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TV에 등장한 남자. 뚱뚱한 몸집에 어리숙한 몸짓으로 주말극 ‘솔약국집 아들들’에 출연한 조진웅(34)은 “연기를 곧 잘 하는 신인”이라는 호평을 듣더니 ‘열혈장사꾼’ ‘추노’ 등에 연이어 출연하며 거침없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직접 만난 그는 드라마에서보다 더 거구였다.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이하 ‘신불사’)에서의 악역을 위해서 일부러 몸집을 키운 탓이다.
“송일국 선배가 살을 많이 빼서, 그와 대비되는 역할인 제가 시각적인 면에서 차이를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 대본 연습을 하는 자리에서 선배 연기자들의 카리스마를 보고 안일한 마음으로 참여해선 안 되겠다고 느꼈거든요. 그렇게 몸을 불리고 나니 의상 협찬도 안돼요. 제 돈으로 일일이 맞춰 입고 있죠. 그래도 어떡하겠어요. ‘신불사’의 장호는 거구가 맞다고 생각했고, 시청자에게도 시각적 재미를 주고 싶었거든요.”
‘신불사’가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이다 보니 조진웅이 맡은 장호라는 역할도 전형적이고 단순한 캐릭터다. 그는 그 단순함 속에서 세세한 부분을 표현해내는 게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고 한다. 생방송처럼 진행되는 촬영 스케줄 속에서 다른 배우들과 연기를 조율할 틈도 없지만 틈틈이 “장호라면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을까?”라며 연출자와 함께 주거니받거니 캐릭터의 맛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캐릭터는 한시도 떼놓지 못하는 내 살, 내 세포
조진웅은 촬영 내내 캐릭터의 마음, 상황을 염두에 두고 산다. 그것이 배우로서 굉장히 가치 있는 작업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는 ‘추노’ 촬영 때도 고스란히 적용됐다. 조진웅과의 인터뷰 당일, ‘추노’에서 그가 맡은 한섬은 죽음을 맞이했다. 특히 죽음의 순간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랑, 궁녀 필순과의 재회를 회상하는 장면이 화제가 됐다. 조진웅은 죽음을 연기할 때의 순간을 잊지 못하는 듯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쉽고 서러웠어요. 대업을 위해 더 나아가야 하는데 죽은 거잖아요. 내 마음이 이런데 당사자인 한섬은 얼마나 원통할까 싶었죠. 궁녀 역을 맡은 사현진씨에게 너무 감사해요. 극중 짧게 보여준 멜로지만 애잔한 감정을 위해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교감하며 많은 걸 배웠어요.”
조진웅은 “나는 행운아다”라고 말한다. ‘추노’의 한섬으로 살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이라는 것. 그를 대중에게 확실히 각인시킨 ‘솔약국집 아들들’의 브루터스 리 역시 잊지 못할 캐릭터다. 공중파 연기활동의 시작점이었고, 열심히 노력했기에 그만큼 뇌리에 깊게 남아있다.
“원래는 셋째 아들 역할로 오디션을 봤어요. 그런데 작가 선생님이 절 보자마자 딱 브루터스 역이라고 찜하신 거죠. 사실 저도 기자인 셋째 아들은 제 옷이 아니라는 생각은 했지만 네 아들 중 한명도 아니고 옆집 아저씨라니 서운하긴 했어요. 하지만 시놉시스 자체가 재밌고 따뜻했어요. 그런데 저는 외국에서 산 적도 없고, 브루터스가 살았다는 미국은 가본 적도 없어서 지인의 친구들까지 동원해 어설픈 한국말을 배우러 다녔어요. 배우가 사투리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면 그 지방 사람들은 ‘어, 그게 아닌데’라고 알잖아요. 사소한 말투 때문에 극에 몰입도가 떨어지면 그건 배우 책임이에요. 물론 드라마다 보니 좀 과장시킨 면도 있지만 최대한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했죠.”
첫 공중파 작품인데다 현장에 가면 바로 감정을 잡는 스타일이 아닌 탓에 그는 몇 달간을 브루터스의 감정으로 살았다. 여기서 그의 순수함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 하나. 작가로부터 극중 아내가 죽는다는 말을 전해들은 조진웅은 “와이프가 죽어요? 그럼 이 사람은 어떻게 살아요?”라고 반문했다고. “그래도 살아야지” 하고 답한 작가의 말에 조진웅은 아내를 떠나보내는 철없는 남자를 연기하기 위해 몇 달 전부터 계속 그 상황을 고민했다고 한다.
국문학도 꿈꾸던 소년, 연극의 늪에 빠지다
“한시라도 캐릭터를 떼놓지 않고 있어야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할 때 캐릭터가 내 살 같고, 세포 같다”는 조진웅. 이토록 열정적인 탤런트이건만 한때는 영화나 드라마는 그의 인생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연극에 대한 갈망이 강했던 탓이다. 그런데 애초부터 연극배우가 꿈이었던 것도 아니라고 한다.
“사실 글을 쓰고 싶었어요. 고교 선생님도 제 글을 보시고는 꼭 작가가 되라고 하셨을 정도였죠. 작가가 되고 싶어 희곡을 많이 읽었고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연극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겨 부산에 있는 경성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죠. 나중에 아버지가 서울에서 내려오셨다가 ‘연극영화과’라는 말을 듣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올라가버리셨어요. ‘연기 선배들이 간 길을 따라서 올라가다 보면 치이고 치여 지칠 수도 있는데 다른 일을 고려해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말씀하신 적도 있고요. 그래도 제 뜻을 굽히지 않았어요.”
조진웅과 아버지의 관계는 미묘하다. 그의 본명은 조원준. 조진웅은 바로 아버지의 이름이다. 그는 2004년 자신의 첫 영화 출연작인 ‘말죽거리 잔혹사’를 촬영하면서 연기의 또 다른 시작점이라는 생각에 무언가 기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연기생활의 새로운 첫발을 디뎌야겠다는 뜻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빌렸다. 연기 잘하는 배우의 기준이 대배우 말론 브랜도인 탓에 아들의 연기가 늘 못 미더웠던 아버지는 조진웅에게 큰 자극이었다.
“대학 때 제 연극을 보러 오신 아버지가 배우 4명, 스태프 24명에게 일일이 장미꽃을 전해주시면서 ‘잘 봤다. 너무 좋은 작품이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저에게만 꽃을 안 주시는 거예요. ‘전 왜 안줘요?’라고 했더니 ‘네가 더 잘 알 것 아니냐?’라고 하시더라고요. 이를 악물고 더 열심히 연기했죠. 요즘도 주무시느라 저 출연하는 드라마를 거의 못 본다고는 하시는데 가족모임 때 말씀하시는 거 들어보면 보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예전엔 안 그러셨는데 요즘 제가 TV에 자주 모습을 보이니까 슬슬 ‘네가 내 이름을 쓰고 있다는 걸 인식해줬으면 좋겠어~’이러세요. 아직 이름에 대한 개런티를 드리기는 좀…(웃음).”
결혼도 미루자는 든든한 지원군, 여자친구
지금이야 기대 이상의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조진웅을 찾는 이들이 많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공중파 진출은 너무나도 높은 벽이었다. 그는 “못생기고 덩치 크다는 이유로 캐스팅이 잘 안 됐다”며 “오디션에 합격하고, 대본 연습에서 배우들과 인사까지 하고 나서도 잘린 적이 여러 번이라 한동안 여의도라는 말만 들어도 싫었던 때가 있다”고 말했다. 조목조목 잘생긴 얼굴인데 살을 뺄 생각은 하지 않은 걸까. 이에 대해 조진웅은 “시나리오를 볼 때 피가 끓는 작품이 있다”며 “만약 피가 끓는 작품에 내가 욕심내는 배역이 말라깽이라면 썰어서라도 살을 뺄 것”이라고 굳은 의지를 보인다. 외모가 아닌 연기로 승부하겠다는 그의 고집이 단번에 드러나는 말이다.
오직 연기에 올인하는 그에겐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 바로 6세 연하 여자친구다. 부산에서 연극을 하던 시절 고등학생이던 여자친구가 연극을 보러 오면서 알게 됐고 그렇게 10년을 알고 지내다가 연인이 됐다. 곁에서 늘 그를 지켜본 여자친구는 그의 연기에 대해 누구보다 냉정한 평가를 해준다고.
“모니터링을 할 때는 굉장히 냉정해요. ‘저 장면 찍으실 때 좀 바쁘셨어요? 좀 더 집중을 하셔야겠어요’이런 식이죠. 차분하지만 무서워요. 그러면 저는 ‘이런 장면은 괜찮지 않았냐’고 물으면서 엎드려 절 받기로 위로를 받죠. 나이는 어리지만 어른스럽고 제 일을 잘 이해해줘요. 결혼을 서두르지 말자고 한 것도 여자친구예요. 유치원 교사인데 ‘요즘 어머니들 보면 30대 중후반도 많더라’면서 결혼보다는 일에 몰두하라고 힘을 주죠.”
자신을 이해해주고 더 잘하라며 채찍질해주는 여자친구 덕에 그는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꿈을 향해 전진할 생각이다.
지금 그가 바라는 건 세 가지. 첫째는 본래 국문학도를 꿈 꿨던 만큼 멋진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것이다. 작가 친구들에게 자신의 습작을 보여줄 때면 “너는 배우인 게 다행이다”라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그가 보기엔 세상에 다시없을 재밌는 작품들이다. 개인적으로 코미디를 좋아한다는 그는 언젠가 시나리오 작가로서 멋진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두 번째 바람은 스포츠 영화에 출연하는 것이다. 야구광인 조진웅은 야구선수와 악수를 하다 그의 손에 박힌 굳은살을 보고 왈칵 눈물을 쏟은 적이 있다. 그는 “맞잡은 손으로 느껴지는 굳은살이 정말 존경스러웠다.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에서 이범수 선배가 불가능할 것만 같던 왼손 투수를 해냈는데 그런 경이로운 캐릭터를 나도 연기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마지막 바람은 예술학교를 세우는 것. 지금은 어불성설처럼 들리겠지만 언젠가는 본인의 손으로 자유롭고 열정적인 예술가 지망생을 키워내고 싶다고.
조진웅은 순수하다. 그래서 캐릭터를 더 잘 살려내는지도 모른다. 그는 마음에 끌리는 역이 있다면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몇 번이고 오디션을 본다. 그 열정이 식지 않는 이상 조진웅은 앞으로도 무한히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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