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정은혜(32)의 달이었다. 영옥(한지민)의 쌍둥이 언니 영희 역을 맡은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가 12일 화제 속에 종영한 데 이어 23일 그를 다룬 다큐멘터리 ‘니얼굴’이 개봉했다. 개봉한 지 보름 만에 ‘1만 관객’을 돌파했다. 여름 블록버스터 홍수 속 다큐멘터리 영화가 거둔 의미 있는 성과다.
영화 ‘니얼굴’은 배우가 아닌 작가 정은혜의 이야기다. 발달장애가 있는 정은혜 작가는 경기 양평 ‘문호리 리버마켓’에서 캐리커처를 그린다. 그는 어머니 장차현실(58) 작가와 투닥거리면서도 좋은 친구로 지낸다. 그가 화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작가의 아버지 서동일 감독이 카메라에 담았다.
영화가 개봉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정은혜 작가와 장차현실 작가, 서동일 감독은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7월 16일 인터뷰 당일 이전과 이후 스케줄이 꽉 차 있었다. 관객을 만나러 강원 강릉, 전북 군산 등 전국을 다닌다고 했다.
정은혜 작가는 지친 기색 없이 밝게 웃으며 스튜디오로 들어왔다. 능숙하게 포즈를 취하는 모습은 셀럽다웠다. 장차현실 작가가 딸의 손을 잡고 카메라 앞에 섰다. 사진 촬영 후 허락된 인터뷰 시간은 단 15분. 정은혜 작가에게 바빠서 피곤하지 않냐고 묻자 “괜찮아요. 컨디션 좋아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은혜 씨의 교감
‘우리들의 블루스’에서의 연기가 호평을 받았습니다.정은혜 (이하 정) 그냥 뭐… (제가) 연기 집중력이 있죠.
장차현실(이하 장차) 본인이(웃음)? 대사 걱정 많이 하지 않았어?
정 그렇지. 중간에 까먹을까 봐 걱정했지.
요즘도 영옥(한지민)과 계속 연락하고 지내시나요.
정 아, 지민 언니 가끔 톡 하죠.
최근에는 어떤 이야기 나누셨어요.
정 그건 비밀입니다.
요즘 ‘지민 언니’처럼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계신데, 그림 작업은 언제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요.
정 어제 오랜만에 양평 작업실에서 그림 좀 그렸죠. 채색 작업했어요.
장차현실 작가가 설명을 보탰다. 그는 딸인 정은혜 작가를 은혜 씨라고 부른다. 그를 존중하는 의미다.
“요즘 바빠서 은혜 씨가 오랜만에 작업실에 갔어요. 은혜 씨는 역시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 그런지 작업실에서 마음이 되게 안정되는 것 같았어요. 8월 말에 전시회가 예정돼 있는데 작업이 밀려서 고민이네요.”
예정된 전시회 주제가 ‘포옹’이라고 들었어요. 주로 사람을 많이 그리시던데 이유가 있나요.
정 사람도 있고, 또 동물도 있어요.
장차 무엇을 그릴지는 은혜 씨가 선택하는 건데, 생각해보니 다 살아 있는 것들이네요. 은혜 씨, 누군가를 그릴 때 무슨 생각해?
정 생각?… 그분들 생각나지.
장차 이건 제 해석인데요. 은혜 씨는 뭔가를 그릴 때 대상과의 교감이 중요한 것 같아요. 지금까지 캐리커처로 그린 사람이 4000명이 넘어가고 있는데요. 사진만 보내주고 그려달라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대부분 만난 분들, 서로 인사하고 대화를 나눈 분들이죠. 그렇게 교감이 있는 사람을 그렸어요.
정 그런데 제가 사람들을 많이 그렸으니까, 동물과 고양이를 많이 그리고 싶어요. 사계절도 그려보고 싶어요.
자연이 새로운 관심 대상인가요.
정 풍경은 좀 어려워요.
장차 풍경보다는 봄의 꽃, 여름의 꽃 같은 걸 그리고 싶은 거야?
정 응!
장차 찬성입니다. 그런 그림이 잘 팔려요(웃음).
‘니얼굴’을 보면 작가님 책상 위에 ‘이슬톡톡’이 올려져 있는 장면이 나와요. 요즘엔 어떤 술을 즐겨하시나요.
정 아아! 저는 맥주도 좋아하고 막걸리도 좋아하죠. 어제는 양평 근처에 있는 푸줏간 뒷고기 먹었습니다(함박웃음).
장차 요즘에 건강상 채식을 하고 있거든요. 어제는 특별한 날이라 은혜 씨가 고기에 맥주를 마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정 안녕하세요. 저 많이 보고 싶죠? 저도 많이 보고 싶고 생각 많이 나요. 같이 대화도 하고 함께 웃고 뜨거운 박수(를 받았던) 기억도 나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은혜 씨와의 15분은 쏜살같이 흘렀다. 그가 떠나고, 어머니 장차현실 작가와 대화를 이어갔다.
인터뷰 제안을 고사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영화는 ‘정은혜’라는 개인을 다루지만 이런 이야기가 세상에 더 많이 알려졌으면 했어요. ‘발달장애인이 비장애인의 삶 속에서 함께 어울릴 수는 없었던 것인가’ ‘이들이 정말 사회에서 무용한 존재들인가’ 이런 질문을 전하고 싶었어요. 은혜 씨가 많은 분들에게 롤 모델이 될 것 같아요. 영화에서 예술 활동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하고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끌어가려는 의지를 갖잖아요. 고정관념을 깨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님도 덩달아 바빠지셨겠네요.
부모로서 은혜 씨 활동을 열심히 지지하고 응원하는 거죠. 스스로를 위한 일이기도 해요. 가족 중에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이 있는 거잖아요. 이런 경우엔 그 사람이 행복한가에 따라 다른 가족 구성원이 영향을 받아요. 사실 은혜 씨가 20대 청년이 되었을 때만 해도 삶이 굉장히 참혹했었어요.
‘틀린’ 그림을 그리는 은혜 씨
‘참혹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비참하고 끔찍하다’이다. 장차현실 작가는 그 당시를 회상할 때마다 “참혹하다”고 표현했는데, 딸의 삶을 회고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터. 20대가 된 은혜 씨는 갈 곳을 잃었다. 학교를 마친 많은 발달장애인이 겪는 일이다. 그가 사는 경기 양평군에는 당시 장애인 복지관도 없었고, 당연히 그에게 걸맞은 일자리도 없었다.“발달장애인이 성인이 되면 갈 곳이 없어요. 은혜 씨는 자기 방에 숨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그 방을 동굴이라고 불러요.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면서 퇴행이 오더라고요. 하루는 방문을 열었는데…, 은혜 씨의 눈빛을 잊을 수 없어요.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어요. 그런 소리가 들리는 거 같았어요. ‘나 그동안 열심히 살았어.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라고 얘기하는 소리. 그때 저도 같이 몸이 아팠어요. 일간지에 만화 연재를 그만두고 화실을 차리게 됐죠.”
장차현실 작가는 은혜 씨에게 “월급을 줄 테니 화실 청소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이후 은혜 씨가 동굴 밖으로 나와 화실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3년 2월 23일, 잊을 수 없는 날이 찾아온다.
“하루는 은혜 씨가 4B 연필로 누런 갱지에 뭔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어서 뭔가 하고 봤더니, 여자 모델이 향수병 리본을 풀고 있는 광고 사진을 따라 그리고 있었어요. 그림 선을 보고 굉장히 놀랐어요. 그림을 그리는 내가 이런 재능을 도대체 왜 몰랐을까, 가슴을 쳤죠. 그러면서도 기뻤어요. 제가 잘 가르쳐줄 수 있는 재능을 가져서요.”
장차현실 작가는 홍익대 동양화과를 졸업한 만화가다. 1997년 프리랜서 만화가로 일을 시작해 ‘한겨레’ ‘국민일보’ 등에 여성과 장애를 주제로 한 만화를 그렸다.
동료 작가이자 선배로서 조언도 해주시나요.
처음에는 아이를 가르치듯 알려줬어요. 저는 미대 입시를 경험해서 ‘틀리지 않는 그림’을 잘 그리거든요. 그렇게 은혜 씨를 이끌어봐야지 생각했는데, 그게 무의미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왜 그런가요.
은혜 씨 그림을 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맞는 게 하나도 없어요. 데생도, 비율도, 사물을 보는 방향도 다 틀려요. 그런데 완성된 그림의 완결성은 높아요. 제가 따라갈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거죠. 나중에야 자신의 직관대로 그려서 그렇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런 그림이 갖고 있는 예술적 감흥은 훨씬 크죠.
최근 작품을 보고 ‘니얼굴’에 등장한 캐리커처에서 진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끊임없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요. 변화 방식이 더 자유로운 거죠. 은혜 씨는 2019년부터 국내 유일의 장애인 예술가 레지던시, 잠실창작스튜디오에 들어가게 됐어요. 그러면서 화폭이 늘어나고 그림에 채색을 하기 시작했어요. 변화에 대한 수용 능력이 엄청나더라고요. 그 전에는 주로 B5 용지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흑백 캐리커처만 그렸거든요.
은혜 씨는 2016년부터 경기 양평 문호리 리버마켓에서 캐리커처를 그려주는 부스를 연다. 영화 제목 ‘니얼굴’은 그 부스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곳을 찾는 고객의 사진을 찍고, 캐리커처를 B5 용지에 그려 판매했다. 그가 지금까지 그린 캐리커처는 4000장에 달한다.
영화 ‘니얼굴’ 속 문호리 리버마켓은 유토피아 같았어요.
양평에는 예술가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요. 유명한 작가도 있지만 대부분 서울의 비싼 임대료를 피해 이곳으로 온 사람들이죠. 문호리 리버마켓에 셀러로 참여한 사람들 대부분은 예술가예요. 은혜 씨를 자신과 같은 존엄한 존재로 바라봤고, 그림 그리는 걸 응원해줬죠. 은혜 씨는 그 속에서 ‘나도 저 사람과 같은 셀러야, 예술가야’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그 환경이 자존감을 되찾는 데 도움을 줬죠. 장애에 대해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들 속에 있었다면 은혜 씨가 성장하지 못했을 거예요.
‘장차현실 작가’도 성장하고 싶지 않나요.
전혀 시간이 안 나요. 저도 욕심이 왜 없겠어요. 성공하고 싶죠. 저도 나름 인정받은 작가였기에 계속 그림을 그리지 못한 슬픔이 마음속에 남아 있어요. 그런데 많은 발달장애인 부모들이 그렇듯, 저 또한 은혜 씨의 삶을 옆에서 지지해야 했죠. 제 마음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성인이 된 은혜가 그렇게…, 참혹한 모습이 됐을 때 더 이상 뭘 할 수가 없었어요.
장차현실 작가는 그때서야 은혜 씨 대신 ‘은혜’라는 이름을 불렀다. 그는 눈물을 닦고 말을 이었다.
“모두가 이 세상에 온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은혜가 비장애인들이 생각하는 평범한 삶조차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면 나도 마음이 아파서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처음 은혜의 그림을 발견했을 때 ‘재능이 있어서 다행이다’ 정도가 아니었어요. 마지막 동아줄 같은 거라고 생각했죠.”
부러운 은혜 씨
장차현실 작가가 맡은 또 다른 직책은 전국장애인부모연대 경기 양평지회장. 이곳에 중증 장애인의 일자리를 공공이 책임지는 ‘양평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일터’(공공일자리 일터)가 만들어지는 데 힘썼다. 이 역시 은혜 씨의 영향이다.
“은혜 씨는 그림 그리는 걸 매개 삼아 지역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어요. 이걸 구조적으로 지속 가능하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결국은 정책과 지원, 장애인의 삶을 바라보는 국가의 태도 변화가 필요하더라고요.”
그의 머리카락은 길 새가 없다. 4월 19일, 장애인의 날을 하루 앞두고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 555명은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 체계 구축’을 촉구하며 삭발식을 감행했다.
“발달장애인 문제는 부모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함께 풀어나가야 할 영역이에요. 그래야 가족 구성원들이 개인적인 우울감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어요. 자식과 함께 죽는 부모가 생기지 않게요.”
비장애인이 주변에서 발달장애인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그게 적나라한 현실이죠. 양평 지역만 해도 800명 가까운 발달장애인이 있는데 거리에서 못 봤다는 분들이 많아요. 왜 못 볼까요. 과거의 은혜 씨처럼 갈 데가 없으니 방에 틀어박혀 있거나 시설에 있는 거죠. 공공일자리 일터에 소속된 20명의 노동자는 오전 9시에 도시락을 들고 출근해요.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고 다시 전철을 타고 퇴근하죠. 그럼 많은 사람들 눈에 띄겠죠. ‘나는 일할 권리가 있다’ 피켓을 들고 지역을 돌기도 해요. 저는 그렇게 자꾸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 사람들에게도 정상성의 삶을 누릴 권리가 있구나, 그렇게 살아갈 수 있구나’를 알 수 있도록 말이에요.
‘우리들의 블루스’ 이후에야 급증한 관심에 야속하다는 생각도 하시나요.
큰 관심이 반갑죠. 남편이 은혜 씨가 나오는 유튜브 채널(니얼굴 은혜씨_Caricature Artist Eunhye)을 3년간 운영했거든요. 구독자가 500여 명이었어요. 문을 닫을까 하던 차에 ‘우리들의 블루스’가 방영됐고 지금은 구독자가 5만6000명이에요. 아침마다 댓글을 보면서 눈물 흘리는 게 그간 제 일이었어요. 악플이 이렇게 없을 수 있나요. 세상이 이상해진 게 아닐까 생각해봤어요(웃음). 다운증후군은 외모가 큰 장애물이에요. 아무리 뭔가를 잘해도, 아무리 좋은 교육을 받아도 외모가 주는 거부감 때문에 은혜 씨가 힘들 거라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그랬고요. 과거나 지금이나 은혜 씨는 달라진 게 없어요. 은혜 씨를 바라보는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는 걸 느껴요.
은혜 씨의 향후 계획을 들려주세요.
올해 말까지는 개인전을 포함해 계획된 일이 있어요. 그걸 무사히 잘 진행해야죠. 그런데 은혜 씨는 미래를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절대 아니에요. 그의 힘은 현재를 최선을 다해 사는 거죠. “은혜 씨, 앞으로 뭐 되고 싶어?” 물으면 “꿈을 다 이뤘다”고 대답해요.
부럽습니다.
저도 굉장히 부럽더라고요. 대부분 사람들은 이 일을 해서 돈을 얼마만큼 벌어야지, 집을 사려면 몇 년 뒤까지 이만큼 저축을 해야지, 노년의 삶은 어떡하지? 이런 고민을 하며 괴롭게 살잖아요. 은혜 씨는 오늘 뭘 맛있게 먹을까, 누구를 만날까를 생각해요. 옆에서 보면 은혜 씨는 현재에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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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도균 사진출처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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