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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뜻밖의 도전

첫 장편소설 발표하며 소설가로 변신한 ‘서른, 잔치는 끝났다’ 시인 최영미

■ 기획·송화선 기자 ■ 글·백경선‘자유기고가’ ■ 사진·조영철 기자 ■ 장소협찬·진선북카페

입력 2005.06.08 18:35:00

‘서른, 잔치는 끝났다’ 시인 최영미씨가 첫 장편소설 ‘흉터와 무늬’를 펴내며 소설가로 변신했다.
‘흉터와 무늬’를 통해 ‘고통과, 그 고통의 극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최영미씨를 만나 첫 시집을 내고 겪었던 마음고생과 소설을 쓰게 된 사연,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들어보았다.
첫 장편소설 발표하며 소설가로 변신한  ‘서른, 잔치는 끝났다’ 시인 최영미

지난94년 느닷없이 문단에 나타난 최영미씨(44)는 “서른, 잔치는 끝났다”고 선언하고 “입 안 가득 고여오는 마지막 섹스의 추억”을 읊조리며 우리 사회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그의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첫해에만 50만부 이상의 판매기록을 세우며 당시 출판 시장을 뒤흔들어놓았다. 최영미는 이후 두 번째 시집 ‘꿈의 페달을 밟고’와 3권의 산문집, 2권의 번역서를 냈지만, 11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서른, 잔치…’의 시인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런 그가 40대 중반이 되어 또 다른 잔치를 열었다. 최근 첫 장편소설 ‘흉터와 무늬’(랜덤하우스중앙)를 펴낸 것. ‘흉터와 무늬’가 출간되고 며칠 뒤 삼청동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어느 기사에선가 최영미에 대해 ‘내성적이고 낯을 가리는 편’이라고 묘사한 것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묻지 않는 이야기까지 술술 풀어놓았다. 이제 정말 ‘이야기꾼’이 된 것일까.
그는 먼저 ‘서른, 잔치…’ 이후 자신에게 남은 흉터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의 인생에 있어 ‘서른, 잔치…’는 양날이었다고 한다.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그만큼 많았다는 말이다.
“그 시집을 낸 뒤 몇 년 동안은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아무것도 못했어요. 시집은 많이 팔았지만 허송세월을 했다고나 할까요.”
시집에 대한 평도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그는 찬사만큼이나 많은 비난을 받았고, 인신공격성 폭언과 험악한 글들 속에서 가족들과 함께 심한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기에 시인으로 등단해 의도하지 않은 오해를 많이 샀어요. 특히 ‘잔치’가 ‘운동’의 상징으로 읽힐 줄 알았다면 그렇게 쓰지 않았을 거예요. 누군가는 저의 시에 대해 ‘석사 학위를 가진 매춘부의 언어’라고 평했고, ‘네가 뭔데 운동이 끝났다고 하느냐. 죽이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죠.”
갑작스레 쏟아진 삐딱한 시선들은 그를 움츠러들게 만들었고, 그걸 숨기기 위해 그는 도리어 공격적이 되었다. 어쩔 수 없는 방어 본능이었는데, 사람들은 그걸 또 다른 시빗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마흔 살이 가까워오면서 그는 혹독한 자기반성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스스로 할퀴었던 칼날을 세상 속에 그만 파묻고 싶다”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처럼, 자기 자신과 화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설은 그에게 ‘스스로 할퀴었던 칼날’을 내리게 해준 소중한 계기였다.

소설 쓰기는 시인이 되기 전부터 품어왔던 오랜 꿈
그가 소설을 썼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은 “왜 갑자기 소설을?” 하며 궁금해한다. 하지만 그는 소설 쓰기는 오랜 시간 품어온 꿈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시로 등단하기 전부터 소설을 습작해왔어요. 89년쯤엔가 원고지 3백장 분량의 소설을 써서 이문열 선생님께 보여드린 적도 있죠.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연애소설이었는데, 당시 이문열 선생님은 ‘아직 소설이 아니지만 세 번 정도 고치면 소설이 되겠다’며 ‘문장이 정확하다’고 격려해주셨어요.”
지금은 10번을 고치라 해도 고치겠지만, 당시 그는 “3번이나 고쳐야 돼?” 하면서 소설 쓰기를 포기했다고 한다. 서른이 다 되어가던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취직을 해본 적이 없던 그는 초조했고, 소설 쓰기보다 직장을 잡는 일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첫 장편소설 발표하며 소설가로 변신한  ‘서른, 잔치는 끝났다’ 시인 최영미

소설을 쓰고 싶던 젊은 날의 꿈을 이뤄서 행복하다는 최영미.


그 후 최씨는 출판사에 취직을 했다. 그런데 사회가 무엇인지 몰랐던, 그의 표현대로 하면 “사회화가 덜 된” 그는 한 회사에서 오래 견디지를 못했다고 한다. 보통 6개월이면 ‘잘렸고’, 가장 오래 다닌 것이 8개월일 정도로 어느 곳에도 적응하지 못했다.
“끊임없이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라는 회의가 들더군요. 그래서 나를 찾기 위해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출퇴근 시간 지하철에서도 쓰고, 점심시간에 출판사 근처 카페에서도 썼죠.”
그렇게 쓴 시들을 모아 펴낸 94년 첫 시집이 ‘서른, 잔치…’다. 시집 출간 뒤 2년 만에 이문열씨를 다시 찾아갔는데, “시편 하나 하나에 스토리가 있다. 소설을 써보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첫 시집이 너무 잘 나간 탓일까. 그가 다시 소설가의 꿈을 절실히 꾸기 시작한 건 마흔이 가까워졌을 때다.
“이번 소설은 90년대 후반에 구상했고 2001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썼어요. 소설에 매달린 지난 4년은 매일 매일이 ‘시인이었던 과거의 나’와 ‘소설가가 되려는 현재의 나’가 치열하게 투쟁하는 시간이었죠. 시와 소설은 글의 밀도가 다르고 호흡이 다르거든요. 작가로서 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야 했어요.”
“다른 시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이라는 단서를 달면서 그는 “시는 정신노동이고, 소설은 정신노동에 육체노동이 더해진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육체적·정신적 노동의 산물인 ‘흉터와 무늬’는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굴곡 많은 한국 현대사를 살아간 한 가족의 이야기를 둘째 딸 정하경이 서술하는 형식의 가족소설이다. 첫 소설이 왜 가족소설이냐고 묻자, 그는 “우리나라 가정은 한 집 건너 한 집이 모두 소설이라고 생각한다”며 “파란 많은 한국 역사에서 이름 없는 사람들이 겪은 고통을,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겪은 훈장 없는 상처를 소설에 담고 싶었다”고 답했다.
‘흉터와 무늬’의 중심에는 선천성 심장병을 앓다 수술을 받기 위해 미국에 입양된 뒤 죽은 언니와 천하의 바람둥이에 가장 노릇도 제대로 못하면서 가부장적 권위만 내세우는, 평생을 우익으로 살다간 아버지 정일도가 있다. 하경에게 있어 언니와 아버지의 존재는 흉터, 곧 고통이다.
소설은 하경이 거울을 보다가 뺨에 난 자잘한 손톱자국들을 의식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사람들이 “이게 뭐죠?”라고 물으면 “원래 그래요. 어릴 적 개구지게 노느라 다쳤어요” 하며 대충 얼버무리는 흉터다.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그 흉터가 생긴 기억을 거부했던 하경은 어느 날 흉터의 고통, 곧 언니를 기억한다. 그러면서 하경의 가족사에 얽힌 베일이 벗겨진다. 과거와 현재가 엇갈리다 어느덧 사십대가 된 하경이 다시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며 희미해진 흉터자국을 응시하는 장면으로 이 소설은 끝난다.
“사십해의 비바람에 상처의 톱날이 무디어졌다. 어느덧 하나 둘 늘어난 잔주름에 묻히는 손톱자국이 때로 아쉬우니 - 감추고 싶었던 흉터가 지금은 뭇 얼굴들 속에서 번쩍, 나를 알아보는 무늬가 되었다. 어디에서건 나를 드러내는 서명처럼.”(‘흉터와 무늬’의 마지막 부분)
쓰라린 기억을 환기시키는 흉터는 세월이 지나면 어느 순간 자기 삶의 무늬가 되어버린다. 그럴 수 있도록, “흉터가 무늬가 되도록 우리는 사랑하고 싸워야 한다”는 것이 최영미가 ‘흉터와 무늬’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다.
“이 소설은 1백37편의 짧은 이야기로 구성돼 있어요. 소설은 연속적이지만, 우리 삶에서 기억으로 되살아나는 건 하나의 장면이나 인상 혹은 순간일 뿐이죠. 그래서 흩어진 1백37개의 삶의 장면을 모아 하나의 삶을 만들어냈어요. 각각의 이야기들은 저마다 완결된 형식이면서 동시에 부분으로, 조각보처럼 맞대어져 커다란 줄거리를 이루죠.”
1961년 음력 8월16일, 최영미와 생년월일이 같은 ‘흉터와 무늬’ 속 주인공의 삶을 읽다 보면 언뜻 작가가 지나온 시대적·공간적 배경이 겹친다. 하지만 그는 “절대 자전소설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첫 장편소설 발표하며 소설가로 변신한  ‘서른, 잔치는 끝났다’ 시인 최영미


“분명히 말하지만, 저는 정하경이 아니에요. 예를 들어 정하경은 남자를 하루 만에 갈아치우는 여자로 나오는데, 저는 순정파거든요. 한 남자를 정리하는 데 적어도 3년은 걸리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 소설을 자전적 이야기로 받아들인다면, “독자들도 속아넘어갈 만큼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며냈다는 칭찬으로 여기겠다”며 웃는데, 그 웃음 한편이 문득 어둡다. 첫 시집을 내고 생각지도 않게 겪어야 했던 자신과 가족들의 고통이 떠올랐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외모에 서울대 서양사학과,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라는 학벌, 베스트셀러 시인의 명예까지 갖춘 최영미가 퍽 부유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아파트 전세금에 쩔쩔매며 2년마다 이사를 가야 하는 형편이라고 말한다. 시집이 성공한 것은 이미 10여 년 전의 일인데, 아직도 자신이 부유할 것이라고 ‘오해하는’ 시선들을 대할 때면 곧잘 가슴이 콱 막힌다고도 했다.
“소설을 써서 먹고사는 게 꿈, 연애소설 3부작 기획하고 있어요”
그의 소박한 꿈은 소설을 써서 먹고사는 것. “치즈 케이크를 먹으며 축구를 볼 수 있으면 좋고, 더 욕심을 내자면 챔피언 시리즈를 보러 유럽에 갈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최영미는 열렬한 축구광이다.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축구협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했고, 여러 글을 통해 축구에 대한 깊은 사랑을 밝혀왔다. 작가인 그가 어떻게 축구를 좋아하게 됐을까, 그가 밝힌 이유는 뜻밖이다.
“98년에 실연을 당했어요. 저의 첫사랑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죠.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그때 TV에서 프랑스월드컵을 하더라고요. 그것을 열심히 봤어요. 근데 재미있더라고요. 특히 네덜란드의 미드필더 다비즈한테 반했어요. 헤어진 애인도 연하였어요, 저 능력 있었죠?(웃음)”
이후 그가 축구에 빠져든 건 ‘불확실성’과 ‘정직함’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축구에서 인생을 배워요. ‘공은 내가 기대하는 곳에서 절대 오지 않는다’는 카뮈의 말처럼, 인생도 그렇잖아요.”
축구 이야기를 하는 내내 그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행복해 보이는 것이, 그에게 있는 흉터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축구 외에도 거의 모든 운동경기를 보는 것, 하는 것 둘 다 좋아한다고.
“집에서 혼자 춤도 잘 춰요. 운동할 겸 뱃살도 뺄 겸 해서 음악 틀어놓고 신나게 추죠. 요즘은 리키 마틴의 ‘The Cup of Life’를 틀어놓고 춰요. 사람들이 저보고 혼자 지내면 심심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는데, 저라는 사람은 결코 심심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즐겁게 살고 있죠.”
마지막으로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어보자, 당분간은 계속 소설을 쓰겠다고 답했다. 현재 계획하고 있는 소설은 80년대·90년대·2000년대의 연애담을 3가지 빛깔로 담아낸 연애소설 3부작이라고 귀띔한다. 그는 이 세 편을 쓸 때까지는 소설에만 전념하겠지만, “시가 내게로 오면 시를 쓰겠다”고 했다. 시는 그에게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서른, 잔치…’로 인한 흉터, 잊지 못한 사랑의 상처로 인한 흉터가 이제 그에게 삶의 무늬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여성동아 2005년 6월 4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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