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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With specialist | 아이 받는 여의사의 진료실 토크

산부인과 의사가 ‘결혼 택일’까지 하는 이유

사진제공·REX

2013. 02. 05

산부인과에서 환자들과 만난 지 올해로 꼭 20년이 됐다. 20년 동안 강산보다 더 많이 변한 것은 가치관, 특히 결혼 전 성과 임신에 관한 생각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는 ‘혼전 임신’이란 단어는 입에 담기도 어려웠는데 요즘은 드라마에서조차 “혼전 임신은 혼수”라는 말을 쉽게 내뱉으니 말이다.

산부인과 의사가 ‘결혼 택일’까지 하는 이유


의사 초년 시절 미혼인 환자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는 일이 정말 ‘대략 난감’이었다. “음… 초음파상에 뭐가 보이는데… 모양이 아기집 같기도…” 하며 주저주저 조심조심 말을 꺼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 여기 보이는 까만 동그라미 있죠? 그게 임신낭, 즉 아기집이 생긴 겁니다. 임신이에요. 축하합니다!” 하고 자신 있게 축하 멘트를 날려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20년 전에는 미혼 환자가 자궁외임신(수정란이 자궁 내막이 아닌 자궁 밖에 착상해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하는 이상임신의 하나. 심한 복통 및 복강 내 다량 출혈로 응급수술을 받지 않으면 사망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으로 응급수술을 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의사인 내가 더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미혼인 딸이 임신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부모 또는 가족에게 어떻게 수술 승낙서를 받아야 하나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나 요즘은 남자 친구나 약혼자가 아주 쿨하게 보호자를 자처하며 나서고, 직접 예비 장모에게 연락까지 한다.
혼전 임신이 환영받는 분위기가 된 것은 정말 다행이다. 나는 미혼 환자에게 일단 결혼 예정인지부터 묻는다. 대부분 아직 날을 잡기 전이라 이럴 때는 의사가 임신 진단, 분만예정일 확정과 동시에 언제쯤 결혼식을 올리면 좋은지 ‘택일’까지 해준다. 왜냐하면 임신 후 대개 12주까지 입덧으로 고생을 하는데, 이 기간에 결혼식 날을 잡으면 가뜩이나 급히 식을 올리느라 준비할 것도 많을 텐데 입덧까지 겹쳐 신부가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결혼식 날을 임신 16주경에 잡도록 권한다. 이때는 티 나게 배가 부르지도 않고, 입덧 후 한 달 정도 결혼 준비를 할 시간을 벌 수 있다.
주치의의 할 일은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임신 중 신혼여행 상담도 해야 한다. 요즘은 임신 중 해외로 신혼여행을 떠나는 신부들을 위해 비행기를 타도 괜찮다는 영문진단서 발급이 크게 늘었다. 종종 임신을 하고도 유럽 배낭여행이나 미국 일주를 하겠다고 떼를 쓰는 신부가 있다. 평생 꿈이었다고, 반드시 가야 한다고, 정말 가고 싶다고 아무리 떼를 써도 어쩌겠나. 입덧도 입덧이지만 장시간 비행기와 차를 타면 그 진동이 자궁으로 전달돼 태아의 건강에 좋지 않다고 잘 설득하는 수밖에 없다.

새 생명의 탄생은 어떤 경우든 축복받아야
요즘에는 혼전 임신이 워낙 많아서 웨딩드레스를 가봉할 때 직원이 슬쩍 물어본단다. 신부들이 결혼식 전 혹독하게 다이어트를 해서 대부분 결혼식 날에는 가봉 때보다 살이 빠져 오지만, 임신한 경우 그와 반대 상황이니 미리 여분의 시접을 준비해야 할지 고민스러워서라고 한다.
실제로 3년 전 제주도 여행 중 우연히 혼전 임신 커플을 만났다. 호텔 식당 옆자리에 앉은 커플은 딱 봐도 신혼부부였다. 폐백을 올린 뒤 곧바로 비행기를 탔는지 신부는 올림머리에 속눈썹도 떼지 못한 상태였다. 이들의 대화가 귓전을 울린다.
“OO야, 이거 한 잔 하고 싶지? 캬~~~ 맛이 죽이는데.”
“오빠, 나 술 마시면 안 되는데 혼자서 기분 낼 거야? 그럼 나도 열 받아서 확 마셔버릴 거야~.”
제주 현지 택시 기사는 이런 세태를 더 흥미롭게 표현한다.
“예전엔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왔는데 요즘은 효도관광이죠. 다들 배 속에 아이가 있으니까.”
어쨌든 새 생명의 잉태가 푸대접받지 않고 혼전 임신도 당당히 알릴 수 있다는 게 다행이다. 가끔 진료실에서 미혼모가 “선생님, 아기 지울 수 있나요?” 하고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임신이 뭐 종이에 연필로 쓴 글씨인가요? 지우개로 지워도 흔적이 남는데 하물며 생명이에요.”
임신은 마음대로 지울 수도 없고 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혼전 임신, 비록 처음 확인한 순간은 당황스럽겠지만 양가에 말씀드리고 일주일만 마음고생을 하면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결혼이 진행된다. 그러니까 첫 일주일만 무안하면 그뒤로는 세상에 둘도 없는 당신의 아기가 생긴다. 가족 모두가 기뻐할 일이니 우리 모두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자. 그러면 한 생명이 빛을 본다. 그 생명이 온 가족에 한줄기 빛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산부인과 의사가 ‘결혼 택일’까지 하는 이유


이용주 아란태산부인과 소아과의원 원장은…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산부인과 전문의 과정을 마친 후 15년째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고 있는 직장맘이다. 지금은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서 밤낮으로 새 생명을 받고 있다. 또한 인터넷, SNS 및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 등을 통해 올바른 산부인과 지식 알리기에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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