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검었던 어릴 적 내 살색, 사람들은 손가락질해 내 마미(mommy)한테 내 파피(poppy)는 흑인 미군 여기저기 수군대 … 하루에 수십 번도 넘게 난 내 얼굴을 씻어내, 하얀 비누를 내 눈물에 녹여내 까만 피부를 난 속으로 원망해”
-‘검은 행복’ 중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가수 윤미래(26). 90년대 중반 힙합그룹의 리드 보컬로 가요계에 데뷔한 뒤 인기를 모았던 그가 4년여 만에 낸 새 앨범 ‘t3, YOON MIRAE’에는 고단했던 지난 삶이 담겨 있다.
“어머니는 주한미군이던 아버지와 결혼해 미국으로 이주한 뒤 텍사스에서 저를 낳았어요. 저는 그곳에서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며 자랐죠.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유럽 등을 돌아다니다 열 살 때 처음 한국에 왔는데, 한국어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얼굴 까만 아이에게 이곳은 너무 낯설었어요.”
외국인을 거의 본 적 없던 아이들은 윤미래를 ‘깜둥이’라고 놀려댔고, “비행기 표 사줄 테니 네 나라 가서 살라”며 따돌리기도 했다. 외국인 학교에 진학했지만, 그곳에서도 한국 피가 섞인 그는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너는 미국인이냐 한국인이냐, 아니면 흑인이냐 동양인이냐 하고 묻는 사람들이 싫었어요. 저는 엄마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그저 평범한 아이일 뿐인데 집 밖에만 나가면 이상한 사람이 돼 있었죠. 저한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건, 아이에게 ‘엄마가 좋은지 아빠가 좋은지 얼른 대답해봐’라고 묻는 것만큼이나 어이없는 거예요. 전 그런 시선들 사이에서 완전히 지쳐버렸죠.”
그때 윤미래를 지켜준 건 부모의 사랑, 그리고 음악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상관없이 딸로서 100% 사랑해주는 부모와 아무리 힘겨운 순간일지라도 마음을 위로해주는 음악 덕분에 그는 힘겨운 어린 시절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특히 미군 부대에서 스타 DJ로 이름을 떨칠 만큼 음악을 사랑하던 아버지 토머스 제이 리드씨(51)는 그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음악을 들려주고 지금까지 그를 이끌어준 ‘음악적 스승’이라고 한다. 윤미래는 이번 앨범에 이런 사연을 담아 “세상이 미워질 때마다 두 눈을 꼭 감아 아빠가 선물해준 음악에 내 혼을 담아 볼륨을 타고 높이높이 날아가 … 내 살색은 짙은 갈색 음악은 색깔을 몰라 … 세상이 미울 때 음악이 날 일으켜주네”(‘검은 행복’ 중)라고 노래했다.
“어릴 때를 생각하면 늘 아빠가 엄마한테 혼나던 모습이 떠올라요. 월급을 타면 옷하고 신발 사고, 남는 걸로 다 음반을 사들였거든요(웃음). 그렇게 모은 음반이 3만 장이 넘었어요. 언제나 우리집에서는 그 가운데 한 장이 울려퍼지고 있었죠.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파티를 연 적도 많았는데, 그럴 때면 늘 우리 아빠가 DJ를 했어요. 어릴 때는 다른 집 아빠도 다 우리 아빠 같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우리 아빠가 특별한 사람이더라고요(웃음).”
그의 아버지가 좋아하던 음악은 리듬 앤 블루스(R·B)나 솔 같은 흑인 음악. 그 영향으로 윤미래는 어릴 때부터 마빈 게이, 아레사 프랭클린, 마이클 잭슨 등의 음악을 들으며 자랐고, 탁월한 리듬 감각과 가창력을 가질 수 있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윤미래는 그의 아버지가 준 가장 큰 선물은 이런 재능보다도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그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첫 녹음 때’로 기억하고, ‘가장 소중한 것’은 ‘내 목소리’라고 말할 만큼 음악을 사랑한다. 열세 살 때 가요계에 데뷔해 벌써 10년 넘게 노래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음악은 그의 모든 것이라고.
“음악 사랑하는 마음과 재능 물려준 흑인 아버지는 내 음악적 스승”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흑인의 감수성과 우리 정서를 가진 가수 윤미래.
“데뷔가 굉장히 빨랐죠? 열세 살 때 아는 오빠가 오디션을 본다기에 따라갔다가 우연히 가수가 됐어요. 카페에서 기획사 담당자와 오빠가 얘기를 나누는 걸 지켜보는 게 지루해 마침 흘러나오고 있던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 불렀는데, 기획사 사람이 ‘목소리가 좋다’며 ‘가수할 생각 없느냐’고 하더라고요. 아마 토니 브랙스턴의 음악이었던 것 같은데, 그게 제 오디션 곡이 된 거예요(웃음).”
그는 “그분이 ‘당장 하자는 건 아니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같이 하자는 것’이라고 하기에 별 생각 없이 ‘좋다’고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이 왔다”며 “아빠는 ‘학교라도 졸업한 뒤 하라’고 말리셨지만 내가 ‘어차피 음악을 할 거라면 지금 하고 싶다’고 우겼다”고 말했다. 그때만 해도 그렇게 어린 나이에 활동하는 가수가 없었던 탓에 윤미래의 프로필에 나이는 열아홉이 됐고, 아버지가 흑인이라는 사실도 숨겨졌다고 한다. 이런 ‘거짓말’은 어린 그에게 큰 상처가 됐다.
“그때 이후로 전 6년 동안 열아홉 살로 살았어요. 이번에 앨범을 내면서 제 나이를 스물 여섯이라고 밝혔더니, 누군가 ‘저 아줌마가 스물여섯 살이래. 나이를 속이네’ 하는 댓글을 달았더라고요. 그냥 웃음만 났죠. 시작을 그렇게 했기 때문에 저 자신을 솔직히 드러낼 수 없다는 게 늘 힘들었어요.”
윤미래가 이번 앨범에서 “열세 살은 열아홉 난 거짓말을 해야 해 내 얼굴엔 하얀 화장 가면을 써달래 엄마 핏줄은 OK 하지만 아빠는 안 돼 매년 내 나인 열아홉 멈춘 시간에 감옥에 갇힌 나는 내 안에 기대 너무나도 참혹한 하루하루를 보내며”(‘검은 행복’ 중)라고 노래한 것은 음악을 통해 자신을 솔직히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그는 그동안에도 2002년 발표한 ‘원더우먼’이라는 노래에 ‘난 반 먹통 Korean 혈통’이라는 가사를 넣는 등 자신의 본모습을 보이기 위해 애썼다. 이번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뿐이라고.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검은 행복’에는 아버지 리드씨가 래퍼로 참여해 의미를 더했다.
“내 삶과 내가 음악을 사랑하게 된 이유를 담은 노래니까 아빠랑 함께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직접 아버지에게 랩을 부탁했다는 윤미래는 “아빠가 처음에는 ‘그 정도는 한 번에 할 것’이라고 자신만만해하더니 막상 녹음실에 들어가서는 벌벌 떨더라. 하지만 완성된 노래가 마음에 드시는지 요새는 앨범에서 그 곡만 반복해서 들으신다. 다음 앨범에는 엄마 목소리를 넣어야 할 모양”이라며 활짝 웃었다. 환한 미소에서 부모에 대한 깊은 사랑이 전해졌다.
윤미래는 지난 4년여 동안 전 소속사와의 법정 분쟁 때문에 음악활동을 하지 못하며 힘든 시절을 보냈다. 그동안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이 “부모님이 나 때문에 걱정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었다고 말하는 그는 “고생 끝에 새 앨범을 낸 만큼 이제는 공연과 방송활동을 열심히 하며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다”고 말했다.
“여섯 살 때 미국에서 엄마랑 같이 차를 타고 지나가다 굉장히 예쁜 집을 본 적이 있어요. 분홍색 벽돌로 지어진 아주 크고 화려한 집이었는데 그걸 보고 엄마한테 ‘엄마, 내가 나중에 크면 저런 집 사줄게’ 했던 게 아직도 기억나요. 그때부터 늘 제 꿈은 엄마한테 집을 사드리는 거였어요. 좋은 가수가 돼서 엄마한테 아름다운 집을 선물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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