뒤에 와서 ‘엄마가 얼마나 순진한지는 아빠랑 나만 아는데…. 아빠는 저 세상으로 떠나고, 우리 엄마 어떡하나’ 하면서 저를 가만히 안아주더라고요.”
힘들고 지쳐도 아이들이 보고 싶어 또 빈곤지역을 찾게 된다는 김혜자.
슬하에 아들, 딸 남매를 두고 있는 그는 둘째를 낳고 4년 정도 연기생활을 접었다. 출산도 하기 전에 인형을 가지고 목욕 연습을 시킬 정도로 극성스러운 면도 있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키운 아들 딸이 모두 결혼해서 자식을 낳았다. 그래서 그는 모두 통틀어 4명의 손자 손녀가 있는 할머니다. 그 가운데 아들은 남편을 참 많이 닮았다고 한다. 추석 당일에 성묘하러 가는 것까지.
“차가 막히니까 보통 성묘는 며칠 전에 다녀오잖아요. 남편은 ‘고생해야 효도하는 느낌이 난다’며 항상 추석에 성묘를 가곤 했는데 아들이 그걸 그대로 따라하고 있어요.”
어려서부터 ‘덧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닐 만큼 허무주의자이던 그가 연기 외에 관심을 가지는 건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고 한다. .
“‘하느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신다면 지금쯤 데려가도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많이 했죠. 슈베르트가 ‘내일 아침엔 깨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매일 잠자리에 들었다는 말을 듣고 그 사람이 좋아지기까지 했어요. 우리 남편은 땅에 묻어달라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제가 죽으면 태워서 훨훨 날려줬으면 좋겠어요. 아들한테 그 말을 했더니 펄쩍 뛰더라고요. 그래서 딸한테 ‘오빠가 반대해도 꼭 그렇게 하라’고 당부했죠.’
“처음에는 무섭고 싫었던 봉사활동, 이젠 아이들이 보고 싶고 궁금해서 안 하면 견딜 수 없게 됐어요”
그런 그에게 삶의 의미를 알게 해준 것은 소외된 지역의 아이들을 찾아가 봉사활동을 펼치는 것이다. 그는 92년부터 아시아 및 아프리카의 빈곤국가를 지원하는 월드비전의 친선대사로 모잠비크, 방글라데시, 미얀마, 북한 등 도움이 필요한 곳은 어디든 찾아다니며 긴급 구호활동을 펴왔다.
“처음 간 곳이 에티오피아였는데 정말 지옥 같았어요. 가난하고 무섭고 지저분해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거기 다녀온 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합동 기자회견을 하고 어떤 신문은 ‘탤런트 김혜자 자선사업가로 변신하다’라는 사설까지 써서 어쩔 수 없이 떠밀리다시피 소말리아에 다시 가게 됐어요. 한두 번 가다보니 아이들이 보고 싶고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하더군요. 까만 피부에 큰 눈망울, 어쩌면 다들 그렇게 예쁜지…. 나한테 돈이 있는데 죽어가는 어떤 사람이 그 돈으로 수술을 받고 살 수 있다고 하면 누구라도 내놓지 않겠어요. 그렇게 예쁜 아이들이 죽어가는데 의료진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세요? 이 아이는 치료해서 살 수 있는지, 없는지를 살피는 거예요. 냉정하지만 그게 현실이랍니다.”
그는 지난 5월, 6년 전 방문했던 케냐를 다시 찾아 당시 인연을 맺었던 에쿠아무라는 소녀와 재회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사흘을 굶고 너무 배가 고파 웅크리고 자는 에쿠아무와 동생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 계속 그와 동생들의 행방을 수소문해왔다고.
“아프리카 아이들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여기저기 옮겨다니기 때문에 행방을 찾기가 쉽지 않아요. 혹시 잘못되지는 않았을까 마음에 걸려 케냐에 가는 사람이 있으면 사진을 보여주고 찾아달라고 했는데 이번에 찾았어요. ‘어떤 동양 여자가 널 찾는다’고 하니 전 줄 알고 생계수단인 사금 캐는 일도 가지 않고 저를 기다렸다고 하더군요. 아이를 만나 꼭 안아주려고 했더니 ‘왜 이제 왔어요’ 하는 원망 섞인 울음과 함께 몸을 비틀더군요. 미안했어요.”
하지만 그가 찾아다닌 곳에 전쟁과 가난으로 인한 고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비극적인 상황을 견뎌내는 인간의 용기와 사랑을 배웠다. 자신이라면 벌써 죽었을 것 같은 참혹한 상황에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존경스러웠다는 그는 월드비전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것 외에도 수십 명의 아이들과 결연을 맺고 한 달에 일정액을 지원하고 있다.
후원을 시작한 후 돈을 쓰기 전에 먼저 무의식적으로 계산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좀 비싼 물건을 하나 사려고 하다가도 ‘이 돈이면 몇 명의 아이들이 몇 끼를 먹을 수 있는데’라는 생각이 들어 망설이게 된다는 그는 인터뷰가 끝나자 남은 커피를 종이컵에 따라 ‘테이크아웃’해가며 ‘이 아까운 커피를 남길 수는 없잖아요’라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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