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눈사람>에서 처제와 사랑에 빠지는 강력반 형사로 인기 끄는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질풍노도’의 10대를 보내고 대학에 떨어진 뒤 군대를 다녀왔다. 뭘 할까 고민하다 경찰이 됐다. 타고난 복인지 인형처럼 예쁜 스튜어디스를 아내로 맞이했다. 게다가 그 아내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혼자 동생을 뒷바라지해서 키울 만큼 착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말을 지겹게 안 듣는 어린 처제 하나가 속을 썩인다. 툭하면 반항하고 가출까지 한다. 그런데 처제를 보면 왠지 자신의 방황하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안쓰럽다. 아니, 동정인 줄 알았던 그 감정이 어쩌면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혼란스럽다.
언니가 그 남자를 약혼자라고 소개했을 때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명을 위협당하는 일을 하면서도 박봉에 시달려야 하는 경찰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남자, 마음이 따뜻하다. 비행 때문에 집을 자주 비우는 언니를 대신해 나를 헌신적으로 돌봐준다. 사고뭉치이던 내가 마음을 잡고 경찰이 되기로 결심한 것도 그 남자 때문이다. 그를 사랑한다. 어쩌면 좋을까.
최근 MBC 드라마 <눈사람>의 조짐이 심상치 않다. 처제와 형부의 위험한 사랑을 다뤄 자칫하면 시청자들의 질타를 받을 만도 한데, 아슬아슬한 줄타기처럼 묘한 긴장감을 자아내며 방영 2주 만에 시청률 20%를 훌쩍 넘어섰다. 그 한가운데 이 남자, 조재현(37)이 있다. 결코 크지 않은 키(172cm)에 미남도 아니지만, 오랫동안 조연생활을 하며 드라마, 영화, 연극을 통해 다져온 그의 연기력은 시청자들을 흡인시키기에 충분하다.
조재현에게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재주가 있다. SBS 드라마 <해피 투게더> <퀸> 등에서 보여준 코믹한 캐릭터는 그의 실제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 인터뷰 내내 만담에 가까운 유쾌한 말솜씨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주도했다. 기자에게 명함을 건네받은 그는 그위에 펜으로 무엇인가를 적었다. 고개를 빼 훔쳐보려 하자 당황하며 뒤로 감춘다.
“워낙 여러 사람에게 명함을 받으니까 누가 누군지 기억할 수 없어서요. 일종의 암호를 적은 거죠. 나중에 기억할 수 있게. 하하.”
그가 이 드라마에 출연하게 된 데는 좀 독특한 사연이 있다.
“탤런트 김래원씨랑 같은 소속사예요. 하루는 이 친구가 사무실에서 뭘 읽고 있더라고요. <눈사람> 시놉시스였어요. 심심해서 ‘나도 좀 보자’고 했죠. 참 뭉클하더라고요. 그런데 어라? 극중 형부가 있네? 그래서 이창순 PD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하면 어떻겠느냐’고 했죠. 그래서 출연하게 됐어요.”
그는 SBS 드라마 <피아노>로 스타덤에 오르기 전, 김기덕 감독의 페르소나(persona, 타인에게 부과된 성격이란 뜻으로 영화에서는 감독과 세상을 매개하는 특정한 배우가 존재할 때 주로 사용되는 용어)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영화 <섬>에서는 티켓다방 주인, <수취인불명>에서는 개장수, <나쁜 남자>에서는 포주로 등장해 늘 잔인하고 폭력적인 캐릭터를 구사해왔다.
“저도 이제 인간다운 역할 좀 해보고 싶어요(웃음). 만날 여자 때리고 팔아먹는 포악한 역만 했으니…. 그동안 캐릭터가 너무 극악무도해서 조재현은 원래 저런 놈이라고 생각할까 봐 겁나요.”
“처제와의 사랑?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PD 작품은 ‘명품 드라마’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애인>을 참 재미있게 봤습니다. 소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용달차로 집에 있는 물건을 가져다 쓰는 사람이에요. 감독을 신뢰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에피소드죠. 그런데 걱정이네…. 저 때문에 ‘명품 드라마’가 ‘중저가 드라마’가 되면 어떡하죠?(웃음)”
그러나 그런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을 듯하다. 미묘한 심리 묘사가 관건인 이 드라마에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감정의 디테일을 살려내는 조재현의 연기는 그야말로 ‘명품’에 가깝다는 평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이PD는 그가 소구력이 매우 강한 배우라고 했다. 미남은 아니지만 느낌이 강하게 전달되는 배우. 이 PD는 ‘형부와 처제의 사랑’이라는 윤리적 문제제기를 비켜가기 위해 드라마를 만드는 데 있어, 현실에 강하게 기반을 둔 ‘다큐멘터리 같은 멜로’를 표방했는데, 그가 제시한 틀에 딱 들어맞는 배우가 바로 조재현이라고 했다.
“조재현 정도 돼야 그 느낌을 제대로 파악하고 전달할 수 있습니다. 처음엔 지상파 드라마에서 다루기에 다소 위험한 소재라고 걱정하는 분이 많았지만, (그를 믿기 때문에) 걱정이 안돼요.”
제대로 된 연기가 나오려면 극중 배역에 몰입해야 하는 법. 처제와 형부의 사랑을 가능하다고 보는지 묻자 잠시 말을 아끼는 듯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해의 정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죠. 물론 그런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고 봅니다. 주변에도 그런 사례가 제법 많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제 경우로 소급해보면 글쎄요… 모르겠어요.”
그는 현재 영화 <청풍명월>과 <스턴트 맨>을 촬영중이다. 몸이 세개라도 모자랄 지경. 다작(多作)이 좋지 않다는 것을 본인도 인정했지만, 그는 오랜 조연생활로 연기에 대한 갈증에 시달려왔다.
조재현은 드라마 극본이 너무 좋아 이창순 PD에게 직접 전화를 해 출연을 자청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배역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어요. 해보고 싶은 역할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드라마 <피아노>의 성공으로 제게도 여러 기회가 주어지기 시작했고 배역 욕심이 많아진 거죠.”
다작 출연에 대해 회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매년 연극무대에도 꾸준히 섰던 그가 지난해에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인기 좀 얻었다고 해서 배고픈 연극무대에는 서지 않는 사람들을 제일 경멸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딱 그 꼴이 났네요(웃음). 연극 하는 선배들이나 팬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올해는 김갑수 선배랑 꼭 연극 하기로 약속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무대에 설 겁니다.”
그의 욕심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틈틈이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그는 프로듀서로 데뷔하는 것이 새해 가장 큰 소망이라고 한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사랑이라는 걸 하고 죽을 수 있을까? 죽기 직전, ‘당신은 사랑을 해보셨습니까’라는 질문에 ‘있다!’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 이런 질문을 담고 있는 영화예요.”
극중 상대역 공효진과는 15년 차이. “별차이 안 난다”고 우겨댔지만 그에게는 벌써 중학교 2학년이 된 아들이 있다.
“효진이가 우리 아들과 같은 1980년대생이라고 생각하면 좀 이상해요. 세월 정말 빠르네요.”
드라마의 제목이 왜 <눈사람>일까. 4회까지 방영되면서 처제 연욱(공효진)의 입을 통해 그 의문은 풀렸다. 만들 때는 한없이 신나지만 해가 뜨면 사라지고 마는 눈사람. 연욱에게 형부는 ‘눈사람’이다. 그만큼 열렬하지만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암시한다. 그러나 어쩌면, 이 드라마를 통해 눈덩이처럼 불어만 가는 조재현의 인기를 반영하는 중의적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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