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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소문대로 유쾌하고 낭만적인 현장, 배우들에게 큰 힘 돼”

장항준 감독의 새로운 페르소나 전미도

김명희 기자

2026. 02. 26

무대에서 오랜 내공을 쌓은 후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포텐을 터트린 배우 전미도가
장항준 감독의 사극을 통해 스크린 접수에 도전한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전미도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새로운 마스크임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연기력과 발성, 그리고 무엇보다 인물에 온기를 불어넣는 내공에 놀란 이들이 많다. “대체 이런 배우가 어디 숨어 있었지?”라는 반응이 쏟아졌지만, 사실 전미도는 이미 무대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온 배우다. 2006년 뮤지컬 ‘미스터 마우스’로 데뷔한 이후 ‘사춘기’ ‘신의 아그네스’를 거치며 연기력을 다졌고, ‘영웅’과 ‘닥터 지바고’를 통해 대극장 공연을 이끄는 주연으로 자리했다. ‘번지점프를 하다’ ‘베르테르’ ‘원스’ ‘맨 오브 라만차’ ‘스위니 토드’ ‘어쩌면 해피엔딩’까지, 굵직한 무대에는 늘 그의 이름이 있었다.

이렇듯 ‘믿고 보는 배우’로 자리매김한 그가 장항준 감독의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통해 2019년 ‘변신’ 이후 7년 만에 스크린에 도전한다. 생애 첫 사극 출연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전미도 외에 유해진, 박지훈, 유지태, 오달수, 박지환, 김수진 등 화려한 배우진을 자랑한다. 장항준 감독은 자신이 구성한 라인업을 뿌듯해하며 “오직 연기만 보고 캐스팅했다”고 밝혔다.

극 중 전미도는 폐위된 단종 이홍위(박지훈)를 끝까지 보필하는 궁녀 매화 역을 맡아 절제된 가운데서도 강한 울림이 있는 연기를 펼친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뒤로하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인물을 선택한 전미도를 만났다.

따뜻하고 메시지 있는 작품에 끌려

시사회 때 눈물을 많이 흘리셨다고요.

메이크업을 하고 간 상태라 ‘절대 울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창피할 정도로 많이 울었어요(웃음). 다들 남자분이라 대놓고 울지는 못하고 슬쩍 눈가로 손이 올라가시던데, 휴지를 나눠드리면서 저 역시 눈물을 참지 못하겠더라고요.



분량이 많은 편은 아닌데, 첫 스크린작으로 이번 작품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해요.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인간적인 따뜻함이 느껴지는 스토리에 매료됐습니다. 그 시기에 제가 받은 다른 대본들은 대부분 잔인하거나 강렬한 소재가 많았거든요. 그런데 이 작품은 마치 가물어가는 마음에 내리는 단비 같았어요. 매화라는 인물 자체도 매력적이었지만, 흥도(유해진)라는 인물이 변화하는 과정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기적인 욕망을 가졌던 그가 단종을 만나며 변화하는 과정이 아름다웠거든요. 매화는 그 곁에서 묵묵히 온기를 더하는 인물이라 여겼고, 이 좋은 배우들과 함께한다면 비중에 상관없이 뜻깊은 공부가 될 거라고 생각했죠. 첫 단추를 잘 꿴 것 같아 다행입니다.

장항준 감독과 함께 작업한 소감은 어떤가요.

소문대로 정말 유쾌했어요. 현장 분위기를 항상 밝게 만들어주시는데, 이런 점이 배우들에게는 큰 힘이 되거든요. 지방 촬영이라 가능했을 수도 있지만, 단순히 일만 하고 헤어지는 게 아니라 다 같이 숙식하고 아침저녁으로 얼굴 마주하며 밥 먹고 술 한잔 기울이면서 사적으로 깊어지는 과정이 낭만적이기도 했어요. 연극 현장과 비슷하단 생각도 들었습니다.

평소 유해진 배우의 팬이라고 밝혔는데, 실제로 함께해보니 어떻던가요.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유해진 선배 때문이었어요. 선배님이 출연하는 작품은 거의 챙겨봤고, 특히 ‘말모이’라는 작품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현장에서 선배님은 기대 그 이상이었습니다. 테이크마다 연기를 미세하게 변주하며 장면을 살아 숨 쉬게 만드시더라고요. 제가 아이디어를 내면 “미도 씨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봐”라며 판을 깔아주셨고, 어떤 리액션도 다 받아주셨죠. 선배님의 내공이 있었기에 저도 매화로서 더 자유롭게 숨 쉴 수 있었습니다.

단종 역을 맡은 박지훈 배우와의 연기 호흡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첫 미팅 때는 탈색 머리를 한 영락없는 아이돌 가수의 모습이었어요. 그래서 ‘아, 그 나이대에 정말 인기 많은 친구구나’ 정도로만 생각했죠. 그런데 현장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더라고요. 머리를 검게 염색하고 살이 쏙 빠진 채로 등장했는데, 첫 촬영 장면에서 홍위의 의상을 입고 밥상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어요. 처연한 실루엣이 너무 짠해서, 금세 매화의 마음이 되어버렸죠. 실제로는 매화가 ‘아, 이제 유배를 가는구나’라고 직감하는 장면이 더 있었는데 편집됐어요. 그 신에서 일부러 울 준비를 하고 간 건 아니었는데, 지훈 씨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그 친구 눈빛에서 두려움과 체념이 동시에 느껴져서, 연기가 아니라 실제 인물을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촬영 기간에 지훈 씨가 제 공연을 보러 왔는데, 그때 분장팀이 ‘내 마음속에 저장(박지훈이 만든 유행어)’의 주인공이라고 알려주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해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현장에서 느꼈던 감정이 이해가 됐습니다.

‌데뷔 후 첫 사극에 도전한 전미도. 배역의 비중에 상관 없이 인간적인 내용에 매료돼 작품을 선택했다고 한다.

‌데뷔 후 첫 사극에 도전한 전미도. 배역의 비중에 상관 없이 인간적인 내용에 매료돼 작품을 선택했다고 한다.

임신 계획 중 ‘슬의생’ 오디션, 선물처럼 찾아온 기회

첫 사극이라 의상이나 톤 설정 등 고생스러운 부분이 많았을 텐데요.

사극이 힘들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정말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요(웃음). 우선 의복이 계절을 거스르는 경우가 많아 고생했고, 가체를 쓰는 건 단 하루 촬영이었는데도 목에 엄청난 무리가 왔어요. 매일 그런 차림으로 촬영하시는 분들이 존경스러울 정도였죠. 연기적으로는 대사의 뉘앙스를 살리는 게 가장 큰 숙제였습니다. 사극 특유의 톤이 연극적인 면이 있어 친숙하기도 했지만, 아주 짧은 어미의 변화만으로도 인물의 신분이나 감정이 달라지더라고요. 궁에서 오래 생활한 매화라는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 궁중 예법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무대에서 정점을 찍고 드라마와 영화로 넘어왔는데 새롭게 깨달은 바가 있나요.

인생에서는 선물처럼 기회가 찾아오는 것 같아요. 임신 계획을 하던 중에 ‘슬의생’ 오디션 제안을 받고 작은 에피소드에라도 출연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뜻하지 않게 기회가 열렸어요. 드라마와 영화로 활동 영역을 넓히니 다시 신인이 된 기분입니다. 예전엔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면 연기가 쉬워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내 연기가 고착되지는 않을까’ ‘상상력이 굳어버리지는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커졌습니다. 연기는 열정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계단식으로 천천히 좋아지는 것 같아요. 한 계단을 오르기 위해 지루한 평지를 한참 걷기도 하고, 때로는 뒤로 밀려나기도 하면서 조금씩 단단해지죠.

한명회 역을 맡은 유지태 배우는 천만 관객을 기대한다고 했는데, 흥행 목표는 어느 정도인가요.

요즘 모든 영화인의 목표가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거라고 합니다. 장항준 감독님이 만약 ‘천만 영화 감독님’이 되신다면 어떤 모습일지 저도 궁금합니다(웃음).

많은 작품에 출연한 편은 아닌데,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뭔가요.

잔인한 걸 잘 못 보기 때문에 자극적인 대본은 지양하는 편이에요. 스스로가 차마 보지 못하는 걸 누군가에게 보라고 권할 수는 없으니까요. 대신 전체적인 이야기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좋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글을 선호합니다. 그 안에서 제가 해보지 않았던 캐릭터라면 더 우선순위에 두고요. 또 한 가지 고민은 공연과의 병행이에요. 공연은 보통 1~2년 전부터 일정이 잡히는데, 드라마나 영화는 일정이 유동적이라 예측이 안 되더라고요. 공연팀에 계속 기다려달라고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하고 싶은 공연이 있으면 드라마나 다른 일정을 포기하고 결단을 내리는 편입니다.

그렇게 선택한 작품 중 특히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요.

연극 ‘신의 아그네스’ ‘메피스토’ ‘오슬로’, 뮤지컬 ‘스위니 토드’ ‘어쩌면 해피엔딩’… 다 너무 좋았죠.

고(故) 윤석화 선배에게 더 자주 연락하지 못해 후회

‘신의 아그네스’를 함께한 윤석화 배우가 얼마 전 별세하셨는데, 마음이 무거우실 것 같아요.

장례식장에서 선생님의 목소리가 담긴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그 공간 자체가 마치 선생님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떠나시는 길까지 오랜 인연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해주셨구나 싶었죠. 사실 선생님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기 전에 자주 연락드리고 감사를 표현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너무 후회됐어요. 그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편찮으신 상태여서….

초연 멤버로 참여했던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토니상(미국에서 연극, 뮤지컬 작품에 주는 최고의 상)을 받았을 때 기분도 궁금합니다.

대본도 나오기 전 워크숍 단계부터 참여했던 작품이라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전율이 돋았어요. ‘한국의 이야기가 세계에서도 통하는구나’라는 자부심을 느꼈고요. 최근 10주년 공연에 다시 참여했어요. 나이가 들어 로봇 연기를 하며 에이징을 맞추는 게 숙제였지만(웃음), 여전히 좋은 작품이라는 걸 확인하는 과정 자체가 행복했습니다.

‘슬의생’ 채송화 캐릭터가 워낙 강렬하게 각인돼 있는데요. ‘착한 이미지’에 대한 부담은 없나요.

부담이 아주 큽니다(웃음). 실제 저는 그렇게 완벽하거나 선한 사람만은 아니거든요. 채송화라는 인물이 가진 결점 없는 완벽함 때문에 저를 너무 예쁘게만 봐주시는 것 같아 가끔은 뜨끔하기도 해요. 그래서 언젠가는 아주 강렬하고 센 역할을 맡아 그 이미지를 완전히 깨보고 싶다는 욕심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사랑조차 배우로서 누릴 수 있는 축복이라 생각하며 감사히 받아들이고 있어요.

‘슬의생’ 시즌 3는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요.

감독님과 작가님께서 “5년 안에 하겠다”고 약속하셨거든요. 저희 배우들도 단체 채팅방에서 늘 그 이야기를 나눠요. 모두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송화가 익준이와 어떤 의사로 살아가고 있을지 저 역시 너무나 궁금하거든요. 조금만 더 믿고 기다려주시면 좋은 소식이 있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배우로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는 무엇인가요.

제가 80세가 넘었을 때 어떤 모습으로 연기하고 있을지 궁금해요. 과거 고(故) 장민호 선생님의 공연을 본 적이 있는데, 자연스럽게 연기하시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거든요. ‘나도 저 나이가 되었을 때 저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그때부터 스스로에게 던져왔습니다. 유명해지거나 큰돈을 버는 것보다 장르와 역할에 구애받지 않고 가늘고 길게, 오래도록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당장의 성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제 앞에 놓인 계단을 묵묵히 올라가려 합니다.

#전미도 #장항준 #여성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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