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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쉰넷에 등단한 늦깎이 시인 박미산 감동 인생고백

“지독한 가난과 잇단 고통도 꿈을 꺾을 순 없어요”

글 김수정 기자 | 사진 조영철 기자

2009. 02. 18

박미산씨는 박사논문을 쓰면서 몇몇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다. 두 딸의 엄마이자 치매 앓는 시어머니를 둔 며느리다. 수준급 사진실력을 갖고 있고 태껸 지도자로도 활동 중이다. 그가 지난 연말 펴낸 시집 ‘루낭의 지도’에는 이런 그의 다채로운 인생 지도가 펼쳐져 있다.

쉰넷에 등단한 늦깎이 시인 박미산 감동 인생고백


늦깎이 시인의 근성이 무섭다. 박미산 시인(55)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요즘 학교 도서관에 다니면서 박사논문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행인 건, 겨울방학이라 대학 강의를 잠시 쉬고 있다는 것. 그래도 바쁘다. 지난해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 이곳저곳에서 원고청탁이 밀려들고, 지난해 말 펴낸 첫 시집 ‘루낭의 지도’에 대한 축하인사도 넘쳐난다.
‘루낭의 지도’. 생경한 제목이다. 루낭은 눈물주머니면서, 6세기 이후 여러 세력의 침입과 자연의 변화로 사라진 나라 ‘누란’에서 따온 말이다. 그는 “살아온 인생을 되짚는 지도라는 의미로 여태까지 살아온 과거를 지우겠다는 생각에 그렇게 지었다”고 말했다.
“첫 시집을 내면서 많이 망설였어요. 부끄러웠죠. 사람이 많은 혼잡한 사거리에서 홀딱 벗고 서 있는 기분이랄까요. 마음의 병이 깊어 한 달 동안 앓았어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생각했죠. ‘그래, 이것으로 나의 과거는 다 갔다. 이제 다시 시작하자’고.”
“체험하지 않고는 시를 쓸 수 없다. 나의 시에는 나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는 그는 인터뷰를 하며 회상에 잠겼고 이따금씩 울먹였다. 또 다른 루낭의 지도를 그리는 순간이었다.

정치판 맴돌며 가정 등한시한 아버지 때문에 겪어야 했던 가난
저 아득한 당근밭 언제 길을 낼 수 있을까 때론 밭고랑 사이로 탈주의 길을 만들기도 했어요 주룩주룩 무너지는 가슴을 안고 겉은 몸뻬폭 같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어요 무쇠 솥뚜껑을 열다가 한참 동안 짚무늬 눈물로 서 있었어요 어머니, 묵직한 근심은 날이 새면 또다시 일어났어요 - ‘왕가네 당근은 쑥쑥 자랐어요’ 일부

그는 가난했다. 황해도에서 피란 와 인천에 정착한 아버지는 정치판을 맴도느라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 주변에 여자도 많았다. 낯선 여자가 임신한 몸으로 집에 온 적도 있었다. 가장으로서의 역할은 고스란히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8남매를 먹여 살리기 위해 어머니는 밤낮으로 뜨개질을 했고 남의 밭을 가꿨다.
“아버지는 한 정당의 보좌관이었어요. 아버지가 보좌하는 의원이 당선되면 형편이 폈지만 낙선하면 어려워졌죠.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집안형편이 급격하게 나빠졌어요. 쌀이 없어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고, 배고픈 걸 참지 못해 남의 밭 서리를 했죠. 아침이면 서로 크레용을 가져가야 한다며 한바탕 난리를 쳐야 했고요.”
영민한 편이었지만 다섯째인데다 여자아이였던 그에게 공부는 사치였다. 하지만 두 살 위인 셋째 오빠가 “내 몫까지 공부하라”며 양보한 덕에 중학교에 갈 수 있었다. 구두닦이가 된 오빠의 손은 늘 얼어 터져 있었다. 그런 오빠의 희생 덕분에 그는 중학교 졸업 후에도 인천의 한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쉰넷에 등단한 늦깎이 시인 박미산 감동 인생고백

어려움을 극복하고 시인이 된 박미산씨는 따뜻함을 잃지 않는 시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동네 중학생들을 가르쳐 학비를 마련했어요. 방학 때는 송도에서 아이스크림을 팔았고요. 돈 걱정 없이 책 사서 공부하고 대학 준비를 하는 친구들이 부러웠어요. 대입예비고사에 합격했지만 그걸로 만족해야 했죠. 저 혼자라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생활을 할 수 있겠지만 밑으로 동생이 셋이나 있거든요. 오빠가 제게 그랬듯, 저도 동생들을 위해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았어요.”
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한 회사에 들어갔다. 인문계를 다녔던 터라 주산·부기를 할 줄 몰랐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무슨 일이든지 잘할 수 있다고 상사에게 거짓말했다. 낮에는 정신없이 일했고 밤에는 주산·부기학원에 다녔다. 우연히 경인선 열차 속에서 마주친, 대학생이 된 고교 동창들은 미팅 얘기를 했고, 그는 그때마다 주눅이 들었다. 그러기를 5년. 고달팠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갈수록 커졌다.
“돈을 꽤 벌었지만 모으지는 못했어요. 굳은살이 덮인 발바닥은 갈수록 딱딱해졌죠. 앞이 보이지 않더라고요. ‘이렇게 살다 내 인생이 끝나겠구나’ 했어요.”
쉰넷에 등단한 늦깎이 시인 박미산 감동 인생고백

그런 그에게 결혼은 돌파구였다. 열 살이나 많은 남편은 “키 작고 목 짧은, 이상형에서 먼 남자”였지만 집안이 부유했고, 심성이 고왔다. 시부모는 그를 딸처럼 귀여워했다. 문학에 관심이 많던 그에게 시이모가 작가 최정희씨, 시누이가 작가 김채원씨라는 점 또한 반가운 일이었다. 부잣집에 시집간 그는 마당 넓은 서울 성북동 대저택에 살았다.
“‘돈이 없어서 결혼할 수 없어요’ 했더니 몸만 오라고 하더군요. 정말 몸만 갔어요. 밥 짓고 설거지하고 남편이 주는 월급봉투 챙기는 재미로 살았어요. 시부모를 모시고 지냈는데 시아버지가 꼭 아버지 같았어요. 직접 담근 술을 밤새 시아버지와 마시고, 이따금씩 함께 경기도 과천 농원에 가서 난을 사다 키웠죠. 정말 행복했어요.”



결혼 후에도 남편의 잇단 사업 실패와 시부모 투병으로 시련 끝나지 않아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결혼한 지 넉 달 만에 남편은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태양열을 이용하는 건물을 짓는 일부터 스웨터를 수출하는 일까지 크고 작은 사업을 벌였지만 그때마다 망했고, 빚이 불어났다. 결국 집을 팔았다. 어린 두 딸이 “엄마, 왜 이사 가?”라고 물었을 때 그는 이유를 설명하기보다는 “반드시 돌아올 거야”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곳에 고급주택이 들어서면서 그 집은 되찾을 수 없게 됐다고.
“친구에게 어렵게 돈을 빌려 서울 돈암동에 카페를 차렸는데, 그 역시 잘되지 않았어요. 시누이가 찾아와 불쌍하다, 속상하다면서 울던 기억이 나요. 아이들한테는 풍족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더라고요. 학원을 못 보내는 대신 대형서점에 데리고 가 책을 읽어줬어요.”
그 사이 아버지는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루낭의 지도’에 나오는 사랑하는 대상은 대부분 아버지를 뜻한다. 원망이 어느 새 후회와 연민, 사랑으로 바뀐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강화도에 당신이 묻힐 땅을 샀는데, ‘고향 흙이 붉은데, 이곳 흙도 붉네’ 하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던 기억이 나요. 그때만 해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남았는지 ‘죽을 자리 마련한 게 저리도 좋을까’ 싶었죠. 그러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보고 싶다면서 저를 찾았어요. 갔더니 ‘미안하다…’ 그러시더라고요.”
시아버지 역시 갑작스럽게 중풍을 맞았다.
“4년 동안 누워계시다 돌아가셨어요.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병구완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죠. 설상가상으로 시어머니마저 치매를 앓게 됐어요. 헤어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진 것 같았어요.”
그는 견딜 수 없었다. 가출을 감행했다. 무작정 친구와 강릉행 버스를 타고 떠났다. 하지만 그토록 원했던 겨울바다를 보면서도 시원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을 보면서 ‘우리 아이들도 지금쯤 집에서 저녁을 먹겠구나. 아차…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하루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그런 그에게 카메라를 선물해줬다고 한다. 그는 사진 찍고 글을 쓰면서 마음속 응어리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쉰넷에 등단한 늦깎이 시인 박미산 감동 인생고백

당신은 물속에 있는 땅을 보여주겠다고/ 휘날리는 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속삭였소/ 공중이 떡 벌어진 채/ 당신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소/ 그렇게 신선하게 가버렸소, 물속의 땅으로 (중략) 마지막 순간/ 물속의 땅으로 잠입하지 못했소/ 미안하오 - ‘벼랑 위의 산책’ 일부

카메라를 둘러메고 무작정 떠난 인도여행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마음이 헛헛해 벼랑 끝에 하루 종일 서 있다가 오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갠지스 강이 흐르는 바라나시에 갔는데, 활활 타오르는 시체 옆에서 아이들이 목욕재계를 하더라고요. 가난한 사람들은 장작을 많이 사지 못해 시체가 타다 말고 강물에 버려지고, 새들은 남은 살점을 뜯어 먹었어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눈앞에서 무너지는 순간, 죽었던 제 몸과 마음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죠.”

“중요한 건 긍정 마인드, 버텨내니 좋은 일 오더군요”
인도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그곳에서 찍은 사진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사진전 제목은 ‘생명의 빛, 인디아’였다.
그는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다행히도 남편과 두 딸 단비(30), 차래(29)도 적극적으로 지지해줬다고 한다.
“큰아이가 초등학생일 땐 가정환경조사서에 학력을 ‘대졸’이라고 속여 기입했어요. 아이들이 혹시 상처를 입진 않을까 두려웠거든요.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제 어린 시절 얘기를 들려주면서 솔직하게 고백했죠. 지난 97년 방송통신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공부에 대한 뚜렷한 목표가 없었어요. 어쩌면 새로운 일상의 하나로 여겼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졸업할 즈음 ‘아쉽다. 조금 더 해볼까?’ 하는 욕심이 생겼고, 운 좋게도 2002년 고려대 대학원에 합격했어요. 젊은 친구들을 따라갈 수 있을까, 학비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걱정하고 잠 못 이루다가 수업 첫날 지각했던 기억이 나요(웃음).”
물론 시행착오도 겪었다. 처음 그가 교수에게 물었던 질문은 “어떤 자료를, 어떻게 읽어야 하나요”였다. 컴퓨터보다 원고지에 익숙했던 그는 리포트를 작성할 때 종이에 펜으로 쓴 뒤 다시 컴퓨터로 옮겨야 했다. 다른 학생보다 속도는 더뎠지만 조바심내지 않았다. 이름을 바꾼 것도 그 즈음. 본명인 ‘명옥’이라는 이름은 왠지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한 교수가 ‘물에 비친 산 그림자’라는 뜻인 ‘미산(渼山)’으로 지어준 것. 그때부터 그는 공부를 하면서 시도 썼다고 한다.
“석사과정을 마칠 즈음 시어머니의 치매증세가 더 심해졌어요. 시시때때로 가스 불을 켜고 자식 얼굴도 못 알아보고…. 논문을 쓰려면 도서관에 가야하는데 불안한 마음에 외출을 할 수 없었어요. 공부를 중도에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형님 주선으로 시어머니를 노인병원으로 모시게 됐고, 석사학위를 받았어요. 지금도 어머니는 그곳에 계세요.”
박사과정을 밟은 그는 2005년부터 신춘문예에 시를 투고했고, 이듬해 문예지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지난해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재등단했다. 그는 자신을 ‘늦게 피는 꽃’이라고 표현한다.
“생각해보면 저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긍정적인 마인드를 잃지 않았던 것 같아요. 버텨내니 좋은 일이 오더군요. 저는 희생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아요. 누가 누구를 위해 희생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그들의 세계로 갈 때 제가 함께 길을 걷고, 제 세계를 갈 때 그들이 함께 걸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뭔가를 새로 시작할 때라든가 막막할 때면 산을 오른다. 단전호흡과 태껸을 배운 지도 벌써 10년째. 지도자 단계 수준에 다다랐다. 이런 노력은 앞으로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그녀가 있어요/ 가을 산도/ 여름 해도/ 봄 달도/ 모두 그렇게 먹었지요/ 저녁밥 뜸들이듯 눈은 내리고/ 뱃가죽이 꺼진 그녀의 소원은/ 겨울 동안만큼/ 냉동 보관되어 있어요/ 굴곡진 능선을 품은 적도/ 하늘에 쌍무지개다리를 걸친 적도 있는/ 그녀의 꿈은 말없이 흐르는 일이에요 - ‘늙은 호수’ 일부

그는 조만간 강원도 백담사 만해마을로 떠날 계획이다. 한 달 정도 그곳에 머물면서 박사논문을 완성할 생각. “여기서 끝이 아니다. 새로운 인생의 도약을 위해 계속 뛸 것이다”라는 포부를 밝힌 그는 마지막으로 “진정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나이는 상관하지 말고 도전하라. 빛을 본 사람만이 그 빛에 자신을 비춰볼 수 있다”며 씩씩하게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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