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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아이돌 응원봉으로 다시 만난 세계

윤혜진 객원기자

2024. 12. 23

아이돌 팬덤의 응원봉이 새 쓰임을 얻었다. 콘서트도, K-팝 시상식도 아닌데 전국에서 열린 집회마다 알록달록 응원봉 자랑 쇼가 한바탕 펼쳐졌다.

전국 곳곳에서 반짝인 응원봉 불빛은 모인 군중의 규모를 가늠케 했고, 그 불빛은 흔드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업’ 상태로 만들었다.

전국 곳곳에서 반짝인 응원봉 불빛은 모인 군중의 규모를 가늠케 했고, 그 불빛은 흔드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업’ 상태로 만들었다.

2024년 12월 느닷없이 대한민국은 아이돌 응원봉이 있는 집과 없는 집으로 나뉘었다. 우리 집은 ‘있는’ 집이다. 그것도 무려 에이티즈 응원봉 ‘라이티니’ 버전 1과 버전 2, 블락비 응원봉 ‘꿀봉’까지 3개가 있다. 예전에는 “그 돈 주고 그걸 왜 사냐”고 눈을 흘기던 남편이 윤석열 대통령 탄핵 집회를 앞두고는 “어떤 게 발광력이 가장 좋으냐”며 탐냈다.

집회에 등장한 갖가지 팬덤의 응원봉은 최악의 상황에서 폭력적으로 흐를 수 있는 시위를 비폭력 단체 행동으로 수위 조절 해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일단 촛불처럼 바람에 꺼질 일이 없어 확고한 의지를 표현해주고, 처음 본 사람이라 해도 같은 그룹의 응원봉을 들고 있으면 그 순간부터 더 이상 남이 아니다. 나아가 다양한 팬덤의 대통합도 이뤘다. 특히 응원봉을 든 K-팝 팬덤의 등장은 정치의 문턱을 확 낮췄다. 집회에서 들으면 좋을 ‘탄핵 플레이리스트’를 꾸리고 SNS상에 공유함으로써 더 이상 정치는 나와 상관없는 딱딱한 주제가 아니라 내 삶 안으로 들어온 일부가 됐다. 촛불집회를 주최한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의 행사기획팀은 젊은 층의 호응을 이어가고자 아예 듣고 싶은 노래를 구글폼을 통해 신청받기도 했다. 그들이 내건 추천곡 조건 중 첫 번째가 ‘함께 떼창 하기 좋은 노래’였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이하 ‘다만세’)와 로제의 ‘APT.’, 에스파의 ‘Whiplash’, 세븐틴 유닛 그룹 부석순의 ‘파이팅 해야지’ 등이 집회 참석자들의 흥을 돋웠다. 12월 14일 오후 윤 대통령의 2차 탄핵소추안이 가결됐을 때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울려 퍼진 노래도 민중가요가 아닌 소녀시대의 데뷔곡 ‘다만세’였다. 소녀시대가 2007년 발표한 ‘다만세’는 2016년 이화여대 학생들이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반대 농성을 벌일 당시 경찰과 대치하며 부른 이후 집회 때 부르면 힘이 나는 노래로 인기다. 실제로 음원 플랫폼 멜론에 따르면 이번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난 2024년 12월 3일을 기점으로 일주일간 ‘다만세’ 청취자 수는 직전 일주일(11월 26∼12월 2일)보다 23% 증가했다. 예컨대 이전의 시위가 “힘드냐” “나도 힘들다”의 무거운 분위기였다면, 응원봉을 든 시위는 “우리 힘든데 ‘노동요’ 들으며 힘낼래?” 같은 식이다.

확 바뀐 새 집회 문화에 대해 세계 곳곳에서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12월 10일 ‘K-팝 야광 응원봉이 한국의 탄핵 요구 시위에서 불타오르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MZ세대의 적극적인 참여로 비폭력과 연대의 새로운 시위 문화가 탄생했다”며 “K-집회 문화가 차세대 민주주의를 이끌 것”이라고 호평했다. AP통신은 “젊은 시위대는 전통적으로 음악 콘서트에서나 볼 수 있었던 K-팝 응원봉을 들고 거리를 점령해 정치 시위의 새로운 트렌드를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색깔 소유권’ 논란 많은 상징색 가고, 응원봉의 시대로

‘아는 형님’과 ‘집대성’에 나와 서로 응원봉의 시초라고 말한 세븐의 7봉과 빅뱅의 뱅봉(위). 응원봉을 든 팬들이 하나둘 모여 이룬 전국 응원봉 연대.

‘아는 형님’과 ‘집대성’에 나와 서로 응원봉의 시초라고 말한 세븐의 7봉과 빅뱅의 뱅봉(위). 응원봉을 든 팬들이 하나둘 모여 이룬 전국 응원봉 연대.

응원봉 이전에는 H.O.T.의 흰색, god의 하늘색, 신화의 주황색 등 팬클럽마다 상징색이 있었다. 학창 시절 다양한 가수가 출연하는 ‘드림콘서트’에서 H.O.T.를 상징하는 흰색 풍선을 열심히 흔들던 기억이 난다. 참석 인원이 적은 팬클럽에서는 한 손에 2개씩 풍선을 들고 흔들었다. 조금이라도 ‘쪽수’가 많아 보이도록 해 내 가수 기를 살려주기 위한 방법이었다.

팬들을 하나로 만들어주던 상징색 문화는 아이돌 그룹 수가 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상징색을 둘러싼 소유권 다툼이 일어난 것이다. 아무리 펄이나 파스텔을 섞고 명도 차이를 둔다 해도 어두운 공연장에서는 팬들이 들고 있는 풍선 색이나 응원봉 색이 거기서 거기로 보인다. 핑크 계열의 ‘파스텔 로즈 하트’를 공식 색상으로 써온 소녀시대 팬들은 YG엔터테인먼트에서 신인 투애니원의 공식 색으로 ‘핫 핑크’를 정하자 이에 항의하기도 했다. 결국 B.A.P의 ‘스프링 그린’, 샤이니의 ‘펄 아쿠아 그린’, SS501의 ‘펄 라이트 그린’ 등 더 이상 색상에 이름을 붙이기도, 공연장에서 응원봉 불빛을 구별하기도 힘든 지경에 이르자 상징색의 시대는 저물고 응원봉과 로고, 캐릭터의 시대로 넘어갔다.

응원봉의 시초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가수 세븐의 ‘7봉’과 빅뱅의 ‘뱅봉’ 2가지 파로 나뉜다. 풍선 아닌 도구에 방점을 둔다면 숫자 7 모양으로 꺾은 세븐의 발광 스틱이 가장 먼저인 셈이고, 현재의 응원봉과 비슷한 입체 디자인은 빅뱅의 지드래곤이 처음 만들었다. 요즘은 응원봉이 점점 진화해 봉 스타일에서도 벗어났다. 마마무의 ‘무봉’은 정말 무를 닮았고, 플레이브의 응원봉은 멤버들이 운동을 좋아하는 점에 착안해 아령 모양이다. 응원을 하며 사래레(사이드 래터럴 레이즈) 자세까지 따라 할 수 있어 운동 효과를 더해 일석이조다. 선명한 발광력은 물론, 불빛 색과 반짝이는 스타일도 다양하다. 흔들면 흔드는 대로 색이 변하고, 중앙 원격 제어를 통해 좌석별 불빛 지정과 시간차 파도타기 등 다양한 연출이 가능하다. 한동안 덕질을 쉬다가 4세대 아이돌 에이티즈의 콘서트에 갔을 때 관객석을 보며 받은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원격 제어가 되지 않는 ‘라1티니’ 때도 거대한 오로라의 물결이 예뻤지만, 업그레이드된 ‘라2티니’는 아예 노래에 맞춰 좌석 구역별로 불빛이 변했다. 마치 팬석이 공연의 한 요소가 된 듯했다. 투모로우바이투게더 ‘모아봉’의 경우 팬덤 ‘모아’ 찾기 기능이 있다. 모아 찾기 버튼을 누르면 반경 5m 안에서 응원봉끼리 서로를 인식해 주변 모든 모아의 응원봉 불빛이 몇 초간 초록색으로 깜박인다.

본격적인 ‘봉꾸(응원봉 꾸미기)’도 가능하다. 나만의 봉으로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응원봉의 불 들어오는 부분이 쉽게 열리게끔 출시하거나 꾸미기용 액세서리를 별도 판매한다. 뉴진스의 ‘빙키봉’은 눈 자리에 구멍을 내 멤버 이름 글자나 다양한 모양의 파츠를 갈아 낄 수 있다. 파츠는 별도로 판매하고, 음악방송 방청에 참여하는 팬에게 빙키봉 커스텀 아이템을 주기도 한다. 최근 리뉴얼된 있지의 ‘라이트링’은 팔에 낄 수 있는 사이즈의 링인데, 커스텀 커버 부분 뚜껑을 빼고 고양이 귀를 달 수 있다. 링에 낄 수 있는 참과 귀를 별도로 판매하나 귀는 워낙 인기라 구하기 쉽지 않다는 후문.

예쁘고 흥을 돋워주는 응원봉은 이제 콘서트에서 나아가 집회 필수품으로도 자리 잡았다. 다만 보통 응원봉 본 품이 4만 원대이며, 액세서리와 응원봉 전용 케이스 등까지 구입하면 제법 큰 비용이 나간다. 이에 이번 탄핵 집회에서 응원봉이 화제가 된 후 아이돌 팬들이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집회에 참여하려는 부모님이 자꾸 응원봉 가격을 물어보는데, 팬클럽 한정 첫 구매 가격이 2만 원이라고 입을 맞추자”는 우스갯소리가 올라오기도 했다. 비싼 가격과 그에 어울리지 않는 내구성, 고장 났을 때 번거로운 AS 과정 등 단점도 팬들만의 비밀로 하자고 했지만,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들켜도 크게 혼낼 부모는 많지 않을 듯하다. 그 비싸고 소중한 응원봉이 부서질지라도 더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집회 현장으로 들고 나간 마음은 돈보다 귀하기 때문이다.


#응원봉 #탄핵 #여성동아

사진출처 전국 응원봉 연대 SNS ‘아는형님’ ‘집대성’ 유튜브 챕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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