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파리패션위크 현장에서 해외 바이어들이 가장 먼저 찾는 쇼룸, 데뷔 시즌의 신진 브랜드를 세계 주요 편집 숍과 유통사에 연결하는 그의 기획력과 세일즈 역량은 이미 업계에 잘 알려져 있다. 던스트, 마지셔우드, 토니웩, 오소이 등 다수의 브랜드가 해외에서 안정적으로 포지셔닝하게 된 데는 그의 전략과 글로벌 네트워크가 유효했다. 빅터쇼룸은 단순한 ‘판매 창구’가 아니라, 브랜드의 정체성을 잡고 시즌 콘셉트와 시그니처 아이템, 해외 바이어의 시선에 맞는 구성까지 함께 만들어가는 ‘디자인 & 세일즈 통합 스튜디오’에 가깝다. 빠르게 변화하는 패션 비즈니스 환경 속에서 그는 어떻게 브랜드를 선택하며, 세계 시장을 무대로 어떤 전략을 펼치고 있을까.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았다.
패션 세일즈라는 영업에 뛰어들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나는 언젠가 크게 될 거야’라는 확신 같은 게 있었어요(웃음). 대학교에 다니던 중 패션디자인과로 전과했고, ‘여기서 1등 못 하면 어디 가서도 1등 못 한다’는 마음으로 매일 성취감을 쌓아갔죠. 졸업 후에는 300개 매장을 가진 대형 벤더(자본이나 기술 따위를 제공하는 회사)에서 3년 정도 세일즈를 했어요. 커머셜 백화점 시스템을 몸으로 익히면서 ‘아, 나는 이 판을 읽는 감각이 있구나’를 처음 깨달았죠. 그러다 중국 광저우 전시장에서 한국 브랜드를 소개하는 일을 맡았는데, 그 자리에서 만난 사람들이 “이 정도면 한국에서 에이전트로 나와야 한다”고 칭찬해줬어요. 사실 저는 원래부터 ‘언젠가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요. 설령 1~2년 돈을 못 벌어도 내 인생에서 충분한 기회비용이 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몸 하나, 노트북 하나 들고 독립했어요. 그렇게 패션 세일즈라는 세계에 진짜로 첫발을 내디디게 됐어요.
한국 디자이너 브랜드의 해외 진출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파리패션위크를 가보면 전 세계 바이어와 브랜드, 세일즈가 한 공간에 다 모여요. 런웨이가 끝나면 쇼룸과 트레이드 쇼에서 홀세일(대량 거래)이 이루어지는데, 거기는 말 그대로 ‘글로벌 동네 마켓’ 같은 곳이거든요. 그 안에서 한국 브랜드들을 보니까 제품력이 정말 뛰어나고, 퀄리티 대비 가격 경쟁력이 30~50% 정도는 있더라고요. 한국에서 이미 5~20년씩 실력을 다져온 디자이너들이라 첫 해외 시즌인데도 컬렉션 완성도가 굉장히 높았어요. 문제는 이 좋은 컬렉션을 어떻게 보여주고, 어떻게 팔고, 어떤 조건으로 거래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거죠. 저는 대형 벤더에서 일하며 그 구조를 이미 몸으로 익혔기 때문에, ‘이 사이를 연결해주는 에이전트, 쇼룸이 있으면 한국 브랜드들이 충분히 통하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저는 그 빈틈에서 기회를 봤고, 그것이 빅터쇼룸의 출발이 되었어요.
빅터쇼룸의 성장 과정이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에이전트로만 일했어요. 브랜드와 함께 트레이드 쇼에 참여해 현장에서 오더를 받는 방식이었죠. 운 좋게도 제가 첫 시즌 참여했던 한 브랜드가 파리 트레이드 쇼에서 60개의 스토어에 입점할 만큼 성공해 업계에서 이름이 금방 알려졌어요. 문제는 그다음이었죠. 주요 바이어들이 “우리는 트레이드 쇼까지 갈 시간이 없다”고 말하기 시작한 거예요. 결국 브랜드와 바이어가 정말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우리만의 공간’, 즉 ‘쇼룸’이 필요해졌어요. 아무래도 트레이드 쇼는 많이 붐비고 시끄러운데, 바이어들은 조용한 공간에서 옷을 천천히 보고 싶어 하니까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빅터쇼룸이라는 형태가 만들어졌어요.
어떤 방식으로 한국 브랜드를 해외 시장에 소개하고 계신가요.
파리패션위크 기간에는 쇼룸과 트레이드 쇼를 중심으로 전 세계 바이어들을 만나요. 바이어들이 쇼룸에 들어오면, 실제 매장처럼 구성해 걸어둔 컬렉션을 보고 먼저 말을 걸어오게 하죠. 바이어가 옷을 보고 “예쁘다, 이 브랜드 뭐야?”라고 물으면 그 후 브랜드 스토리, 가격대, 마진 구조를 설명하며 주문을 받아요. 현장에서 받은 오더는 우리가 직접 정리해 브랜드에 넘기고, 이후 생산과 출고일, 물류 일정까지 전 과정을 컨트롤해요. 또 하나 중요한 축이 글로벌 팝업이에요. 프랑스의 르 봉 마르셰(Le Bon Marché)의 빅터쇼룸 존이 구성되기도 하고, 홍콩 최대 럭셔리 백화점인 레인 크로포드(Lane Crawford)에서 제 이름을 건 팝업을 진행한 적이 있어요. 한 나라의 대표적인 백화점이 특정 쇼룸 디렉터의 이름으로 팝업을 열어준 건 업계에서도 거의 최초 사례였죠. 그만큼 우리의 안목과 눈을 신뢰한다는 의미였죠. 우리는 이런 팝업을 통해 브랜드의 존재감을 한 번에 키우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어요.
해외 바이어들이 ‘한국 브랜드’에서 매력을 느끼는 지점은 어디일까요.
처음에는 유럽 브랜드 대비 30~50% 정도 가격 메리트가 있으니,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도 제품 자체로 설득력이 있었죠. 거기에 한국 브랜드 특유의 디테일과 섬세한 완성도, 그리고 이미 로컬에서 여러 시즌을 거치며 다듬어진 컬렉션 구조가 더해지니 “신인인데 왜 이렇게 컬렉션이 탄탄하냐”는 반응이 많았어요. 요즘은 룩북, 영상, 인스타그램 콘텐츠 수준까지 높아져서 바이어들이 한국 브랜드는 전체적인 완성도가 높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한마디로 ‘예뻐서 사고 싶은 브랜드’가 됐다는 점이 가장 큰 변화죠.
글로벌 진출을 준비하는 한국 디자이너들은 어떤 점이 가장 힘든가요.
가장 현실적인 부분은 일의 진행 방향과 자금 흐름이에요. 해외 홀세일은 오더가 커질수록 생산비와 재료비가 한꺼번에 묶이고, 큰 리테일러일수록 대금 지급이 느려지기 때문에 브랜드 입장에서 초반 몇 시즌은 숨이 턱턱 막힐 수밖에 없거든요. 배송과 통관, 원가 책정, 반품률 같은 기본적인 룰도 익숙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요. 두 번째는 커뮤니케이션과 유연성이에요. 디자이너들은 ‘우리는 이런 옷을 만들고 싶다’라는 크리에이티브가 강한데, 시장이 필요로 하는 지점이나 바이어의 피드백을 얼마나 열어두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서 힘든 부분이 많이 발생해요. 우리가 “이건 해외 마켓에서 조금 조정해야 한다”고 제안했을 때, 그걸 함께 고민하며 수정할 수 있는 브랜드의 태도가 없으면 글로벌 비즈니스를 오래 끌고 가기 어려워요.

홍콩에서 열린 빅터쇼룸 팝업 현장에서의 이민혁 대표.
당연히 사람이 먼저예요. 예쁜 옷을 만든다고 다 되는 게 아니거든요. 소통이 안 되고, 시장의 피드백을 유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글로벌 무대에서는 오래가기 힘들어요. 우리 쇼룸은 단순히 오더를 받아다 전달하는 세일즈 창구가 아니라 컬러와 스타일, 라인 구성까지 브랜드에 깊게 관여하면서 함께 시즌을 만들어가는 파트너예요. 그러려면 서로 믿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죠. 그다음 보는 기준은 브랜드의 잠재력과 새로움이에요. 기존 패션 신에는 없는 ‘새로운 바람’을 가져올 수 있는가, 소비자에게 어떤 새 감각을 줄 수 있는가죠. 빅터쇼룸의 모토가 ‘Bring a fresh breeze to the fashion scene’이에요. 패션 신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자는 의미죠. 우리는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필요로 하는 새로운 무드를 만들어낼 수 있는 브랜드를 찾고 있어요.


빅터쇼룸은 패션 신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세일즈 에이전시는 단순히 ‘옷을 대신 팔아주는 사람’이 아니라 브랜드와 바이어, 그리고 최종 소비자 사이를 설계하는 중개자라고 생각해요. 바이어에게는 왜 이 브랜드를 사야 하는지, 브랜드에는 어떤 이유로 이 제품이 소비자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지를 동시에 설득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바이어의 입장을 넘어, 소비자의 관점까지 상상하면서 컬렉션을 봐요. ‘매장에 들어가면 어떤 고객이 무슨 이유로 이 옷을 집어들까’를 먼저 상상하고, 그 답을 바이어에게 솔루션 형태로 건네는 게 우리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또 하나 중요한 건 정직함이에요. 세일즈를 하다 보면 살짝 과장하고 싶을 때가 많지만, 적어도 ‘뻥’은 치지 말자고 팀에 당부해요. 이 비즈니스는 한 시즌 장사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10년, 20년을 함께 가는 파트너십이기 때문에 신뢰를 잃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지죠.
세일즈 현장에선 조율해야 할 일들이 많을 것 같아요.
브랜드와 바이어 사이에는 늘 간극이 있어요. 디자이너는 본인의 세계관을 지키고 싶어 하고, 바이어는 자기 매장의 고객을 먼저 생각하니까요. 한 브랜드 대표님이 이런 말씀을 했어요. “이 판의 전문가는 우리보다 빅터쇼룸의 대표님이니까, 전적으로 믿고 따르겠다”고요. 그 덕분에 우리가 제안한 방향을 꽤 과감하게 실행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글로벌 주요 리테일에서 한 시즌 안에 동시 입점하는 성과를 냈어요. 반대로 고집이 너무 강해 아무리 데이터를 들이밀어도 변화를 거부하는 경우가 있어요. 예전에는 어떻게든 설득해서 끌고 나가려 했다면, 요즘은 ‘이 브랜드가 아직 준비가 안 됐구나’ 판단하고 한발 물러나는 편이에요. 결국 조율의 핵심은 지금 당장의 성공이냐, 파트너십의 지속가능성이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K-패션이 주목되는 현장에서 느끼는 변화가 있나요.
K-패션이라기보다, 먼저 ‘코리아’라는 국가 이미지가 바뀌었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한국인 하면 스마트하고 시크하고 쿨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꽤 강해졌어요. 다만 K-패션이 전 세계를 지배한다는 식의 표현에는 조금 조심스러운 편이에요. 옷은 음식이나 뷰티보다 훨씬 더 TPO와 문화 코드가 강하게 작동하는 영역이라, 모든 시장에 똑같이 먹히는 스타일이란 없거든요. 다만 글로벌 패션이 전체적으로 너무 지루해졌다는 얘기를 많이 하던 시기에, 한국 브랜드들이 가진 상쾌한 감각과 가격, 퀄리티의 밸런스가 확실한 기회가 되어준 건 사실이에요.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떤 전략이 필요하다고 보시나요.
첫 번째는 ‘급하지 말 것’. 해외 진출이 멋있어 보이겠지만, 동시에 엄청난 자본과 시스템을 요구하는 일이에요. 로컬 시장에서 일정 수준의 매출과 자금 흐름을 확보한 뒤 해외 시장에 발을 내디뎌도 늦지 않아요. 두 번째는 브랜드의 ‘왜’를 더 집요하게 파는 것이에요. 지금은 비슷한 브랜드가 너무 많아요. 그 안에서 바이어가 이 브랜드를 꼭 사야 하는 이유, 소비자가 이 옷을 집어드는 순간 생기는 감정을 명확하게 캐치해야 해요. 우리도 브랜드와 함께 그 지점을 계속 파고들면서 시그니처 카테고리와 핵심 아이템을 정의하고, 시즌마다 그 축을 어떻게 확장할지 고민해요.
세계 시장에 도전하는 패션인에게 전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요.
브랜드 입장에서는 조급함을 조금 내려놓으셨으면 해요. 해외 진출은 ‘체력 싸움’이거든요. 생산, 현금 흐름, 리스크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큰 오더 한 번에 오히려 브랜드가 휘청거릴 수 있어요. 더해 패션 창업자든, 세일즈 에이전트를 꿈꾸든 이 업계에서 오래 버티려면 옷을 진짜 좋아해야 해요. 저는 관심사가 그렇게 많지 않은데, 옷에 대한 관심만큼은 거의 집착에 가깝거든요. 전 세계 스토어를 다니며 시장조사를 하고, 직접 쇼핑을 하면서 ‘이건 새롭다, 이건 지루하다’를 끊임없이 눈에 새기죠. 그 과정이 결국 제 감각과 직업적 무기가 됐어요.
앞으로의 비전과 새로운 프로젝트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단기적으로는 파리에서 이미 구축한 1군 쇼룸의 입지를 더 공고히 하면서, 뉴욕과 미주 마켓까지 확장하는 게 목표예요. 파리 1군에서 미국 1군으로 이어지는 쇼룸으로 자리 잡는 것이죠. 동시에 한국 브랜드에만 국한하지 않고 중국, 유럽 등 다양한 국가의 뛰어난 디자이너들을 발굴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쁜 옷은 국경을 넘어야 한다는 걸 직접 보여주고 싶어요. 저는 명예를 먼저 얻으면 돈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믿는 편이에요. 이 업계에서 ‘아직 약한 위치에 있는 브랜드를 세계 시장과 연결하는 사람’으로서 그 자리를 오래 지키고 싶어요. 언젠가 한국에서도 더로우, 르메르 같은 브랜드가 탄생하길 바라며 그 여정에 작게나마 기여하고 싶습니다.
#빅터쇼룸 #디자이너브랜드 #여성동아
사진 김승환 사진제공 이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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