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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차주영이 tvN에서 선보이는 사극 ‘원경’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갸웃했다. ‘더 글로리‘에서 차주영이 맡은 혜정은 주인공 문동은(송혜교)을 지옥으로 끌어들인 학교폭력 가해자였다. 싸구려 속물근성으로 똘똘 뭉친 혜정이 단번에 중후하고 기품 있는 왕비, 그것도 세종대왕의 어머니인 원경왕후로 변신할 수 있을까.
하지만 차주영은 ‘원경’ 첫 방송으로 그런 우려를 단번에 잠재웠다. 중저음의 목소리와 정확한 딕션, 감정선의 변화에 따라 섬세하게 달라지는 눈빛과 우아한 한복 자태까지, 흠잡을 데 없는 왕비의 모습을 보여주며 극의 몰입을 이끌어냈다. 덕분에 ‘원경’은 전국 평균 6.6%(닐슨코리아 기준)의 시청률과 높은 화제성을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원경’을 통해 차주영은 배우로서 비로소 봄을 맞았다. 차주영은 10대에 기획사에 발탁돼 연기 수업을 받고 데뷔해 20대 초반에 이미 정점을 찍는 여느 톱스타들과는 다른 노선을 걸어왔다. 1990년생인 차주영은 아버지의 권유로 중학교 때 말레이시아 국제학교로 유학을 떠나 미국 유타주립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증권사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집안에선 그가 당연히 월가의 금융맨이 될 거라 기대했으나, 차주영은 그런 바람을 뒤로하고 스물여섯 살에 뒤늦게 연기자의 길을 택했다. 그는 tvN 토크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배우로 계약을 체결했는데 아버지가 ‘위약금을 물어줄 테니 그만두라’고 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후 그녀는 2016년 드라마 ‘치즈인더트랩’에서 홍설(김고은)을 괴롭히는 경영대 퀸카 남주연 역으로 데뷔해 얼굴을 알렸다. 무명 생활이 긴 건 아니었지만 단번에 스타가 된 것도 아니다. 천천히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더 글로리’의 혜정 그리고 ’원경’의 타이틀롤을 만났다.
왕관의 무게, 부담감으로 도망가고 싶기도

드라마 ‘원경’으로 인생 캐릭터를 경신한 배우 차주영.
‘더 글로리’ 이후 캐스팅 제의가 많이 들어왔는데, ‘원경’을 선택한 이유는.
살아보지 않은 시대에 대한 환상이 있어서 사극을 해보고 싶었고, ‘원경’ 대본을 받았을 때 내가 꿈꿔온 사극과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태종이나 세종을 다룬 작품은 차고 넘친다. ‘또방원’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그런데 원경왕후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은 없었다. 할머니가 여흥 민씨라 원경왕후의 후손이라는 자부심도 있었고, 누군가의 일생을 다루는 흔치 않은 경험도 해보고 싶었다. 사실 소속사는 당황스러워했다. 잘 알려진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이라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큰 각오가 필요했는데, 지금은 용기 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원경에 대한 인물 연구는 어떻게 했나.
실록을 찾아보기도 했는데, 글로 전해지는 역사라는 게 때로는 불친절하지 않나. 원경왕후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아 비워진 부분을 창조해야 했고, 내가 느끼는 걸 연기로 채워 넣어야 했다. 최명길 선배를 비롯해 그간 사극에서 원경왕후를 연기한 분들의 작품을 찾아봤다. 다만 거기에 잠식되면 새로운 시도에 제한이 있을 거 같아서, 사극이라는 장르에 접근하기 위해 참고로만 활용했다.
작품 속에서 원경은 늘 혼자 모든 것을 헤쳐나가더라. 원경이 위로를 얻는 곳은 어딜까.
원경이라는 여성의 일생이 단지 ‘대단하다’로 표현되기엔 어려움이 있다. 남편의 사랑도 받아봤고 성군(세종대왕)도 길러냈으니 행복했겠다 싶을 수도 있지만 나는 원경왕후가 불행에 가까운 삶을 살지 않았나 싶다. 위로를 받는 건 포기한 거 같다(웃음). 그런데 나도 비슷한 면이 있다. 센 척하는 것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기대는 걸 잘 못 한다. 혼자 하는 게 버릇처럼 익숙하다 보니 변명하는 것도 싫다. 구구절절 말하는 데 에너지를 쓰는 것도 힘들다. 원경도 그랬을 거 같다. 다만 남편의 사랑은 갈구했을 거 같다. 내 선택으로 꾸린 가정, 내 것들에 대한 책임이 있어 보였다.
‘더 글로리’에 함께 출연했던 임지연 씨와 비슷한 시기에 사극의 주인공으로 맞붙었다. 임지연 씨는 “차주영 배우가 작품에서 너무 예뻐 놀랐다”고 하더라.
예쁜 건 모르겠고 왕후로서의 모습만 보여주길 바랐다. 처음엔 왕비 역할을 흉내 내는 데 급급했다. 그런데 지연 씨가 응원을 많이 해줘서 힘이 됐다. 나도 지연 씨가 나오는 ‘옥씨부인전’을 엄청 긴장하면서 봤다. 역시나 모든 걸 내려놓고 열연하는 모습을 보고 ‘잘한다. 대견하다’ 느꼈다. 지연 씨가 이렇게 진심을 다해 연기하는데 무조건 잘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송혜교 씨도 최근 인터뷰에서 “차주영, 임지연 씨 둘 다 너무 잘한다”며 칭찬했던데.
너무 감사하다. 선배야말로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고 현장에서도 책임감이 남다르다. 한참 후배고 따라가는 입장에서 그렇게 내·외면을 잘 관리해서 꾸준히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존경스럽다.
처음 맡은 타이틀롤에 대한 부담도 컸을 것 같다.
부담감이 해소가 안 되더라. 현장에서 숨이 쉬어지지 않고 도망가고만 싶었다. 스트레스로 잇몸이 다 주저앉았다. 하지만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작품이 길을 잃을 것만 같았다. 내가 중심이 확실히 서 있어야 동료 배우, 스태프가 고생을 덜 하니까, 어떻게든 버티려고 노력했다.
의상, 분장 등 현실적으로 힘든 부분도 많았을 텐데.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다 옆 사람이 도와줘야 한다. 옷만 다섯 겹을 입어야 하니 화장실 가는 것도 문제였다. 그 시대 궁궐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싶었다. 가채도 너무 무거워서 목 디스크에 걸릴 정도였다. 내가 썼던 가채는 4~5kg 정도 되는데, 그나마 예전에 선배들이 썼던 것보다는 무게를 많이 줄인 거라고 하더라. 왁스로 머리를 고정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굳기 때문에 물에 불려서 녹여야 한다. 그것 때문에 탈모도 생겼다.
드라마로 잇몸과 머리카락이 손상됐다면 얻은 건 무엇인가.
강인한 여성 원경을 통해 인생을 배웠다. 내가 아직 부족하고, 세상 물정을 몰랐다는 걸 알게 됐다. 한없이 겸손해졌고, 담력을 키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앞으로 배우이자 인간으로서, 더 열린 마음으로 임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이방원 역을 맡은 이현욱 씨와의 호흡은 어땠나.
촬영 기간이 10개월 정도 됐다. 현장에서 사계절을 같이 보내며 많은 일을 겪다 보니 서로 의지가 되고 애틋한 마음도 생겼다. 무엇보다 왕비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시대를 앞서간 여성으로서 원경왕후를 다루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방원의 매력이 희석된 부분이 있다. 참고 희생해준 현욱 오빠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연기 반대하던 부모님, ‘원경’ 이후로 달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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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으로 기획됐고, 대본에도 잠자리 장면이 언급됐다고 알려졌다. 이미 ‘더 글로리’를 통해 노출로 알려졌는데, 선택 당시 부담은 없었나.
과감한 시도를 하는 데 있어서는 용기가 있는 편이다. 때문에 배우 차주영으로서는 문제가 없었다. 다만 (극 중 인물들이) 너무 잘 알려진 분들이고, 그에 대한 시도라 우리조차도 조심스러웠다. 모두가 만족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드라마 속 다른 이야기로 그 우려를 잠재울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있었다.
부모님이 연기를 반대한다고 들었다. ‘원경’ 이후론 좀 달라졌을 것도 같은데.
다행히 이번엔 좋아해주셨다. 촬영 끝나고 집에 들어가도 그냥 “왔어” 한마디만 하고 방으로 들어가는 무뚝뚝한 딸이다. 힘든 일이 있어도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부모님이 이번에는 고생했다는 걸 알아주신다. 현장에서의 어려움뿐 아니라, 자신들도 살아보지 않은 시대의 인물을 연기하는 것에 대한 고충 이런 걸 인정해주시는 것 같다. 다행히 선정적인 장면은 안 보셨다. 굳이 찾아보지 말라고 했다(웃음).
‘원경’을 통해 배우로서 어떤 말을 듣고 싶었나.
“고민 많이 했겠다” “애썼다”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최선이란 말은 안 좋아한다. 나는 최선을 다한다 해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잠을 못 자면서까지 연기를 하고서도 집에 들어가선 ‘아 이것밖에 못 했어’란 생각이 들더라. 연기에 있어서는 부족한 부분도 있다. 후반으로 갈수록 연기적으로 아쉬워서 초반부를 재촬영도 해 봤다. 그런데 왕과 왕비가 처음인 인물들이 처음부터 완성형 말투를 쓰는 것도 어색해 그들도 성장하는 모습으로 그대로 두기로 했다. 하지만 모든 순간이 진심이었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은 없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으니 재충전이 필요할 것 같다.
‘원경’ 촬영이 끝나고 재충전을 해야겠다는 목표 하나로 무작정 떠났는데 어쩌다 보니 사하라사막까지 가게 됐다. 하늘과 고운 모래 그리고 나밖에 없는 그 공간에 서니 모든 것이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돌아와서는 다시 힘든 게 떠올라서 여전히 비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웃음). 촬영하면서 에너지가 그만큼 많이 소진됐나 보다. 완전하게 채우기까지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더 글로리’의 혜정도 그렇고 센 캐릭터가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실제 성격은 어떤 편인가.
내 안에 그런 면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센 캐릭터에 끌리는 게 아닌가 싶다. 실제로는 차분한 성격이다. 그렇지만 밝고 명랑한 면도 있고, 놀 때는 누구보다 잘 논다. 다만 그 에너지가 오래가지는 못한다.
‘원경’ 방영 시기에 맞춰 팬들이 SNS에 주영 씨와 주고받은 짧은 대화 영상을 게시해 화제가 됐다. 팬들과 티키타카가 좋은 것 같더라.
(팬들의 영상이) 화제가 되는 걸 뒤늦게 알았다. 자주 만나는 분들도 아니고, 항상 감사함을 갖고 있었는데 ‘원경’ 방영 시기에 맞춰서 계획적으로 풀려고 하신 건 몰랐다. 드라마에도 도움이 됐고, 너무 감사하다.
차기작으로 도전하고 싶은 캐릭터가 있나.
조만간 ‘원경’과 비슷한 시기에 촬영한 영화 ‘로비’로 극장에서 뵐 수 있을 것 같다. 주변에는 누아르 장르를 하고 싶다고 계속 얘기하고 있다. 분량은 중요하지 않다. 끌리는 포인트 하나만 있으면 잠깐 지나가는 역이라도 좋다. ‘원경’ 끝나고는 연기 못 하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차기작을 보고 있다.
#차주영 #원경 #더글로리 #여성동아
사진제공 고스트 스튜디오
사진출처 tvN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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