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여 전 게시된 한 유튜브 영상이 뒤늦게 화제가 됐다. ‘잘생긴 40대는 오빠인가?’ ‘여고의 오빠논쟁’이란 제목을 단 이 브이로그의 내용은 간단하다. 2022년을 기준으로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에 들어선 남자 배우들의 이름을 출생 연도별로 적어놓은 후 그중 누가 아저씨이고 누가 오빠인지를 정하는 것이다. 교실 안으로 추정되는 공간에서 배우의 이미지를 검색한 화면을 띄어놓은 채 갑론을박을 벌이는 여러 목소리가 등장한다. 여러 남자 배우의 이름이 아저씨, 삼촌 또는 오빠로 구분되다 누군가의 이름 옆에 사촌, 심지어 아빠라고 표기되는 대목에 이르면 이 모든 게 한낱 재미로 벌어진 이벤트임을 직감하게 된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를 중심으로 입소문을 타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이 영상이 화제가 된 건 여러 파생 콘텐츠 덕이 크다. ‘여고의 오빠논쟁’에서 언급된 남자 배우들에게 자신이 아저씨 또는 오빠로 분류되었을지 직접 물어보는 콘텐츠가 대표적이다. 조정석과 유연석, 구교환과 이제훈은 각기 다른 콘텐츠에서 여고생들이 자신을 어떻게 분류했을지 궁금해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누군가는 아저씨가 아닌 삼촌이어서 안도하고, 누군가는 ‘아직’ 오빠로 봐준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원래의 오빠 논쟁을 패러디한 콘텐츠 크리에이터 ‘숏박스’의 영상 ‘강동원은 오빠야 아저씨야?’ 또한 상당 기간 회자됐다. 보는 이들의 관심은 여러 상황과 대상을 두고 어떤 게 아저씨 같고 어떤 게 그렇지 않은지를 가늠하는 데 있기도 했지만, 영상에서 단호하게 아저씨로 구분된 누군가(개그맨 임우일)에게 이목이 쏠리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재미를 위해 만들어진 콘텐츠에 불과하나 이 안에는 실상 각자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아저씨 구별 기준’이 얼마나 비슷한지 견주어보려는 의도가 담겨 있기도 하다. 여성이라면 자신이 어디까지 오빠라고 인정할 수 있는지를 가늠해볼 테고, 남성이라면 자신이 외부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는지 궁금해할 테니 말이다.
이상의 오빠 논쟁에서 아저씨는 부정적인 이미지에 가깝지만, 근래 대중문화에서 아저씨 이미지가 결코 나빴던 것만은 아니다. 예컨대 ‘엄마 미안해, 나 아저씨 좋아해’로 대표되는 중년 배우를 향한 고백이나 넷플릭스 예능 프로그램 ‘피지컬 100’에 출연해 저력을 보여준 추성훈의 “아저씨 무시하지 마”라는 외침 등을 떠올려봐도 그렇다. 거기에 설경구, 이성민, 박희순, 최민식 등 50~60대 배우들이 ‘지천명 아이돌’과 같은 별명으로 불리고, 생일을 맞아 팬들이 생일 카페를 열거나 영화 무대인사 때 소품을 전달해 사진을 찍는 건 ‘아저씨여서’ 더 인기가 있다.
물론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붙는다. 자연인으로서 중년 남성이 아닌 배우들이 연기한 영화나 드라마 속 캐릭터가 대중에게 사랑을 받았느냐의 여부다. ‘불한당’의 한재호(설경구), ‘재벌집 막내아들’의 진양철(이성민), ‘마이 네임’의 최무진(박희순), ‘파묘’의 상덕(최민식) 등과 같이 가상의 인물이 이 배우들을 ‘그냥’ 아저씨가 아니라 귀엽거나 멋있는 아저씨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처럼 아저씨든 오빠든 물리적 나이와 별개로 대중이 소비하고자 하는 이상적 이미지를 연출할 수 있느냐가 결정적인 인기 요인이 된다. 그저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거나 완벽한 외모를 가졌다고 해서 아저씨가 아닌 오빠가 되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저 잡담처럼 웃고 넘기는 문제로 보일 수 있는 오빠 논쟁은 한편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변화하는 감각의 단면을 보여준다. 우선 호칭으로서 아저씨에 대해 생각해볼 만하다. 2000년대 이전의 소설이나 드라마에선 아저씨라는 호칭이 지금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과거 아저씨는 학생과 노인을 제외한 성인 남성 전반을 일컫는 용어로 오늘날 ‘저기요’ ‘고객님’ ‘선생님’ ‘사장님’ 등으로 불리는 상황을 포괄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엔 나이에 따라 달라지는 호칭 문화에 좀 더 순응하는 양상을 띠었다. 군 입대와 함께 자동적으로 ‘군인 아저씨’로 불리면서 아저씨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오빠’로 불리길 원하는 성인 남성들의 열망이 없었다고 보긴 어렵다. 픽션에 간혹 등장하는 ‘오빠 모먼트’가 인물이 심기일전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걸 보면 말이다.
아저씨가 단순한 호칭에 준하는 것만은 아니다. 일종의 사회적 존재에 대한 상상 또는 상징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앞서 살펴본 오빠 논쟁에서 누군가 아저씨가 되는 건 단지 아저씨라고 불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저씨 (같은) 상’에 부합한다는 얘기가 된다. 설령 오빠 논쟁에서 아저씨와 삼촌 그리고 오빠를 가르는 기준이 자의적이고 변칙적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아저씨로 연상된다는 건 호칭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기에 중요한 건, 아저씨와 오빠를 가르는 판단 기준이 아니라 판단을 내리는 주체와 그 주체의 인정을 받는 일이다.
결국 지금까지 회자되는 오빠 논쟁은 이상의 복합적 맥락이 배우들의 사례를 경유하며 증폭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세대론과 나이 주의가 여전히 영향력이 크다. 또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보다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훨씬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아저씨와 오빠를 둘러싼 논쟁은 앞으로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는 자신이 속한 세대를 인식하는 데 있어 젊은 세대로부터의 인정이 강력한 힘을 발휘함을 뜻하기도 한다. 아저씨가 아닌 오빠라고 인정받는 건 절대적인 선상에서 젊은 축에 속하는 한편 외모, 몸매, 체력 등이 젊은, 즉 요즘의 감각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호칭으로서뿐 아니라 상징으로서 아저씨가 과거와 다르게 느껴지는 건 기대수명의 증대 그리고 고령화와도 일면 관련이 있다. 소위 ‘100세 시대’가 도래하기 전부터 한국 사회는 유독 웰빙과 웰에이징에 관해 깊은 관심을 보여왔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해야 무병장수하는지 신경 쓰는 동시에 실제 나이보다 상대적으로 젊어 보이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젊게 살고 젊게 보이는 것’이 개인의 행복 추구 외에 현대적 자기 관리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지다 보니 젊음의 반대 축에 놓인 듯한 아저씨는 되도록 늦게 되는 편이 나은 존재가 됐다.
아저씨 여부가 민감한 사안으로 떠오른 건 자본화된 도시에서의 삶이 일반화된 상황과도 맞물린다. 2010년대 중반 마케팅 용어로 착안된 신조어 ‘영 포티’에 이어 지난 6월 후속 용어로 ‘영 피프티’가 등장했다. 40·50대와 달리 청년층에 가까운 라이프스타일과 소비 방식을 가진 40·50대를 일컫는다. 이 같은 사례에서 보듯 도시의 중년층은 과거의 동년배와 다름을 꿈꾼다. 취업, 결혼, 양육으로 이어지는 생애 주기가 개인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설정되는 데다 일상 속에서 직접적으로 아저씨로 불릴 만한 상황도 자주 발생하지 않는다. 도시의 중년 남성에게 누군가의 아빠나 삼촌으로 사는 시간보다 무언가를 소비하는 소비자로 살아가거나 그냥 무리 속에 묻혀 눈에 띄지 않는 익명으로 사는 시간이 길다 보니 아저씨란 단어가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측면이 있다.
이쯤에서 다시 오빠 논쟁으로 되돌아가 보자. 애초에 여고생들 사이에서 촉발된 논쟁은 그 시공간 안에 머무를 때 성립된다. 또 재미로 시작된 것은 재미로, 상상으로 시작된 건 상상으로 남을 때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다. 다만 오빠 논쟁은 우리 사회가 관계 지향적임을 재확인시켜준다. 언니, 오빠, 이모, 삼촌 대신 그저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대부분의 서구 사회와는 사뭇 다른 종류의 관계 맺기다. 김OO이라는 이름을 가진 개인으로 오롯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형, 아저씨, 삼촌, 선배와 같은 호칭을 통해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비로소 설명되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관계 지향적 사회에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또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할 때 내적 인식보다 타인 등 외부의 인식을 중요시한다. 이런 관점에서 오빠 논쟁에 대한 관심은 우리가 타인의 시각을 내면화하고 있음을 은근히 내비친다.
끊임없이 타인으로부터 호명되고 호출되는 게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타인의 존재는 때때로 자아를 보살피고 되돌아보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오빠 논쟁을 통해 ‘오빠’이고 싶다는, 또는 ‘아저씨’이기 싫다는 열망을 갖는 대신 지금 누군가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보는 건 어떨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관계 활용법일지 모른다.
#아저씨 #오빠논쟁 #여성동아
사진 뉴스1
사진출처 유튜브 TEO 숏박스 지토루 온라인 커뮤니티
잘생기면 ‘정말’ 다 오빠야?
배우 이상민이 자신의 생일 카페에서 인증하는 모습(왼쪽). 영화 ‘파묘’ 무대인사에서 최민식에게 귀여운 머리띠를 씌우는 ‘할꾸(할아버지 꾸미기’가 유행했다.
이상의 오빠 논쟁에서 아저씨는 부정적인 이미지에 가깝지만, 근래 대중문화에서 아저씨 이미지가 결코 나빴던 것만은 아니다. 예컨대 ‘엄마 미안해, 나 아저씨 좋아해’로 대표되는 중년 배우를 향한 고백이나 넷플릭스 예능 프로그램 ‘피지컬 100’에 출연해 저력을 보여준 추성훈의 “아저씨 무시하지 마”라는 외침 등을 떠올려봐도 그렇다. 거기에 설경구, 이성민, 박희순, 최민식 등 50~60대 배우들이 ‘지천명 아이돌’과 같은 별명으로 불리고, 생일을 맞아 팬들이 생일 카페를 열거나 영화 무대인사 때 소품을 전달해 사진을 찍는 건 ‘아저씨여서’ 더 인기가 있다.
물론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붙는다. 자연인으로서 중년 남성이 아닌 배우들이 연기한 영화나 드라마 속 캐릭터가 대중에게 사랑을 받았느냐의 여부다. ‘불한당’의 한재호(설경구), ‘재벌집 막내아들’의 진양철(이성민), ‘마이 네임’의 최무진(박희순), ‘파묘’의 상덕(최민식) 등과 같이 가상의 인물이 이 배우들을 ‘그냥’ 아저씨가 아니라 귀엽거나 멋있는 아저씨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처럼 아저씨든 오빠든 물리적 나이와 별개로 대중이 소비하고자 하는 이상적 이미지를 연출할 수 있느냐가 결정적인 인기 요인이 된다. 그저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거나 완벽한 외모를 가졌다고 해서 아저씨가 아닌 오빠가 되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저 잡담처럼 웃고 넘기는 문제로 보일 수 있는 오빠 논쟁은 한편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변화하는 감각의 단면을 보여준다. 우선 호칭으로서 아저씨에 대해 생각해볼 만하다. 2000년대 이전의 소설이나 드라마에선 아저씨라는 호칭이 지금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과거 아저씨는 학생과 노인을 제외한 성인 남성 전반을 일컫는 용어로 오늘날 ‘저기요’ ‘고객님’ ‘선생님’ ‘사장님’ 등으로 불리는 상황을 포괄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엔 나이에 따라 달라지는 호칭 문화에 좀 더 순응하는 양상을 띠었다. 군 입대와 함께 자동적으로 ‘군인 아저씨’로 불리면서 아저씨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오빠’로 불리길 원하는 성인 남성들의 열망이 없었다고 보긴 어렵다. 픽션에 간혹 등장하는 ‘오빠 모먼트’가 인물이 심기일전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걸 보면 말이다.
‘오빠 논쟁’의 전말
‘오빠 논쟁’에서 구교환과 이제훈 배우는 각각 ‘삼촌’, ‘오빠’ 타이틀을 취득했다.
결국 지금까지 회자되는 오빠 논쟁은 이상의 복합적 맥락이 배우들의 사례를 경유하며 증폭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세대론과 나이 주의가 여전히 영향력이 크다. 또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보다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훨씬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아저씨와 오빠를 둘러싼 논쟁은 앞으로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는 자신이 속한 세대를 인식하는 데 있어 젊은 세대로부터의 인정이 강력한 힘을 발휘함을 뜻하기도 한다. 아저씨가 아닌 오빠라고 인정받는 건 절대적인 선상에서 젊은 축에 속하는 한편 외모, 몸매, 체력 등이 젊은, 즉 요즘의 감각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호칭으로서뿐 아니라 상징으로서 아저씨가 과거와 다르게 느껴지는 건 기대수명의 증대 그리고 고령화와도 일면 관련이 있다. 소위 ‘100세 시대’가 도래하기 전부터 한국 사회는 유독 웰빙과 웰에이징에 관해 깊은 관심을 보여왔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해야 무병장수하는지 신경 쓰는 동시에 실제 나이보다 상대적으로 젊어 보이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젊게 살고 젊게 보이는 것’이 개인의 행복 추구 외에 현대적 자기 관리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지다 보니 젊음의 반대 축에 놓인 듯한 아저씨는 되도록 늦게 되는 편이 나은 존재가 됐다.
아저씨 여부가 민감한 사안으로 떠오른 건 자본화된 도시에서의 삶이 일반화된 상황과도 맞물린다. 2010년대 중반 마케팅 용어로 착안된 신조어 ‘영 포티’에 이어 지난 6월 후속 용어로 ‘영 피프티’가 등장했다. 40·50대와 달리 청년층에 가까운 라이프스타일과 소비 방식을 가진 40·50대를 일컫는다. 이 같은 사례에서 보듯 도시의 중년층은 과거의 동년배와 다름을 꿈꾼다. 취업, 결혼, 양육으로 이어지는 생애 주기가 개인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설정되는 데다 일상 속에서 직접적으로 아저씨로 불릴 만한 상황도 자주 발생하지 않는다. 도시의 중년 남성에게 누군가의 아빠나 삼촌으로 사는 시간보다 무언가를 소비하는 소비자로 살아가거나 그냥 무리 속에 묻혀 눈에 띄지 않는 익명으로 사는 시간이 길다 보니 아저씨란 단어가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측면이 있다.
이쯤에서 다시 오빠 논쟁으로 되돌아가 보자. 애초에 여고생들 사이에서 촉발된 논쟁은 그 시공간 안에 머무를 때 성립된다. 또 재미로 시작된 것은 재미로, 상상으로 시작된 건 상상으로 남을 때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다. 다만 오빠 논쟁은 우리 사회가 관계 지향적임을 재확인시켜준다. 언니, 오빠, 이모, 삼촌 대신 그저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대부분의 서구 사회와는 사뭇 다른 종류의 관계 맺기다. 김OO이라는 이름을 가진 개인으로 오롯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형, 아저씨, 삼촌, 선배와 같은 호칭을 통해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비로소 설명되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관계 지향적 사회에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또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할 때 내적 인식보다 타인 등 외부의 인식을 중요시한다. 이런 관점에서 오빠 논쟁에 대한 관심은 우리가 타인의 시각을 내면화하고 있음을 은근히 내비친다.
끊임없이 타인으로부터 호명되고 호출되는 게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타인의 존재는 때때로 자아를 보살피고 되돌아보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오빠 논쟁을 통해 ‘오빠’이고 싶다는, 또는 ‘아저씨’이기 싫다는 열망을 갖는 대신 지금 누군가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보는 건 어떨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관계 활용법일지 모른다.
#아저씨 #오빠논쟁 #여성동아
사진 뉴스1
사진출처 유튜브 TEO 숏박스 지토루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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