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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느린 속도로나마 계속 쓸 것, 삶이 허락하는 한 가장 멀리”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시상식 취재 뒷얘기

김소민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2024. 12. 23

노벨 주간을 맞아 스톡홀름 시청사 벽면에는 미디어 파사드로 한강 작가의 얼굴이 걸리고, 그의 책들이 서점 내 베스트셀러 매대를 채웠다. 스웨덴에서 발견한 한강과 노벨 주간의 풍경, 그리고 특별한 울림이 있었던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시상식 참관기를 소개한다. 

한강 작가를 비롯한 노벨상 수상자들의 업적을 기리는 미디어 파사드가 스톡홀름 시청사를 장식하고 있다.

한강 작가를 비롯한 노벨상 수상자들의 업적을 기리는 미디어 파사드가 스톡홀름 시청사를 장식하고 있다.

스웨덴에서 발견한 한강

2024년 12월 5일(현지 시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시상식을 앞두고 방문한 스웨덴 스톡홀름 중심부 쿵스가탄에 위치한 2층짜리 대형 서점. 문을 열고 열 걸음 들어서자 정면에 한강 작가의 책을 따로 모아둔 매대가 눈에 들어왔다. 지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바로 왼편에 있어 오르내릴 때마다 눈길이 갈 법한 위치였다. 매대엔 영어 또는 스웨덴어 버전 ‘작별하지 않는다’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흰’ ‘희랍어 시간’이 진열돼 있었다.

이 서점 베스트셀러 매대엔 한강 작가의 책이 소설 분야 1~4위를 차지했다. ‘작별하지 않는다’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흰’ 순이었다. 서점 직원 울리카 에클로브 씨는 “한강의 책이 1시간에 다섯 권은 꾸준히 나간다. 특히 ‘채식주의자’가 인기”라고 귀띔했다.

스톡홀름의 택시 운전기사 요반 작식 씨도 한강 작가를 알고 있었다. 그는 “알프레드 노벨과 그룹 아바, 축구선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스웨덴이 배출한 유명인 3인방”이라며 “올해 노벨상 수상자가 누군지 라디오에서 계속 얘기해준다. 운전하면서 한강의 이름을 들어봤다”고 했다.

‌한강의 이름은 노벨문학상 수상 이전부터 애독자들 사이 화제였다고 한다. 스톡홀름왕립드라마극장은 2023년 가을 ‘채식주의자’를 원작으로 만든 연극을 올렸다.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연극 중 하나였다. 객석이 300~322석가량이었고, 총 17회 극을 올렸는데 절반 정도 회에는 객석이 꽉 찼다고. 극장에서 일하는 줄리아 콜레마이넌 씨는 ‘채식주의자’를 연극을 올리기 전에 친구가 추천해줘서 읽었다고 했다. 그는 “폭력적이지만 시적으로 아름답다고 느꼈다”며 “연극은 원작보다 더 강렬했다. 뺨을 때리는 장면에선 관객들이 놀라서 숨을 죽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노벨상 시상식은 매년 노벨의 기일인 12월 10일에 열린다. 시상식 전후로 일주일간 각종 행사가 열리는데 이를 ‘노벨 주간(Nobel week)’이라 부른다. 특히 시상식 직후 열리는 만찬 행사는 스웨덴 공영방송에서 4시간 40분 연속 생중계할 정도로 관심을 모은다. 한강 작가 역시 기자회견, 강연, 시상식, 다문화학교 방문 등 공식 일정만 11개를 소화했다. 노벨 재단은 올해 스웨덴을 포함해 전 세계 25개 언론사를 시상식에 초청했다. 동아일보는 한국 언론사 중 한 곳으로 초청받아 참석했다.

스톡홀름은 위도가 북위 59도로 높아 겨울철인 12월에는 오후 3시면 해가 진다. 어슴푸레한 빛조차 없이 새카만 밤이 된다. 이 땅에 빛을 내릴지 어둠을 내릴지 결정하는 태양의 존재를 새삼 의식하게 될 정도다. 사위가 어두우면 빛에 시선이 몰리기 마련. 시민들의 이목은 노벨 주간 펼쳐지는 다양한 행사와 전시에 집중된다.

스톡홀름 워터프런트 콘그레스센터에 화가 니클라스 엘메헤드가 그린 한강 작가를 비롯한 2024 노벨상 수상자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스톡홀름 워터프런트 콘그레스센터에 화가 니클라스 엘메헤드가 그린 한강 작가를 비롯한 2024 노벨상 수상자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대표적으로 스톡홀름 시내 주요 장소엔 ‘노벨 라이트(Nobel Light)’라 불리는 기념 조명이 설치됐다. 스톡홀름 시청 외벽엔 역대 노벨상 수상자들의 초상화가 빛으로 새겨졌다. 약 100m 떨어진 건너편 부두에서 외벽을 향해 빛을 쏘는 방식이었다. 스톡홀름 시청은 노벨상 만찬 행사가 열리는 역사적 공간이자 타워 높이가 106m에 이르는 랜드마크다. 버스 창밖으로 고개만 돌리면 스톡홀름 어디서든 보인다. 이곳에 한강 작가의 초상화와 “하얀 것은 본래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것 속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White, by nature is nothing at all, but within that nothingness, everything exists).”라는 소설 ‘흰’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부둣가에 넋을 잃은 채 서서 조명을 바라보는 시민을 찾기 어렵지 않았다.

12월 7일 오후 5시 스웨덴 한림원. 외벽 조명 아래 한강 작가의 강연을 알리는 포스터가 붙었다. 한림원 건물이 있는 곳은 스톡홀름 구시가지이자 대표 관광지인 감라스탄 중심부다. 평소에도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하는 관광객들로 흥성거리는 곳이다. 사람들이 포스터 앞에서 사진을 찍자 핀란드와 노르웨이에서 놀러 온 관광객도, 어린 딸을 목말 태우고 나온 스톡홀름 시민도 “무슨 행사인데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 있느냐”며 관심을 보였다. ‘빛과 실’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1시간 강연엔 사전 신청자 2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한강 작가는 1979년에 자신이 쓴 시의 일부를 소개했다. 2023년 1월 창고를 정리하다 낡은 구두 상자에 담긴 유년 시절의 일기장 사이에서 이 시를 발견했다는 그는 “여덟 살 아이가 사용한 단어 몇 개가 지금의 나와 연결돼 있다”며 “1979년 4월의 아이는 사랑은 ‘나의 심장’이란 개인적인 장소에 위치한다고 썼고, 그 사랑의 정체에 대해선 ‘우리의 가슴과 가슴을 연결하는 금실’이라고 대답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작가는 자신의 모든 질문이 언제나 ‘사랑’을 향해 있었다고 돌아봤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2021년 가을까지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란 두 질문이 나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왔다”며 “하지만 첫 소설부터 최근의 소설까지 어쩌면 내 모든 질문들의 가장 깊은 겹은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고, 그것이 내 삶의 가장 오래고 근원적인 배음(背音·낭독할 때 뒤에서 들려주는 음향)이었다”고 했다. 오후 6시 30분 작가가 강연을 마치고 나올 때, 출입구 앞 노란빛 조명 아래 둥글게 반원으로 서서 기다리던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박수를 보냈다.

검정색 드레스를 입고 블루 카펫에 선 한강 작가

노벨 주간의 축제 분위기는 하이라이트인 시상식에서도 이어졌다. 시상식이 열린 스톡홀름 콘서트홀엔 하객 1300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수상자의 가족, 친지거나 초청객, 수상국 대사, 취재진 등이었다. 일부는 각국 전통 의상을 입고 왔는데, 마치 국가대표가 된 듯 옷을 소개하고 옆 사람과 사진을 찍고 포옹했다. 엄숙하기보단 들뜨고 활기찬 축하의 분위기였다.

노벨상 시상식 직후 스톡홀름 시청사에서 열린 노벨상 연회.

노벨상 시상식 직후 스톡홀름 시청사에서 열린 노벨상 연회.

식이 시작되자 올해 수상자 11명이 일렬로 무대에 입장했다. 선두에 선 사람은 올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이자 최고령 수상자인 존 홉필드(91)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그는 갈색 뉴발란스 운동화를 신고 한 손에 등산용 지팡이를 짚은 채 등장했다. 노학자의 걸음은 더뎠다. 나머지 10명은 그의 보폭에 맞춰 입장했다. 하객 1300명도 내내 서서 함께 기다렸다. 홉필드 교수가 국왕, 객석, 한림원 위원 순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할 때 객석에선 박수뿐만 아니라 입으로 내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노학자가 얼굴 가득히 미소를 띤 모습이 2층 발코니석에서도 선명히 보였다.

연회에 참석해 영어로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는 한강 작가.

연회에 참석해 영어로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는 한강 작가.

이날 한강 작가는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에 이어 네 번째로 상을 받았다. 노벨상 124년 역사상 아시아 여성의 문학상 수상은 한강이 처음이다. 앞서 스웨덴에서 열린 기자회견, 강연 등에서 검은색 옷을 입은 한강 작가는 이날도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노벨상 시상식을 상징하는 블루 카펫을 밟았다. 스웨덴 한림원 종신 위원이자 소설가인 엘렌 맛손이 한강의 작품 세계를 간략히 소개한 뒤 칼 구스타프 16세 국왕이 직접 메달과 증서를 수여했다. 맛손 위원은 “한강의 글에서는 흰색과 빨간색이 만난다. 흰색은 슬픔과 죽음의 색이며, 빨간색은 생명을 뜻하지만 고통과 상처를 의미하기도 한다”며 2가지 색으로 한강의 작품 세계를 설명했다. 양피지(羊皮紙)로 만든 증서에는 스웨덴 한림원과 알프레드 노벨의 이름 아래 한강의 영문 이름이 금색으로 새겨졌다.

오후 5시 시상식을 마치고 나올 땐 그새 어둠이 내려 깜깜했다. 하객들은 못내 아쉬운 듯 바로 흩어지지 않고 콘서트홀 앞 광장에서 사진을 찍었다. 웃는 얼굴을 많이 봐서일까. -2℃의 날씨가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간 우리에게 노벨상은 끝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래전 사망한 작가의 약력 끝에 붙는 마지막 이력 같은 것. 하지만 현장에 와서 보니 노벨상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2014년 열일곱 살의 나이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올해 노벨 주간에도 등장했다. 말랄라의 수상 당시 소감이 대형 조명으로 만들어져 의회 앞에 설치된 것. 노벨 라이트의 일환이다. “Let this be the last time that a child loses life in war(이번이 아이가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 마지막이 되게 해주십시오).” 말랄라의 당부는 올해 스톡홀름을 찾은 시민들의 사진기에 새로이 담겼다. 주변이 어두울수록 선명하게 빛났다.



전 세계 동시적으로 소비되는 K-문학

스톡홀름 한 서점에 진열된 한강 작가의 작품 코너.

스톡홀름 한 서점에 진열된 한강 작가의 작품 코너.

1990년대생인 기자는 평소 한국이 변방이라는 인식을 잘 하지 않는다. 2000년대 이후 태어난 세대는 더 그렇다고 알고 있다. 스톡홀름 전자제품 대리점 안에서 ‘오징어 게임’ 영희 조형물을 만나거나 일주일간 묵은 호텔 로비에서 BTS의 노래 ‘Permission to Dance’가 흘러나오는 걸 자연스럽게 느낀다.

그래서인지 이번 스웨덴 출장에서 깨달은 것은 단순히 ‘우리가 변방에서 중심이 됐다’보다 ‘세계가 얼마나 동시대적이 되었는가, 세계인이 문화를 소비하는 시차가 얼마나 줄었는가’에 가깝다. 한국에 최근 번역 출간된 아일랜드 작가 폴 린치의 소설 ‘예언자의 노래’는 스웨덴 서점에도 스웨덴어로 번역돼 진열돼 있었다. 한국에서 2024년 연말 번역 출간돼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의 회고록 ‘자유’와 유발 하라리의 ‘넥서스’는 스웨덴 서점에서도 비문학 분야 1, 2위에 올라 있었다. 지금 한국에서 읽는 걸 스웨덴에서도 읽고, 지금 스웨덴에서 읽는 걸 한국에서도 읽는다. 한날한시에.

통상 낯선 문화를 받아들이는 덴 순서가 있다고 한다. 가령 화장품보단 음식이 빠르다. 아무렴 음식 한번 맛보는 게 얼굴에 화장품 바르는 것보다 간단하다. 마찬가지로 3분짜리 노래 한번 들어보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짧게는 하루, 길게는 일주일 이상 투자해야 하는 문학책을 수용하는 덴 시간이 걸린다. 그간 K-팝, K-드라마, K-영화가 차례로 소비됐다면 이제 K-문학이 동시적으로 소비되는 때가 온 것이다. 노벨 주간 한강 작가가 참석하는 행사에는 어디든 작가와 소통하려는 사람들이 모였다.

‌현지에서 만난 출판사나 에이전시 관계자들은 요즘 한국에선 어떤 신간이 인기 있는지, 한국인들은 어떤 책을 읽는지 궁금해했다. 종합 독서율 43%, 성인 10명 중 6명이 1년간 책을 한 권도 안 읽는다고 하는데 ‘한국인이 읽는 톱 10’ 지표에 힘이 실릴까 싶었다. 노벨문학상으로 일어난 독서 붐이 책을 계속 읽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세계에서 K-문학이 읽히길 바란다면 우리부터 K-문학을 읽어야 할 테니, 축제가 끝난 뒤엔 원래 하던 일을 계속 잘해야 한다.

한강 작가도 축제가 끝난 뒤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2024년 10월 노벨문학상 발표 직후 포니정 시상식에서 작가들의 황금기가 60세까지라고 가정할 때 자신에겐 6년이 남았고, 앞으로 6년 동안은 지금 마음속에 굴리고 있는 책 세 권을 쓰는 일에 몰두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비슷한 다짐을 스톡홀름에서도 하는 것 같았다. 노벨문학상 수상이 그의 마지막 이력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나는 느린 속도로나마 계속 쓸 것입니다. 지금까지 쓴 책들을 뒤로하고 앞으로 더 나아갈 것입니다. 어느 사이 모퉁이를 돌아 더 이상 과거의 책들이 보이지 않을 만큼, 삶이 허락하는 한 가장 멀리.”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 중

#노벨문학상 #한강작가 #여성동아

‌사진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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