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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내게 안겨준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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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년 6개월을 산에 미쳐 있었다. 주말마다 산에 가는 내게 친구들은 ”엄홍길이 되는 거냐“고 물었다. ”말이 되는 소리냐“며 웃음으로 넘기던 대화는 왜인지 한참 동안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라지지 않는 문장을 수십 번 곱씹다 보니 어느 순간엔 정말 산악인이 되고 싶어졌다. 나는 눈앞에 나타난 꿈을 반기기보단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산악인이 돈이 되나?
나를 가로막는 현실적인 질문에 답이 나오지 않았다. 좋다는 이유로 대뜸 발 담갔다가 꿈을 이루기는커녕 쥐고 있는 것조차 놓쳐버리지 않을까 두려운 생각에 나는 꿈을 마음에 묻었다. 스스로 타협했지만 이미 무언가 눈치채버린 나는 의욕도 보람도 없이 의무감으로 둘러싸인 하루를 보냈다. 탁한 눈으로 살아가는 대가로 받는 월급이 반갑지 않았다. 마음이 떠난 곳에 몸을 두는 것은 고역이었다. 나를 가로막는 불안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남들이 정해놓은 기준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것이라면 더는 망설이고 싶지 않았다.
“나, 산을 제대로 타고 싶어서 퇴사하고 해외를 좀 다녀올까 봐.”
툭 던진 말에 돌아오는 답변은 당연하게도 지지보단 우려와 만류였다. “지금은 경제적으로 너무 불황이라….” “4년 차가 경력에서 얼마나 금 같은 시기인데 지금 멈춘다고?” “그 시기엔 다 그렇게 혹해. 버티는 게 힘이야.” “경력 더 채우고 안정적일 때, 여유롭게 출발하는 게 어때?”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웃기지만 주변의 만류는 내 확신에 힘을 실었다. 모두가 의심 없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기준이라면 나는 그 기준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저항 없이 쌓아 올릴수록 그것들은 더 단단하게 내 발목을 잡고 놓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지금 떠나야만 했다.
삶에 정해진 속도는 없기에

쿵스레덴에서는 젖은 옷을 말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좋아하는 길만 걷는 일상이 매번 꽃길이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예상보다 더욱더 고행이었다. 영상으로 학습한 장거리 트레킹과 내 몸으로 체감하는 트레킹의 난도는 확연히 달랐다. 매일 20km를 걷겠다는 의지와 달리 관절은 하루 만에 아우성쳤다. 2주가 지나자 발바닥은 숙소 바닥을 걷기도 어려울 만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텐트에서 생활해야 했던 쿵스레덴에서는 매일 아침이면 알람처럼 비가 내렸고, 덕분에 축축한 진흙탕이 늘 함께였다. 처음에는 젖지 않은 땅을 골라 걸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실패했고, 나는 2일 차부터 내내 신발이 젖은 상태로 걸어야 했다.
운이 좋게 쿵스레덴에 해가 쨍하던 날이 있었다. 기분 좋은 트레킹을 마치고 풍경을 즐길 겸 지정된 코스에서 이탈해 잔디밭에 텐트를 치고 잤다. 하지만 밤새 온 비에 단단하던 잔디는 움푹 꺼지는 진흙으로 바뀌어 있었다. 눈으로 이리저리 살펴보다 단단해 보이는 지점을 밟았다가 실패, 실패, 실패. 이 잔디밭을 벗어나려면 최소한 100걸음은 필요한데 나는 3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자리에서 서성거렸다. 이대로라면 여기서 하루 더 자야 할 판이었다. 방법이 없었다. 끝내 젖을 각오로 발을 푹 디뎠다. 양말을 축축하게 적셨지만 속은 시원했다. 물구덩이를 피하려면 살필 것이 많고 걸음이 더뎌지지만, 발을 적실 각오라면 발걸음은 거침없어진다. 발이 젖지 않게 걷는 법은 몰랐지만, 젖은 신발을 잘 말리는 법을 터득해버렸다. 젖는 게 성가셨을 뿐 두렵지는 않았다.
처음 도전하는 한 달 트레킹의 후유증으로 두 달을 절름발이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3주의 여유를 두고 잡아둔 TMB 트레킹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일정 강행을 고민하는 것도 잠시, 이 상태로는 주어진 스케줄은 물론이고 상황 악화로 이후 일정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 같았다. 결국 회복에 집중하고 TMB로 예정됐던 일정을 체코 당일 하이킹, 조지아 스바네티 트레킹, 튀르키예 트레킹 등의 당일 하이킹으로 대체하며 헛헛한 마음을 달랬다.
그리고 마지막 여정, 히말라야에서는 전문 가이드와 동행했다. 오랜만의 함산(함께 등산)이었다. 보통의 가이드는 대개 하이커의 속도에 맞춰 걷겠지만 앞사람을 바짝 쫓아가는 내 성격 때문일까, 히말라야 가이드는 그간 감춰온 실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전 여정에서는 혼자 걸었기에 벅차면 언제든지 쉴 수 있어 문제가 없었는데 함산은 달랐다. 내 거친 숨소리를 듣지 못하고 폭주하는 가이드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저마다 열심히 걷는 사람들 틈에 멈춰 서 제발 쉬고 가자고 소리 지르기는 죽어도 싫었다. 벌어지는 격차에 부족한 체력을 탓하며 빠르게 발을 굴렸다. 제발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꾸역꾸역 올라가는데 죽을 것 같은 나와 달리 가이드는 평온했다. 당연했다. 그 속도는 그에게 맞춰진 페이스였으니까.
산에서는 자신의 호흡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격차를 벌리는 앞사람, 혹은 나를 제쳐가는 뒷사람의 페이스에 휩쓸려 걷다 보면 내가 가진 호흡을 잃게 된다. 그렇게 되면 과호흡의 여파로 평소보다 더 긴 휴식이 필요하거나 여정을 완보하지 못한다. 목표 거리가 길수록 이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히말라야에서 과호흡은 곧 고산병이자 중도 하산의 지름길이었다. 나는 당장의 자존심 때문에 중도 하산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를 쫓기를 포기하고 내 속도를 택했다. 익숙한 내 호흡으로 걷자 가쁘던 숨이 진정되고 보이지 않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쫓아가느라 땅만 보기 바빴던 시선을 저 먼 풍경에 던져두고 휴식을 취하니 다행히 앞서가던 가이드도 멈춰 서고, 나와 보조를 맞추며 걸어주었다.
5개월의 여정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달라진 점은 많지 않았다. 혹시라도 무언가를 놓쳤을까 봐,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이 바뀌었을까 봐 걱정했는데 여전했다. 당당히 무언가 이뤄냈다고 할 것은 크게 없지만, 더 큰 도전을 할 힘을 얻어냈다. 장거리 산행을 뜻하는 종주에는 ‘따로 또 같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같은 목표를 가진 동행과 함께하지만 헤어졌다 중간 구간에서 다시 만나기도 하고, 저마다의 속도로 걷는 것에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같이 출발한 앞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지금 내게 휴식이 필요하다면 잠시 쉬었다 가는 게 현명하다. 10분간의 건강한 휴식이 이후 1시간의 페이스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여정에서도 모든 발걸음에 너무 힘을 실은 채 재촉하지 않았으면 한다..
김미나는 3년간 도시의 자연을 만드는 조경 디자이너로 일했다. 한국 사회의 호흡을 따르기보다 스스로의 호흡을 찾기 위해 세상을 경험하고 왔다. 눈앞에 놓인 물웅덩이에 개의치 않고 모험하는 산악인이 꿈이다. 인스타그램 (@kim.sannan)에서 더 많은 경험을 나누고 있다.
#등산 #세계여행 #퇴사 #여성동아
사진제공 김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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