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을 매개로 하는 직업을 가진 배우가 스크린 밖에서 자기 생각을 유려하게 표현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캐릭터를 정확하게 파악한 배우만이 가능한 일이다. 질문마다 자기 생각을 깊이 있게 펼쳐놓는 최우식은 그저 유연하고 부드럽기만 한 배우가 아니었다. 작품, 배역에 대한 해석과 느낌을 자신만의 언어로 똑 부러지게 말하는, 예상보다 훨씬 더 단단한 사람이었다.

영화 ‘넘버원’ 포스터.
최우식은 ‘거인’ 이후 약 12편의 영화를 찍었지만, 전면에 나서 극을 이끈 적은 거의 없었다. 주로 선배 배우와 함께하거나, 또래 배우들과 주연의 짐을 나눠서 졌다. 최우식은 “극장에 걸리는 포스터에 내 얼굴이 이렇게 크게 나오는 건 ‘거인’ 이후 처음인 것 같다”며 “‘넘버원’은 정말 내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 부담감이 더 크다”고 말했다.
‘넘버원’은 우와노 소라 작가의 소설 ‘어머니의 집밥을 먹을 수 있는 횟수는 328번 남았습니다’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엄마의 밥을 먹을 때마다 숫자가 하나씩 줄어들고, 그 숫자가 0이 되면 엄마 은실(장혜진)이 세상을 떠난다는 설정이다. 최우식은 은실의 아들(하민)로 분해 폭넓은 감정선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미세한 표정 변화와 떨리는 목소리로 하민의 복잡한 내면을 고스란히 전달하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최우식은 “‘넘버원’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살면서 누구나 느끼는 가족의 사랑과 아픔의 지분을 적당히 조합한 영화라는 것. 작품을 통해 가족에게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는 그는 “정작 부모님께 내 고민을 충분히 공유하지 않았다”며 “이제는 기쁨뿐만 아니라 슬픔도 많이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10여 년 만의 원 톱 주연, 설렘과 부담감 교차해요”
완성된 영화는 언제 처음 봤나요.언론 시사회에서요. 원 톱 캐스팅으로 제 이름을 걸고 나온 영화라 더욱 만감이 교차했던 것 같아요. 사실 지금 너무 떨려요. 김태용 감독님과 함께하는 두 번째 영화라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거든요. 또 요즘 영화 시장의 스코어가 좋지 않은 편이라 더더욱 긴장되는 것 같아요.
김태용 감독이 기자간담회에서 “‘최우식은(최우식에 대해선) 내가 전문가’라는 생각으로 연출했다”고 애정을 드러냈어요.
그런 말씀 좀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웃음). 솔직히 김태용 감독님이 저를 잘 아는 건 맞아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맞는 말인 것 같고요. 제가 언제 가장 불편해하고 행복해하는지를 잘 아시는 것 같거든요. 또 가끔은 제가 생각한 것들을 미리 알아차리고 신을 이끌어가실 때도 있고요. 제가 올해 데뷔 16년 차예요. 그간 이 일을 해오면서 주어진 것을 잘 해내야 한다는 생각에 솔직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줄 때도 있었어요. 그에 비해 ‘거인’을 찍었던 10여 년 전은 껍데기 없는 달걀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 감독님도 저도 서로 사회에 찌든 모습이 아닌, 가장 날것의 모습으로 만났거든요. 굳이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고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솔직하게 뱉어냈죠. 그러면서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된 것 같아요.

저와 감독님 모두 경험치가 쌓여서인지 서로 확실히 성장했더라고요. 어떤 촬영에서는 감독님이 저를 보며 “너 정말 다 컸구나. 이제 배우구나”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사실 제가 대단한 걸 한 건 아니었어요. 대본에 뭔가를 받아 적는 등 모든 배우가 하는 보편적인 행동을 했거든요. 그때 ‘아, 내가 ‘거인’ 때는 진짜 아무것도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어떤 작품이든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께하면 행복하게 작업할 수 있다고 믿어요. 이 생각을 확신으로 바꿔준 게 ‘넘버원’인 것 같고요.
‘넘버원’에서 연기한 하민을 어떻게 표현하려 했나요.
감독님과 처음부터 의견을 맞췄던 건 ‘너무 어둡고 쉽게 보이진 말자’였어요. 하민은 어색한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든 말로 풀어내려 해요. 상황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피하거나 능글능글한 말투로 빠져나가죠. 이런 부분이 ‘넘버원’을 관통하는 하민의 대처법이라고 생각했어요. 또 감독님께서는 슬픔 속에서도 통통 튀는 유쾌함이 있길 바라셨어요. 저 역시 그 지점에 공감했고요. 제가 어떻게 연기하든 감독님이 방향을 잘 잡아주시니까 마지막까지 재미있고 편안하게 연기할 수 있었어요.
감정적으로 고조되는 장면은 어떻게 준비했나요.
사실 감정 연기에 대한 징크스가 있어요. 감정 소모를 많이 하는 게 겁이 나거든요. 가라앉는 장면을 많이 찍다 보면 그 늪에 빠져서 삶이 불행하고 우울해질 것 같고요. 이런 걱정 때문에 그동안 감정 연기를 많이 피해왔어요. 특히 이 작품에서는 유쾌했던 어머니가 하민으로 인해 변해가는 과정을 그려나가는 게 너무 힘들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 영화에서 감정 신은 사실상 받기만 했던 것 같아요. 려은 역을 맡은 (공)승연이와 국밥 이야기를 할 때도 계속 감정을 받기만 하다가 어쩔 수 없이 속마음을 표현했고, 장혜진 선배님과의 신에서도 대답만 하는 정도로 감정을 내비쳤거든요. 저는 두 분의 감정을 그저 받아내기만 했던 거죠. 사실 감정 신이 있는 날은 전날 잠을 설치거나, 새벽 내내 컨디션이 좋지 않은 채로 현장에 가는 편이에요. 하지만 ‘넘버원’ 촬영이 초중반을 넘어서자, 상대방의 연기를 받기만 해도 감정이 술술 나오겠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실제로도 그랬고요.
후반부로 갈수록 수척해지는 하민의 외적 변화를 위해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요.
저는 원래 작품을 하면 살이 빠지는 스타일이라 특별히 다이어트를 하진 않았어요. 또 과하게 변화한 모습보다는 작품 속 메시지를 더 깊이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외적인 모습에 크게 신경을 쓰진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시사회에서 조금 웃긴 얼굴들이 보이더라고요. 화면 속 제가 마치 아픈 비둘기처럼 보였거든요(웃음). 다행히 이런 모습이 슬픈 장면 뒤에 붙어서, 무겁기만 한 신에서 피식 웃을 수 있는 순간을 부여한 것 같아요. 이런 장면으로 인해 영화가 너무 슬픔에 치우치지 않을 수 있었고요.


최우식이 배우 장혜진, 공승연과 함께 출연한 영화 ‘넘버원’. 엄마의 음식과 숫자를 엮은 독특한 설정으로 진한 가족애를 이야기한다.
맞아요. ‘넘버원’에서 가장 큰 도전이 부산 사투리였어요. 특히 사투리로 감정 연기를 하는 게 정말 어려웠던 것 같아요. 대사 속에 캐릭터의 정서와 인생의 필모그래피까지 담고 있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감정이잖아요. 사투리에 너무 신경을 쓰다 보면 감정을 놓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러다 2마리 토끼를 다 놓칠까 봐 무섭기도 했고요. 그래서 정말 중요한 감정 신에서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연기했어요. 물론 사투리 연습도 정말 많이 했어요. 촬영 두 달 전부터 레슨을 받으며 어조와 억양 등을 익히려 노력했죠. 저는 사실 현장에 대사를 많이 준비해가는 편이 아니에요. 촬영장에서 자연스러운 방향으로 고치거나, 때론 제 입에 맞게 바꾸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사투리를 하다 보니 그런 작업을 아예 할 수가 없더라고요. 대사를 유연하게 조정할 수가 없었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사투리를 가르쳐준 선생님께 추임새를 알려달라고 했어요. 그 추임새를 활용해 즉흥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을 갈음했어요.
가장 공을 들인 장면은 무엇인가요.
엄마의 김치를 먹는 신이요. ‘넘버원’은 판타지적 설정이 짙게 깔린 작품이에요. 그 안에서 현실감을 부여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죠. 극 중 등장하는 숫자는 하민에게 단순한 기호가 아닌 트라우마로 작용해요. 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게 김치 먹는 장면이라고 판단했고요. 제가 이 신을 어떻게 소화하느냐에 따라 스토리의 설득력이 결정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결혼은 무조건 할 거예요”
영화 ‘기생충’ 이후 7년 만에 다시 모자로 호흡을 맞춘 장혜진 배우와의 촬영은 어땠나요.전 인복이 많은 편인 것 같아요. 사람들과 부딪히다 보면 트러블이 생기곤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감독님과 장혜진 선배님, 공승연 배우까지 삼박자가 정말 잘 맞았거든요. 다루는 소재는 무거웠지만 현장에서는 늘 깔깔거리며 재미있게 보냈어요. 장혜진 선배님과 ‘기생충’을 찍을 때는 앙상블 중심이었기 때문에 연기 면에서 깊게 스며들지 못한 부분이 있었어요. 일대일로 핑퐁을 주고받는 신이 거의 없었거든요. ‘넘버원’에서는 선배님과 저, 딱 둘이서 대사와 감정을 주고받다 보니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워낙 서로를 잘 알고 편안한 사이여서 더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었고요. 선배님은 밝고 솔직하고 한결같은 분이어서 촬영 내내 제가 많이 의지했어요. 실제 저희 엄마와 보이스 톤이 비슷해서 쉽게 몰입할 수 있었죠. 정말 재미있었어요.
실제 집에선 어떤 아들인가요.
딸 같은 아들이요. 저는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자주 말하고, 감정 교류도 서슴없이 하는 것 같아요. 제가 형과 일곱 살 차이 나는 늦둥이라 부모님 연세가 많으신 편이에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나이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내가 몇 살이면 부모님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지?’ 하면서 계산해보고 울면서 잘 때도 있었죠. 성인이 되고 사회에 나온 뒤에는 이런 생각들을 망각하고 지냈던 것 같아요. 가족에게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걸 까먹은 거죠. 부모님과 함께할 수 있는 계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이 작품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됐어요. 그래서 부모님께 조금 더 신경을 쓰고 소통도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부모님의 모습을 사진뿐만 아니라 동영상으로도 많이 남겨둬야겠다고 다짐했고요.
결혼이라는 키워드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요소로 다뤄져요. 실제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있나요.
결혼에 대해 깊이 고민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아직 못 해본 경험들이 많거든요. 하지만 언제든 생각이 바뀔 수 있고, 상황이 오면 그에 맞춰 선택할 거예요. “연예인이 무슨 걱정이냐”고 하실 수도 있지만, 이 일을 하면 당연하게 누려야 할 것들을 놓치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거든요. 결혼은 앞으로도 계속 생각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아요. 저는 결혼은 무조건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시기에 대해선 계속 고민하게 될 것 같아요.
영화에 참여한 배우와 스태프, 관객들의 부모님 사진이 엔딩 크레디트에 올라가요. 우식 씨 부모님 사진도 걸려 있나요.
그럼요. 우리 어머니 사진이 가장 옛날 사진 같더라고요(웃음). 제 인생에서 어머니와 함께 걸리는 영화는 ‘넘버원’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죽기 전까지 다신 없을 기회인 것 같거든요. 크레디트에 어머니의 얼굴이 올라가는 장면은 마치 이 영화가 저에게 주는 선물처럼 느껴졌어요. 한 가지 놓친 부분은 아버지 사진을 못 넣었다는 거예요. 단순하게 하민과 어머니의 관계만 생각했거든요(웃음).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진 모두 넣었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 아쉬워요.
필모그래피를 들여다보면 현시대 청춘의 얼굴을 대변해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스스로도 인정하나요.
제가 불편하지 않은 얼굴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요. 아들과 닮았다고 한 장혜진 선배님도 그렇고, 주위에서 저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꽤 많이 들었거든요. 그동안 했던 작품 속 캐릭터는 실제 제 나이대와 거의 비슷했어요. 그래서 경험했던 사실들을 작품 속에 많이 녹여내고, 살아가는 모습도 비교적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었어요. 봉준호 감독님이 ‘거인’에서 영재를 보고 ‘기생충’에 저를 선택해주신 것처럼, ‘넘버원’에서도 좋은 캐릭터를 만나 함께 성장할 수 있었어요. 그 점이 정말 감사하게 느껴져요.
‘넘버원’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나요.
가족의 소중함과 위로요. 일에 찌들고 삶 혹은 연애에 집중하다 보면 정작 가장 가까운 부모님에 대한 소중함을 잊고 사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영화 속 하민이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간을 가졌으면 해요. 또 이제는 더 이상 집밥을 먹을 수 없는 분들이 계실 텐데, 이 영화를 통해 따뜻한 위로를 받았으면 합니다.
#최우식 #넘버원 #여성동아
사진제공 바이포엠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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