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성종이 내시 처선과 옷을 바꿔 입고 소화를 만나러 가는 동안 처선이 성종 노릇을 대신 한다.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전인화)는 이 사건의 배후로 성종을 가장 가까이서 보위하는 판내시부사 조치겸(전광렬)을 지목하고 그를 쏘아본다. 인수대비와 조치겸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흐르자 우연히 촬영장을 찾았던 구경꾼들도 숨을 죽이고 이 광경을 지켜본다. 감독이 “컷”을 외치자 일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여기저기서 “휴~” 하는 탄식이 터져나왔다.
“대본 보는 순간 저로 인해 내시에 대한 기존 이미지 확 바뀔 수 있겠다는 생각 들었어요”
지난 9월 중순 경기도 수원 화성에서 진행된 SBS 사극 ‘왕과 나’ 촬영의 한 장면이다. ‘왕과 나’는 조선시대 성종과 폐비 윤씨, 내시 처선 등 세 인물의 비극적 사랑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져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역사적 인물들을 소재로 한 이 드라마가 방영되자마자 20%를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화제를 모은 데는 내시부 수장 조치겸 역을 맡은 탤런트 전광렬(47)의 힘이 크다. 조치겸은 세조를 왕위에 즉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권력을 차지한 후 이를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 나약한 지금까지의 내시들과 달리 묵직한 목소리에 부채 하나로 칼을 든 무사들과 싸워 이길 수 있을 만큼 탄탄한 무술 실력을 갖추었다. 남근이 잘려진 데 대한 보상심리로 여러 명의 처첩을 거느릴 만큼 탐욕적이기도 하다. 전광렬은 특유의 카리스마로 이런 조치겸 역을 완벽에 가깝게 소화해내고 있다. MBC에서 같은 시간대에 방영되고 있는‘라이벌’드라마 ‘이산’의 메가폰을 잡은 이병훈 PD가 그의 연기력을 칭찬할 정도.
▼ 이병훈 PD한테 칭찬받은 소감이 어떤가요.
“이병훈 PD와는 드라마 ‘허준’을 하면서 알게 됐는데 제가 존경하는 분께 그런 소리를 들으니까 기분이 더 좋은데요(웃음). 요즘 사극 드라마가 많다 보니 은연중에 경쟁 구도가 형성되는 것 같은데 연기자들은 각자 자기 드라마에 최선을 다할 뿐, 다른 드라마는 별로 의식을 안 해요. 그래야 좋은 드라마를 만들 수 있고요.”
▼ 주로 왕이나 주인공 역할을 맡아왔는데, 내시 역을 제안받았을 때 망설임은 없었나요.
“대본을 받고 읽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김재형 PD가 직접 찾아와 ‘같이 해보자’고 하시더라고요. 그제야 대본을 찾아 읽기 시작했는데 몇 장 넘기지 않아 전율을 느끼고 출연을 결심했어요. 잘하면 저로 인해 내시에 대한 기존 이미지가 확 바뀔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 ‘왕과 나’의 내시는 어떤 면에서 기존의 내시와 다른가요.
“내시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이 별로 없어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왕과 왕실을 가장 가까이서 보위하는 사람들이었던 만큼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권력을 쥐고 있었으리라 짐작되는데 조치겸은 그런 권력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려고 했던 인물이죠. 왕 이상의 카리스마를 지녔고요. 그런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 목소리를 일부러 굵고 낮게 내고 있어요. 지금은 과장되다 싶을 정도로 강하게 배역을 설정하고 있는데 나름대로는 계산을 한 거예요. 극 후반으로 갈수록 조치겸은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는데 지금 캐릭터가 강할수록 후반의 몰락한 조치겸의 모습이 더욱 초라하게 보일 테니까요.”
▼ 악역인데 시청자들의 반응이 걱정되지는 않나요.
“연기하다 보면 완전히 그 사람에게 몰입되기 때문에 저 자신은 모르겠는데 보는 사람들은 악역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어떤 사람을 ‘악인’이라고 쉽게 재단할 수 있을까요. 누구나 어느 정도 야누스적인 면을 갖고 있잖아요. 조치겸도 자기 아랫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부드럽고 좋은 사람이죠.”
오랜 무명생활로 얻은 인내와 성실이 지금의 연기를 하는 힘
최근작 ‘주몽’부터 ‘사랑공감’ ‘영웅시대’ ‘허준’, 10년 전 ‘청춘의 덫’에 이르기까지 그가 출연한 드라마는 거의 모두 높은 시청률을 자랑했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순탄한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니라고 한다. 지난 80년, 스무 살 이른 나이로 TBC 공채 탤런트로 연기와 인연을 맺은 그의 연기 인생은 93년 ‘폭풍의 계절’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지금이야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데뷔 초에는 열정이나 노력에 비해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것. 하지만 전광렬은 오히려 오랜 무명생활을 통해 배우로서의 인내와 성실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 처음 어떻게 연기를 시작하게 됐나요.
“말론 브랜도, 제임스 딘이 주연한 영화를 보고 그들의 야성미에 반해 연기에 뛰어들었어요. 그간 드라마 속 캐릭터만 보고 저를 부드러운 남자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은데 사실은 제임스 딘처럼 터프한 면도 있어요(웃음). 언젠가는 연기를 통해 제 안에 내재돼 있는 야성미를 보여드릴 때가 오겠죠.”
▼ 무명 시절이 꽤 길었다고 하던데요.
“데뷔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드라마 주연으로 발탁되기도 했지만 별로 반응이 없었어요. 부끄럽고 창피해 나중에는 대인기피증까지 생길 정도였죠. 한동안은 경기도 산골의 한 암자에서 폐인처럼 지내던 적도 있어요. 그러다가 문득 ‘뱃사공이 풍파가 닥칠 게 겁이 나 바다에 안 나갈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들어 암자에서 내려와 다시 연기를 시작했죠. 그때의 절망과 분노, 외로움이 지금 제 연기의 에너지가 되고 있어요.”
▼ 촬영하는 걸 보니 NG가 거의 없던데요.
“드라마 출연을 결심하기까지가 어렵지, 일단 결심을 하면 인물분석부터 배경지식 공부까지 준비를 철저히 하는 편이에요. 대사도 완벽하게 외우고요. 토씨 하나 틀리는 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작가가 고심하고 계산해서 쓴 만큼 그걸 존중해주는 게 연기자의 기본자세라고 생각하거든요. 대본에 충실하되 목소리 톤과 억양, 호흡을 조절해 드라마에 맞게 전달력을 높이는 게 배우의 몫이고 연기의 맛이죠.”
▼ 연기를 하면서 가장 희열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제가 열심히 해서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내고 그게 시청자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을 때, 제가 진화하고 있다고 느낄 때 희열을 느껴요.”
▼ 연기 철학이 있다면?
“열정이죠. 기쁨도, 행복도 모두 열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요.”
“쉬는 동안 이탈리아 요리에 푹 빠져 가족들에게 만들어주곤 했어요”
최근 영국 유학 시절 경험을 담은 ‘리얼 런던’을 발간해 화제를 모은 아내 박수진씨, 아들 동혁군과 함께 한 전광렬.
전광렬에게는 요즘 ‘왕과 나’ 흥행 말고도 또 하나 기쁜 일이 있다. 지난 2년간 영국 런던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아내 박수진씨(38·스타일리스트)가 최근 런던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인터뷰 형식으로 담아낸 책 ‘리얼 런던’을 펴냈는데 이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것. 박씨는 책을 낸 후 인터뷰에서 “(유학을 갈)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남편의 배려 덕분에 용기를 얻어 다녀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씨가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장인 장모가 그의 집에서 함께 지내며 아들을 보살폈는데 전광렬은 틈나는 대로 아이와 함께 런던에 가거나, 화상전화를 하며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 부인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는데 소감이 어떤가요.
“책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것도 기분 좋지만 그보다 아내가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아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 흐뭇해요.”
▼ 부인은 전광렬씨가 자상한 남편이자 아빠라고 하던데, 정말 그런가요.
“아내가 그러던가요? 사실은 평범해요(웃음). 드라마 촬영이 없을 땐 아이와 잘 놀아주고 집안일도 조금씩 돕는 편이에요. ‘왕과 나’ 촬영 전에는 이탈리아 요리에 푹 빠져 가족들에게 자주 만들어주곤 했죠. 아들 녀석은 정이 많고 심성이 여린 편이라 자주 밖에 데리고 나가 운동도 가르치면서 강하게 키우려고 노력 중이에요.”
▼ 본인이 출연하는 드라마를 아들과 함께 보는 편인가요.
“제가 같이 보자고 하기 전에 아들 녀석이 시간대가 되면 채널을 그쪽으로 돌리더라고요. 이번 드라마의 경우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작품인 만큼 자연스럽게 역사공부가 될 것 같아 억지로 못 보게 하지는 않아요. 물론 100% 사실과 같을 수는 없으니까 드라마적인 요소가 첨가된 부분이 있을 때는 ‘사실은 이런데…’라고 설명을 덧붙여주죠.”
▼ 평소 체력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연기를 하지 않을 때는 운동을 하면서 관리해요. 하지만 제가 건강한 가장 큰 비결은 이 일을 즐기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일할 때 엔도르핀이 솟거든요.”
▼ 앞으로 희망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인간적으로, 또 연기자로서 계속 진화하는 사람이고 싶어요. 나이 들어도 계속 촬영장에 있을 수 있도록 노력할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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