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오락 프로그램에서 막춤을 보여주며 사랑을 받았던 아나운서 오영실(40)이 지난 2월 초 4년간의 미국 생활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왔다. 그는 귀국과 동시에 EBS ‘생방송 60분 부모’ MC를 맡아 분주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의 가족이 미국 워싱턴 샤론츠빌로 떠난 것은 지난 2002년 9월. 삼성의료원 외과 전문의인 남편 남석진씨(41)가 1년 반 동안 미국 워싱턴 버지니아대학교 교환교수로 가게 되자 그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가족 모두 유학길에 오를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현재 큰아들 혁수(14)는 미국에 남아 공부를 계속하고 있고 둘째 종수(11)는 서울교대에 마련되어 있는 ‘귀국 자녀 반’에 5학년으로 입학해 한국 교육에 적응하고 있다고.
“큰아이가 미국에 남기를 원해서 ‘유학비자가 나오면 남고 그렇지 않으면 같이 한국으로 돌아오자’고 했는데, 아이 뜻대로 됐어요. 미국에 있는 동안 가족처럼 지내던 전도사 부부한테 아이를 맡겨놓아서 안심이 되고요. 둘째는 1년 동안 ‘귀국자녀반’에서 적응기간을 가진 뒤 심사를 거쳐 내년에 일반 아이들과 똑같은 교육을 받게 돼요. 형 없이 혼자 외로울까봐 요즘 저희 부부가 둘째 아이에게 신경을 많이 쓰고 있죠. 저와 남편이 번갈아가면서 공부도 직접 봐주고 있는데, 한 가지를 설명해주려면 말의 어원부터 설명해야 하니까 입이 다 아파요. 하지만 그 덕분에 남편이 일찍 집에 들어오고 있어 아이가 무척 좋아하죠. 저 역시 예전과 달리 집안에 조신하게(?) 있는 편이라 남편도 ‘한국에 돌아오면 예전처럼 온갖 모임에 다니면서 사교성을 발휘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라며 흐뭇해해요(웃음).”
아이들을 비교하는 질문 던지자 깜짝 놀라던 미국 교사
처음 미국에 도착해 6개월 동안은 영어 장벽 때문에 가족 모두 힘들었다고 한다. 서로 오가는 말이 편치 않아 부부싸움도 종종 했다고. 특히 평소 성격이 활달하고 말도 많던 둘째 아이가 말이 통하지 않자 처음 석 달 동안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수업시간을 못 견디고 양호실에 누워 있기 일쑤였고 집에서도 말수가 줄어들어 부모로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가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자 원래의 밝은 성격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는 처음 아이들의 수업을 지켜보면서 ‘느리고 능동적인 교육 스타일’을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선생님과 면담한 뒤 아이들을 전적으로 학교에 맡기기로 마음먹었다고.
“두 아이 모두 ELS(English Language School) 코스가 마련되어 있는 공립학교에 보냈어요. 사립학교는 ELS 코스가 없기 때문에 영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아이들이 수업을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가장 놀란 것은 미국 학교에는 선생님 외에 보조교사가 있다는 점이었어요. 방과 후에는 아이들의 모자란 부분을 보충해주고 잘 돌봐줘 선생님과 아이들이 한결 편하게 공부를 할 수 있더라고요. 선생님도 아이들에게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학습을 유도하더군요. 어느 날 학교에 찾아가 선생님에게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 학습 속도가 늦지 않냐’고 물어보자 대뜸 ‘왜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냐’며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더라고요. 그런 뒤 ‘처음 종수가 수업시간에 누워 있던 걸 생각해보면 지금은 많이 발전한 것’이라면서 저를 안심시켰어요. 또한 ‘공부는 학교에서 하는 것으로 충분하니 집에서는 30분 이상 공부시키지 말라’고 충고하더라고요.”
오영실 가족은 미국에서 머무는 동안 미국 전역을 두루 돌아다녔다고 한다.
학생 비자를 받아 미국에 간 그는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 집 근처에 있는 2년제 대학에서 영어와 미술 등을 선택해 총 12학점의 교양과목을 이수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들 뒷바라지하면서 공부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아침마다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준 뒤 자신이 다니는 학교로 향했는데, 낮에는 살림하고 저녁 때까지 아이들 공부를 봐주다 보면 밤 10시가 다 돼서야 자신의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시험 기간에는 거실 소파에서 선잠을 자면서 공부했다는 그는 어떨 땐 너무 피곤해 눈물이 났다고 털어놓았다. 또한 그는 영어로 8학점을 채운 뒤 미술 과목을 선택해 평소 배우고 싶었던 유화를 시작했다고 한다. 홍익대에서 공예를 전공한 그는 한국에 돌아오자 유화를 그리고 싶다는 욕심이 더욱 커져 조만간 선배의 화실에 다닐 계획이라고.
두 아이는 6개월 정도 지나자 급속도로 영어 실력이 늘었다고 한다. 특히 회화는 자신보다 실력이 뛰어나 말이 빠른 사람이나 발음이 부정확한 어린아이와 대화할 때 아이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고. “완벽한 수준은 아니지만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걸로 만족한다”고 말하는 그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미국 AFN 방송을 들으며 둘째 아이와 함께 영어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4년간의 미국 생활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바로 ‘가족의 화목’이라고 말한다. 한국에서 각자 바쁘게 지내던 가족들이 미국에 있는 동안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함께 지낼 수 있었다고.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사이 남편과 아이들은 집 근처에 있는 축구장에서 공놀이를 하면서 뛰어놀았고, 특별한 음식이 아닌데도 온 가족이 식탁에 모여서 맛있게 식사를 할 때마다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느꼈다는 것. 또한 주말마다 한인 가족들끼리 모여 파티를 열어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처음 계획대로 미국 전역을 두루 돌아다니며 여행도 했다고.
“우리나라는 엄마, 아빠, 아이들 모임이 다 따로 있지만 서양은 가족끼리 함께 하는 파티문화가 잘 발달되어 있더라고요. 주말마다 한인 가족들과 어울렸는데, 열 가족이 매주 돌아가면서 집에서 파티를 열었어요. 파티라고 해서 거창한 게 아니라 맛있는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재미나게 얘기를 나누는 정도였죠. 아이들도 또래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어 좋아하더라고요. 저희 집에서도 여러 번 파티를 열었는데, 원래 남에게 음식 대접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제 차례가 돌아오면 밤새 음식준비를 할 정도로 극성을 부렸어요. 언젠가 한번은 옆집에 사시는 할머니가 ‘새벽 3시에 도마질을 해 잠을 못 잤다’며 불평을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렇게 1년 반이 흘렀을 무렵 처음 계획대로 그의 남편은 한국으로 먼저 돌아왔고 그는 아이들 교육 때문에 미국에 더 머물렀다고 한다. 남편이 있을 때보다 더 씩씩하게 지내려고 애썼다는 그는 “넉살이 좋아 남편 없이 부부동반 모임에 나가도 인기가 많았다”며 크게 웃었다. 그동안 혼자 서울에서 생활한 남편은 1년에 네 번 정도 미국을 다녀갔다고 한다.
토크쇼 진행 맡아 시청자들의 편안한 말벗 되고 싶어
“견우와 직녀가 따로 없었죠. 아이들이 저보다도 아빠를 더 좋아하는데, 한번 남편이 왔다 가면 며칠 동안은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요. 장난감도 사주고 친구들을 불러다 파티도 열어주면서 아이들을 달래야 했죠. 남편은 그동안 시집에 들어가서 지냈는데도 마누라가 없어서 그랬는지 미국 올 때마다 보면 얼굴이 까칠하더라고요.”
결국 오영실은 2년 반 정도 미국에 더 머무른 뒤 둘째 아이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고, 큰아이는 방학기간을 이용해 오는 6월 잠시 귀국할 예정이라고 한다.
오영실은 미국에 있는 동안 그림 공부를 시작해 유화를 본격적으로 배웠다고 한다.
그는 요즘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침 생방송을 위해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목을 푼다고 한다. 8시 반에 둘째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곧장 방송국으로 향하는 길이 무척 즐겁게 느껴진다는 그는 “4년이라는 공백이 있었는데도 귀국 후 바로 프로그램을 맡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지난 87년 공채 아나운서로 KBS에 입사해 방송일을 시작한 그는 10년 동안 직장생활을 한 뒤 97년 퇴사했고 미국에 가기 전까지 5년간 프리랜서로 활동했다.
“결혼 후에도 남편이 전공의 과정을 밟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직장생활을 해서 돈을 벌어야 했어요. 남편이 자리를 잡은 뒤에도 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쉽게 직장을 그만둘 수가 없었죠.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동안 정말 치열하게 산 것 같아요. 아이들도 으레 ‘엄마는 일요일에도 일하러 나가는 사람’으로 여겼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큰아이가 지하철 난간에서 떨어져 죽는 꿈을 꿨어요. 꿈에서 깬 뒤에도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몰라요. 그 일을 겪고 나니 ‘더 이상 아이들에게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과감히 사표를 제출했죠.”
그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완전한 엄마 노릇을 해준 것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음식솜씨가 좋기로 소문난 그는 반찬 가짓수가 많지는 않더라도 끼니 때마다 새로 한 음식을 식탁 위에 올린다고 한다. 특히 남편이 묵은 음식을 싫어해 국과 샐러드, 생선구이 등은 거의 매끼 새로 준비한다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빠른 시간 내에 음식 만드는 법을 터득했다는 그는 “음식 재료만 잘 정리해둬도 요리하는 속도가 빨라진다”고 설명했다.
“집 앞에 있는 유기농 전문점을 자주 이용하는데, 가격이 비싸긴 하지만 야채도 한끼 먹을 만큼의 양만 사기 때문에 한꺼번에 사서 못 먹고 버리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에요. 우유와 달걀, 딸기는 늘 유기농으로 먹고 있어요.”
그는 “세월이 흘러서인지 예전보다 일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며 “기회가 된다면 토크쇼 진행을 맡아 시청자들의 편안한 말벗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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