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옷도 모델처럼 소화해내는 늘씬한 몸매,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헤어스타일, 서글서글한 눈매 등 MC 정은아(50)의 인상은 TV 속 모습 그대로였다. 카페 문을 열고 환하게 인사하며 들어오는 그에게서 친한 선배를 만난 듯 친근함이 느껴지는 건 (비록 사적인 만남은 없었지만) 방송을 통해 받은 신뢰감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 아닐까.
믿고 보는 MC 정은아가 채널A ‘나는 몸신이다’를 통해 오랜만에 건강 프로그램 진행자로 나섰다. 10년 가까이 진행해온 KBS ‘비타민’ 하차 후 2년 만의 일. ‘나는 몸신이다’는 첫 방송이 나가자마자 많은 화제를 불러 모았다. ‘정은아 파워’가 제대로 통한 덕분이다. 오랫동안 ‘비타민’ 안방마님으로 활약하며 반 건강 전문가가 됐기에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진행을 선보이고 있다. 그에게 딱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다. 그 역시 시청자에게 정보를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첫 회 주제가 ‘스포츠 테이핑의 효능’이었는데, 게스트로 출연했던 조형기 씨 말씀이 방송이 나가고 다음 날 아내분이 운동을 하러 피트니스센터에 갔는데 운동하러 온 사람 중 여러 명이 스포츠 테이프를 감고 있더라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특히 오랜만에 시청자들의 반응을 경험하니까 감회가 새롭더라고요. ‘시청자들에게 한 줄의 정보라도 제대로 제공하자’는 마음가짐으로 임하고 있는데, 이는 곧 제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해요. 더 이상 건강을 자신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니까요(웃음).”
더욱이 게스트 중 엄앵란, 송해 같은 고령에도 여전히 열정적으로 방송에 임하는 이들을 대할 때면 평생을 절제하며 건강하게 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존경심이 든다고 한다. 또한 그는 80대 후반의 시아버지를 생각하며 연세 많은 시청자들을 위해 좀 더 쉽고 명쾌하게 프로그램을 이끌어가려고 애쓴다고. 인터넷에 넘쳐나는 의학 상식 중 오류를 막기 위해 수시로 전문가에게 관련 내용을 묻고 확인하는 것도 그만의 진행 노하우 중 하나. 정은아는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면서부터는 방송 전체를 보려 애쓴다. 나중에 방송을 볼 때, 진행하면서 내가 생각했던 것과 PD의 편집이 일치했을 때 통쾌함을 느낀다”며 웃었다.
선택이 아니었던 공백기, 나를 돌아봤다
그는 지난해부터 인생을 되짚어보는 시간을 갖고 있다. 그 가운데 건강도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한창 일에 빠져 지낼 때는 우물(몸)에 물(에너지)이 영원한 줄 알고 마구 길어 올려 썼다면, 이제는 템포를 조금 늦춰 몸 안에 어느 정도 에너지가 차오르기를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2년은 어쩌면 그에게 꼭 필요한 휴식기였다. 물론 그 선택이 오롯이 정은아 본인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1990년 KBS 아나운서로 입사한 뒤 일을 거절해서 안 하는 경우는 있었어도 일이 없어서 못한 적은 없는데, ‘비타민’을 그만둔 뒤 처음으로 공백기가 찾아왔어요. 그때 남편이 그러더라고요. ‘솔직히 그동안 지나치게 많은 걸 누리지 않았니? 나 같으면 원도 없겠다.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 여행이나 실컷 다니면서 푹 쉬어’ 하고요. 처음에는 으레 하는 위로의 말이려니 했는데 몇 번을 곱씹어 생각하니 참 고마운 말이더라고요. 그때부터 남편 말대로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체 휴가를 즐겼어요(웃음). 그동안 아예 생각 못했던 일도 아니고, 저 역시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걸 알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상황을 받아들였죠.”
한 가지 예상과 달랐던 건, 공백기가 오면 방송과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새 즐거움을 찾겠다고 다짐했던 것과 달리 막상 그 시간이 오자 그는 방송을 위한 또 다른 준비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 입학해 최우수 졸업생상까지 받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공부에 임한 것. 그 과정에서 정은아는 새삼 자신이 얼마나 일을 사랑하는지 깨달았다고 한다.
“20년 넘게 일하면서 방송을 일이라고 생각한 적은 거의 없어요. 가까이는 스태프, 멀게는 시청자 혹은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즐거웠거든요. 그럼에도 간간이 미래를 떠올리면서 ‘일이 재미없어지면 미련 없이 그만두자’라는 다짐을 하곤 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방송이 더 재밌어지니 어째요(웃음). 그렇다고 욕심을 내진 않으려고 해요. 시대 흐름에 맞춰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대학원에 다니는 동안 ‘학생 놀이’에 푹 빠져 지냈다는 정은아는 대학원 동기들과 함께 평소 꼭 해보고 싶었던 독서 모임도 만들었다. 실제로 그의 독서 편력은 유명하다. 사회 초년생 때부터 책 읽기를 즐겨 다양한 분야의 책을 쉼 없이 읽어온 그에게 가까운 사람들은 종종 “아직도 책이 그렇게 좋냐”고 묻는다. 직장 다니는 후배들과 독서 모임을 하면서 그는 요즘 젊은이들의 생존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바쁘게 사는 후배들을 보며 상대적으로 자신은 ‘온실처럼 안전한 곳에서 좋은 시대를 잘 누렸구나’ 하는 감사한 마음마저 들었다고. 현재 그가 주재하는 모임은 독서 토론 말고도 여러 개다. 와인을 마시는 모임, 운동하는 모임, 요리하는 모임, 심지어 보드게임을 함께하는 모임도 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워낙 좋아해요.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는 것도 좋아해서 집으로 지인을 초대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스스로 움직여서 얻는 결과를 좋아해요. 열심히 운동해서 달라지는 몸, 직접 지어 먹는 밥, 열심히 책을 뒤져 궁금증을 해결하는 것 등 다소 아날로그적인 삶이 저와 맞는 것 같아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한 40대의 마지막 생일 파티
하지만 젊은 시절 정은아는 지금처럼 쉽게 다른 이들에게 곁을 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깔끔 떨며 살았다”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들면서 사람이 주는 행복,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서서히 깨닫고 있다. 1997년 프리랜서로 독립한 뒤 연예인 친구를 사귀기에도, 아나운서 부류에 끼기에도 머쓱해 방송 관련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가 거의 없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그에 반해 요즘은 새로운 사람과 만나는 데 한결 여유로워졌다. 3년 전 진행을 맡았던 JTBC ‘여보세요’ 출연진과도 지금까지 모임을 갖고 있는데, 얼마 전 가수 원미연이 “정은아랑 이렇게 오래 만날 줄 몰랐다”고 말해 한바탕 웃은 적이 있다고 한다. “지금의 내가 조금 괜찮은 것 같다”며 화통하게 웃는 그에게서 건강한 자기애가 느껴진다.
지난해 9월에는 40대의 마지막 생일을 맞아 처음으로 각 분야의 지인들을 초대해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고등학교 방송반 모임부터 대학 친구 모임, 스태프 모임, 프로그램 모임 등 각각의 테이블에 올릴 이름표를 작명하면서 무척 흐뭇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받은 생일 선물 중 가장 거창하고 의미 있었던 것 같아요. 작은 레스토랑을 빌려서 손님을 맞았는데, 후배들이 도움을 많이 줬어요. 생일 케이크와 와인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해줬고, 레스토랑 앞에서 발레 파킹을 전담한 후배도 있어요(웃음). 지인들 한 명 한 명을 보면서 ‘그동안 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미리 생일이라고 얘기하지 않아 빈손으로 오게 만들었다며 친구들에게 혼도 났지만(웃음), 그날 모임 덕분에 30년 만에 얼굴 보는 친구들도 있어서 고맙다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 테이블을 돌면서 친구들과 사진도 많이 찍었는데, 지금도 그 사진을 보면 기분이 좋고 웃음이 나요.”
이날을 기점으로 그는 인생의 한 시대를 정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말한다. 함께 기뻐해주는 지인들을 보면서 ‘훗날 내가 세상을 떠날 때도 슬퍼해줄 사람들’이란 생각도 들었다고. 이날 파티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의 남편 역시 비용 협찬(?)을 비롯해 축하와 응원의 말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대학 시절 신입생과 복학생의 만남으로 처음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함께 산 지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선후배 사이를 뛰어넘지 못하는 눈치다. 정은아의 남편은 현재 사업체를 운영 중이다.
“남편은 아직도 제가 어린아이 같은가 봐요(웃음). 제가 잘되면 마치 딸이 상을 받아온 것처럼 기특하게 여기고, 조금 풀이 죽어 있다 싶으면 어떻게든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써요. 대신 방송을 보고 신랄하게 비판도 해요. 며칠 전에는 노출이 좀 있는 의상을 입었다 싶으니까 ‘겨울인데 너무 서늘하지 않니’ 하고 문자가 왔더라고요(웃음). 3수 끝에 KBS에 입사했는데, 아나운서 시험에 떨어질 때마다 다시 원서를 가져다준 사람도 남편이에요. 그동안 제가 한 방송은 물론이고, 신입 때 라디오에 10초 안내 멘트 나가는 것까지 다 녹음해뒀을 정도로 방송인 정은아의 성장 과정을 모두 지켜본 사람이죠. 남편의 외조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오늘 하루를 소중히 보내는 게 행복의 지름길
8년간의 연애 시절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은 ‘개인의 시간’을 인정하며 살고 있다. 서로를 속박하지 않고 때로는 한발씩 떨어져 각자의 삶을 즐기는 식이다. 정은아는 “부부의 삶과 개인의 삶을 구분 짓는 게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아이가 없어서 이 패턴이 오래 유지될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아이를 낳지 않은 건 그의 선택이었기에 후회나 미련은 없다. 물론 한때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도 있었지만, 어느 시점에서 자연스럽게 포기한 것도 정은아 자신이다.
“엄마의 삶은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은 되고 싶어요. 여전히 밥을 굶는 아이들도 많고 부모의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아이들도 많은데, 그런 아이들을 위해 뭔가 도움이 돼야겠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어요.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제가 지닌 재능을 바탕으로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는 스피치 교실이나 방송 관련 교육 프로그램 구상 등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최근 그는 ‘작가란 무엇인가’란 책을 읽고 남은 인생에 대한 새로운 포부를 갖게 됐다. 미국 문학 잡지 ‘파리 리뷰’가 인터뷰한 세계적인 작가 36명의 글쓰기 방법을 서술해놓은 책으로, 정은아는 지금 자신의 나이대에서는 물론 그 이후에도 많은 업적을 남긴 작가들의 이력을 보고 앞으로의 삶이 더욱 흥미로울 수 있다는 기대감이 생겼다고 한다. 흔히들 “인생은 60부터”라고 말하지만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나 갖고 있지 않은가.
“제가 50대가 돼보니 별반 다를 게 없더라고요(웃음). 한 가지 분명한 건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보내는 게 최선이라는 걸 이 나이가 돼서야 비로소 깨닫게 됐다는 거예요. 어린 시절에 ‘40대는, 50대는 이럴 거야’ 하고 단정 지었던 것들이 막상 그 나이가 돼보니 크게 의미 없는 것도 있어요. 보통 우리는 첫 번째 직업에서 절정을 맞고 그때가 지나면 내리막을 걷는다고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아요. 그다음에도 충분히 다양한 인생이 있고, 찾아보면 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거창한 미래를 꿈꾸기보다 지금, 오늘, 하루를 잘 사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오늘도 거울을 보며 ‘주름 하나가 더 늘었네’ 하고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정은아가 인터뷰 말미에 남긴 마지막 말을 기억하면 좋을 듯하다. “50이란 숫자가 익숙하지 않을 뿐, 저는 아직 인생의 반밖에 살지 않았어요!”
■ 디자인·김석임 기자
■ 장소협찬·WP스토어
믿고 보는 MC 정은아가 채널A ‘나는 몸신이다’를 통해 오랜만에 건강 프로그램 진행자로 나섰다. 10년 가까이 진행해온 KBS ‘비타민’ 하차 후 2년 만의 일. ‘나는 몸신이다’는 첫 방송이 나가자마자 많은 화제를 불러 모았다. ‘정은아 파워’가 제대로 통한 덕분이다. 오랫동안 ‘비타민’ 안방마님으로 활약하며 반 건강 전문가가 됐기에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진행을 선보이고 있다. 그에게 딱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다. 그 역시 시청자에게 정보를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첫 회 주제가 ‘스포츠 테이핑의 효능’이었는데, 게스트로 출연했던 조형기 씨 말씀이 방송이 나가고 다음 날 아내분이 운동을 하러 피트니스센터에 갔는데 운동하러 온 사람 중 여러 명이 스포츠 테이프를 감고 있더라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특히 오랜만에 시청자들의 반응을 경험하니까 감회가 새롭더라고요. ‘시청자들에게 한 줄의 정보라도 제대로 제공하자’는 마음가짐으로 임하고 있는데, 이는 곧 제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해요. 더 이상 건강을 자신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니까요(웃음).”
더욱이 게스트 중 엄앵란, 송해 같은 고령에도 여전히 열정적으로 방송에 임하는 이들을 대할 때면 평생을 절제하며 건강하게 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존경심이 든다고 한다. 또한 그는 80대 후반의 시아버지를 생각하며 연세 많은 시청자들을 위해 좀 더 쉽고 명쾌하게 프로그램을 이끌어가려고 애쓴다고. 인터넷에 넘쳐나는 의학 상식 중 오류를 막기 위해 수시로 전문가에게 관련 내용을 묻고 확인하는 것도 그만의 진행 노하우 중 하나. 정은아는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이면서부터는 방송 전체를 보려 애쓴다. 나중에 방송을 볼 때, 진행하면서 내가 생각했던 것과 PD의 편집이 일치했을 때 통쾌함을 느낀다”며 웃었다.
선택이 아니었던 공백기, 나를 돌아봤다
그는 지난해부터 인생을 되짚어보는 시간을 갖고 있다. 그 가운데 건강도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한창 일에 빠져 지낼 때는 우물(몸)에 물(에너지)이 영원한 줄 알고 마구 길어 올려 썼다면, 이제는 템포를 조금 늦춰 몸 안에 어느 정도 에너지가 차오르기를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2년은 어쩌면 그에게 꼭 필요한 휴식기였다. 물론 그 선택이 오롯이 정은아 본인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1990년 KBS 아나운서로 입사한 뒤 일을 거절해서 안 하는 경우는 있었어도 일이 없어서 못한 적은 없는데, ‘비타민’을 그만둔 뒤 처음으로 공백기가 찾아왔어요. 그때 남편이 그러더라고요. ‘솔직히 그동안 지나치게 많은 걸 누리지 않았니? 나 같으면 원도 없겠다.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 여행이나 실컷 다니면서 푹 쉬어’ 하고요. 처음에는 으레 하는 위로의 말이려니 했는데 몇 번을 곱씹어 생각하니 참 고마운 말이더라고요. 그때부터 남편 말대로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체 휴가를 즐겼어요(웃음). 그동안 아예 생각 못했던 일도 아니고, 저 역시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걸 알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상황을 받아들였죠.”
한 가지 예상과 달랐던 건, 공백기가 오면 방송과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새 즐거움을 찾겠다고 다짐했던 것과 달리 막상 그 시간이 오자 그는 방송을 위한 또 다른 준비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 입학해 최우수 졸업생상까지 받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공부에 임한 것. 그 과정에서 정은아는 새삼 자신이 얼마나 일을 사랑하는지 깨달았다고 한다.
“20년 넘게 일하면서 방송을 일이라고 생각한 적은 거의 없어요. 가까이는 스태프, 멀게는 시청자 혹은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즐거웠거든요. 그럼에도 간간이 미래를 떠올리면서 ‘일이 재미없어지면 미련 없이 그만두자’라는 다짐을 하곤 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방송이 더 재밌어지니 어째요(웃음). 그렇다고 욕심을 내진 않으려고 해요. 시대 흐름에 맞춰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대학원에 다니는 동안 ‘학생 놀이’에 푹 빠져 지냈다는 정은아는 대학원 동기들과 함께 평소 꼭 해보고 싶었던 독서 모임도 만들었다. 실제로 그의 독서 편력은 유명하다. 사회 초년생 때부터 책 읽기를 즐겨 다양한 분야의 책을 쉼 없이 읽어온 그에게 가까운 사람들은 종종 “아직도 책이 그렇게 좋냐”고 묻는다. 직장 다니는 후배들과 독서 모임을 하면서 그는 요즘 젊은이들의 생존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바쁘게 사는 후배들을 보며 상대적으로 자신은 ‘온실처럼 안전한 곳에서 좋은 시대를 잘 누렸구나’ 하는 감사한 마음마저 들었다고. 현재 그가 주재하는 모임은 독서 토론 말고도 여러 개다. 와인을 마시는 모임, 운동하는 모임, 요리하는 모임, 심지어 보드게임을 함께하는 모임도 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워낙 좋아해요.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는 것도 좋아해서 집으로 지인을 초대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스스로 움직여서 얻는 결과를 좋아해요. 열심히 운동해서 달라지는 몸, 직접 지어 먹는 밥, 열심히 책을 뒤져 궁금증을 해결하는 것 등 다소 아날로그적인 삶이 저와 맞는 것 같아요.”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한 40대의 마지막 생일 파티
하지만 젊은 시절 정은아는 지금처럼 쉽게 다른 이들에게 곁을 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깔끔 떨며 살았다”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들면서 사람이 주는 행복,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서서히 깨닫고 있다. 1997년 프리랜서로 독립한 뒤 연예인 친구를 사귀기에도, 아나운서 부류에 끼기에도 머쓱해 방송 관련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가 거의 없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그에 반해 요즘은 새로운 사람과 만나는 데 한결 여유로워졌다. 3년 전 진행을 맡았던 JTBC ‘여보세요’ 출연진과도 지금까지 모임을 갖고 있는데, 얼마 전 가수 원미연이 “정은아랑 이렇게 오래 만날 줄 몰랐다”고 말해 한바탕 웃은 적이 있다고 한다. “지금의 내가 조금 괜찮은 것 같다”며 화통하게 웃는 그에게서 건강한 자기애가 느껴진다.
지난해 9월에는 40대의 마지막 생일을 맞아 처음으로 각 분야의 지인들을 초대해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고등학교 방송반 모임부터 대학 친구 모임, 스태프 모임, 프로그램 모임 등 각각의 테이블에 올릴 이름표를 작명하면서 무척 흐뭇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받은 생일 선물 중 가장 거창하고 의미 있었던 것 같아요. 작은 레스토랑을 빌려서 손님을 맞았는데, 후배들이 도움을 많이 줬어요. 생일 케이크와 와인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해줬고, 레스토랑 앞에서 발레 파킹을 전담한 후배도 있어요(웃음). 지인들 한 명 한 명을 보면서 ‘그동안 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미리 생일이라고 얘기하지 않아 빈손으로 오게 만들었다며 친구들에게 혼도 났지만(웃음), 그날 모임 덕분에 30년 만에 얼굴 보는 친구들도 있어서 고맙다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 테이블을 돌면서 친구들과 사진도 많이 찍었는데, 지금도 그 사진을 보면 기분이 좋고 웃음이 나요.”
이날을 기점으로 그는 인생의 한 시대를 정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말한다. 함께 기뻐해주는 지인들을 보면서 ‘훗날 내가 세상을 떠날 때도 슬퍼해줄 사람들’이란 생각도 들었다고. 이날 파티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의 남편 역시 비용 협찬(?)을 비롯해 축하와 응원의 말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대학 시절 신입생과 복학생의 만남으로 처음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함께 산 지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선후배 사이를 뛰어넘지 못하는 눈치다. 정은아의 남편은 현재 사업체를 운영 중이다.
“남편은 아직도 제가 어린아이 같은가 봐요(웃음). 제가 잘되면 마치 딸이 상을 받아온 것처럼 기특하게 여기고, 조금 풀이 죽어 있다 싶으면 어떻게든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써요. 대신 방송을 보고 신랄하게 비판도 해요. 며칠 전에는 노출이 좀 있는 의상을 입었다 싶으니까 ‘겨울인데 너무 서늘하지 않니’ 하고 문자가 왔더라고요(웃음). 3수 끝에 KBS에 입사했는데, 아나운서 시험에 떨어질 때마다 다시 원서를 가져다준 사람도 남편이에요. 그동안 제가 한 방송은 물론이고, 신입 때 라디오에 10초 안내 멘트 나가는 것까지 다 녹음해뒀을 정도로 방송인 정은아의 성장 과정을 모두 지켜본 사람이죠. 남편의 외조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오늘 하루를 소중히 보내는 게 행복의 지름길
8년간의 연애 시절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은 ‘개인의 시간’을 인정하며 살고 있다. 서로를 속박하지 않고 때로는 한발씩 떨어져 각자의 삶을 즐기는 식이다. 정은아는 “부부의 삶과 개인의 삶을 구분 짓는 게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아이가 없어서 이 패턴이 오래 유지될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아이를 낳지 않은 건 그의 선택이었기에 후회나 미련은 없다. 물론 한때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도 있었지만, 어느 시점에서 자연스럽게 포기한 것도 정은아 자신이다.
“엄마의 삶은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은 되고 싶어요. 여전히 밥을 굶는 아이들도 많고 부모의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아이들도 많은데, 그런 아이들을 위해 뭔가 도움이 돼야겠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어요.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제가 지닌 재능을 바탕으로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는 스피치 교실이나 방송 관련 교육 프로그램 구상 등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최근 그는 ‘작가란 무엇인가’란 책을 읽고 남은 인생에 대한 새로운 포부를 갖게 됐다. 미국 문학 잡지 ‘파리 리뷰’가 인터뷰한 세계적인 작가 36명의 글쓰기 방법을 서술해놓은 책으로, 정은아는 지금 자신의 나이대에서는 물론 그 이후에도 많은 업적을 남긴 작가들의 이력을 보고 앞으로의 삶이 더욱 흥미로울 수 있다는 기대감이 생겼다고 한다. 흔히들 “인생은 60부터”라고 말하지만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나 갖고 있지 않은가.
“제가 50대가 돼보니 별반 다를 게 없더라고요(웃음). 한 가지 분명한 건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보내는 게 최선이라는 걸 이 나이가 돼서야 비로소 깨닫게 됐다는 거예요. 어린 시절에 ‘40대는, 50대는 이럴 거야’ 하고 단정 지었던 것들이 막상 그 나이가 돼보니 크게 의미 없는 것도 있어요. 보통 우리는 첫 번째 직업에서 절정을 맞고 그때가 지나면 내리막을 걷는다고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아요. 그다음에도 충분히 다양한 인생이 있고, 찾아보면 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거창한 미래를 꿈꾸기보다 지금, 오늘, 하루를 잘 사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오늘도 거울을 보며 ‘주름 하나가 더 늘었네’ 하고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정은아가 인터뷰 말미에 남긴 마지막 말을 기억하면 좋을 듯하다. “50이란 숫자가 익숙하지 않을 뿐, 저는 아직 인생의 반밖에 살지 않았어요!”
■ 디자인·김석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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