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자로 데뷔한 지 28년째, 이정재(49)에게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콘텐츠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 패트롤’에 따르면 ‘오징어 게임’은 넷플릭스 순위가 집계되는 전 세계 83개국에서 한 번씩 1위에 오르며 신기록을 달성했다. ‘오징어 게임’은 4백56억원의 상금이 걸린 서바이벌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이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건 극한의 상황에 도전하는 이야기다. 드라마가 흥행하며 주인공 성기훈 역으로 극을 이끈 배우 이정재의 인기도 급상승하고 있다. 10월 2일 개설한 그의 인스타그램은 불과 10일 만에 팔로어 3백30만 명을 돌파했다. 글로벌 인기에 힘입어 임세령 대상그룹 부회장과의 러브 스토리까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이정재의 연기 인생은 마냥 순탄하진 않았다. 그의 첫 번째 전성기는 비교적 이른 시간에 찾아왔다. 1993년 드라마 ‘공룡선생’으로 데뷔해 서서히 인지도를 쌓아가던 이정재는 드라마 ‘모래시계’(1995)에서 윤혜린(고현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보디가드 백재희 역을 맡아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얻었다.
걸 그룹 블랙핑크의 제니가 한 방송에서 “엄마가 이정재 씨의 팬이라 ‘모래시계’의 백재희에서 내 이름을 따왔다”고 밝힐 정도. 1999년엔 영화 ‘태양은 없다’에서 지금까지도 ‘절친’으로 유명한 정우성과 함께 주연을 맡아 그해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며 최고의 하이틴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후 거짓말처럼 그의 커리어는 하락세로 접어들게 된다. ‘이재수의 난’(1999)을 기점으로 이후 그가 출연한 영화들이 연이어 흥행에 실패했고, 드라마 ‘에어시티’(2007)와 ‘트리플’(2009) 등도 큰 인기를 끌지 못하면서 이정재라는 이름은 잊히는 듯했다.
이정재가 선택한 돌파구는 그간 보여왔던 ‘하이틴 스타’ 이미지를 탈피하는 것. 영화 ‘하녀’(2010)에서 전도연과 파격적인 정사 신을 선보이는 등 연기 변신을 꾀한 이정재는 ‘도둑들’(2012)로 ‘천만 배우’ 반열에 오르며 제2의 전성기 시작을 알렸다. 이어 2013년 영화 ‘신세계’ ‘관상’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특히 ‘관상’에선 카리스마 넘치는 수양대군 역으로 분해 돌계단도 런웨이로 만드는 역대급 등장 신과 ‘내가 왕이 될 상인가!’ 라는 유행어를 남기는 등 강렬한 인상으로 데뷔 이래 이어진 연기력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러한 부활 뒤엔 치열한 노력이 있었다. 그의 두 번째 천만 관객 영화 ‘암살’(2015) 촬영 당시 이정재는 불안하고 예민한 심리 상태의 변절자 염석진 역을 소화하기 위해 15kg의 체중을 감량하고 48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은 채 작업에 임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 개봉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는 잔인한 킬러 레이 역을 맡아 코로나19 시국을 뚫고 흥행에 성공했다. 이에 “이정재가 악역을 맡으면 흥행한다”는 속설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는 그의 악역 연기에 대한 찬사임과 동시에 이정재가 ‘세지 않은 역할’로는 깊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후자의 경우 흥행이나 연기력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더 박한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에서 이정재의 연기 변신은 이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는 ‘오징어 게임’에서 철저히 지질하고 짠내 가득한 소시민 성기훈으로 변신했다. 성기훈은 구조조정으로 실직한 후 도박판을 전전하다 지하철에서 만난 의문의 남자가 건넨 명함을 받고 서바이벌 게임에 참가하게 되는 인물이다. 이정재는 기훈을 소화하기 위해 추레한 옷차림과 덥수룩한 헤어스타일을 고수함은 물론, 노모의 돈을 훔쳐 경마를 하러 달려가거나 살기 위해 달고나를 게걸스럽게 핥아대는 등 그간의 멋스러운 모습을 전부 벗어던진 채 열연을 펼쳤다.
화상으로 마주한 이정재는 ‘오징어 게임’ 속 자신의 모습에 대해 “확실히 오징어가 됐다”며 웃었다. 하지만 그는 “나는 연기자이기에 이런 역할, 저런 역할도 하는 것이다. 기훈이라는 캐릭터를 잘해내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망가졌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며 담담히 소회를 밝혔다. 모든 질문에 신중히 답하는 이정재의 모습에서 연기에 대한 깊은 고민이 느껴졌다.
나이가 들다 보니 근래엔 악역이나 센 역할밖에 안 들어오더라고요. 대개 극 중에서 긴장감을 크게 불러일으키는 캐릭터를 소화하곤 했죠. 하지만 사실은 생활 연기가 가장 힘들어요. 자연스러워야 하지만 그렇다고 다큐멘터리는 아니니까요. ‘오징어 게임’에선 극한의 상황에서 겪는 감정을 연기해야 했는데, 시간이 지나며 해소되긴 했지만 처음엔 연기가 자연스럽지 않더라고요. 표현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할지 계속 고민됐어요. 예를 들어 달고나 뽑기 게임에서 핥는 장면이 있는데, ‘이렇게까지 핥아야 하나’ 싶더라고요(웃음). ‘목숨을 걸고 하는 거니까 그럴 수 있겠지’ 생각하면서 열심히 핥았던 기억이 나요(웃음).
후줄근한 소시민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했을 듯해요.
사실 어릴 때 그다지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어요. 가족들과 가난을 이겨나가야 했던 기억을 ‘오징어 게임’에 최대한 활용했죠. 제 연기를 보니 많은 걸 벗어던졌더라고요. 평상시 잘 안 나오는 표정도 나왔고요. 외형적으로는 모자가 정말 안 어울렸다고 하는데, 진짜 오징어가 된 것 같아요(웃음). ‘내가 저랬구나’ 하면서 많이 웃었어요. 그래도 멋스러운 걸 걷어내고 연기하니까 더 편하더라고요. 외모를 신경 쓰지 않고 촬영, 편집 과정에 더 재미있게 참여할 수 있었죠.
기훈 역을 선택하는 데에 마음을 움직인 점이 있을까요.
기훈이 가지고 있는 선함이 좋았어요. 약게 살면 본인의 몫을 챙길 수 있는데도 그 선함 때문에 그러지 못하죠. 극한의 상황에 처했어도 타인을 신경 쓰고, 도와주는 따뜻한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물론 엄마의 돈을 훔쳐 경마를 하기도 하지만 도박에 중독돼서라기보다는 자신이 처한 곤궁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절박함으로 느껴졌고요.
이정재 씨가 기훈과 같은 상황이라면 게임에 참가했을까요.
어휴, 저는 못 했을 거예요. 목숨을 걸면서까지 경쟁을 하는 건 겁이 나서 못 하겠어요(웃음).
기훈처럼 4백56억원의 상금을 받게 된다면.
기부할 거예요. 그렇게 갑자기 생긴 돈이라면 주저 없이 그렇게 할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게임을 한다는 설정이 상당히 충격적이기도 해요. 출연을 제안받았을 때 고민이 됐을 법도 한데.
‘도가니’ ‘남한산성’ ‘수상한 그녀’ 등을 연출한 황동혁 감독을 믿었기 때문에 도전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저는 작품을 할 때마다 항상 위험을 안고 가는 것 같아요. “이정재 쟤는 왜 저런 걸 찍었대” 소리를 듣는 것부터(웃음)… 관객들에게 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열망이 있어요. 이러한 마음이 절 계속 도전하게 만들고요.
가장 재미있었거나 어려웠던 게임을 꼽자면.
다 힘들게 촬영해서 재밌었던 걸 얘기하긴 쉽지 않네요(웃음). 가장 어려웠던 건 ‘징검다리 건너기’ 촬영이었어요. 1.5~2m 공간을 뛰어서 강화유리를 밟아야 했는데, 스태프들은 안전하니까 뛰라고 했지만 잘 안 됐어요. 다른 배우들은 잘 뛰던데 저는 발에 땀이 나서 자꾸 미끄러지더라고요(웃음).
‘오징어 게임’에서 기훈은 다소 감정적이고 상우(박해수)는 이성적이라 서로 상반된 성향을 보이는데, 제3자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누구에게 더 공감이 가나요.
저는 누가 더 이성적이거나 감정적이라고 해석하진 않았어요. 극한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 ‘도덕성을 얼마나 포기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일 거 같아요. 상우 관점에선 목숨이 달려 있는 게임인데 자신이 살기 위해서 ‘이 정도’는 괜찮다고 여겼던 것이고, 그 ‘정도’에서 기훈과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고 생각해요. 두 사람 모두 이해가 되죠.
가장 애착이 가는 대사가 있다면.
“쌍문동의 성기훈”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아요. 쌍문동이 뭐가 그리 중요한 건지, 왜 스스로를 소개할 때 자신이 사는 동네를 꼭 넣으려 한 건지(웃음). 기훈에게는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수식어가 ‘쌍문동’이라는 말밖에 없었던 거죠. 참 짠하더라고요.
‘오징어 게임’의 흥행과 함께 이정재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그의 실제 외모에 대한 반응도 뜨겁다. ‘오징어 게임’ 속 망가진 모습에 익숙했던 해외 팬들은 멀끔하게 차려입은 이정재를 보고 같은 사람이 맞는지 놀라움을 드러내고 있다. 또 유튜브,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선 그의 20대 ‘리즈 시절’ 영상이 재조명받고 있다. 반응은 호평 일색. 원조 하이틴 스타로 인기를 누렸던 이정재의 외모에 감탄하는 댓글이 대부분이다.
이정재 씨의 리즈 시절 영상이 재조명되고 있어요. 그때가 그립진 않나요.
예전으로 돌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그때의 추억들이 떠오르곤 해요(웃음). 데뷔 초를 돌이켜 보면 오연수 선배가 가장 먼저 생각나요. 사실 연수 누나 어머니께서 연기자 생활을 시작하게 해주신 거나 다름없거든요. 연수 누나가 주인공이었던 드라마 ‘남자는 외로워’(1994)의 작은 역할이었는데, 연수 누나 어머니께서 저를 소개해주신 덕분에 출연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연기를 정말 못했어요. 너무 추워서 입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의 날씨였는데 계속 NG를 냈어요. 어찌나 죄송스럽던지(웃음). 연수 누나는 요즘도 작품이 흥행하면 그때마다 덕담을 건네주세요. 이번에도 연수 누나한테 “‘오징어 게임’ 정말 재미있게 봤다”고 메시지가 왔어요. 마치 동생이 잘돼서 뿌듯해하는 친누나처럼 느껴져서 정말 고마워요.
이제는 연기력으로도 인정받는 배우가 됐어요. 변곡점이 된 작품을 꼽자면.
그게 다 연륜이라고 생각해요. 작품을 하나씩 해나가면서 다양한 감독, 스태프, 선배 배우들과 함께 작업하며 쌓은 경험이 좋은 연기를 선보일 수 있게 해준 거죠. 여러 가지가 모여 지금의 저를 만든 거지, 어떤 하나의 작품이나 계기가 절 변화시킨 건 아닌 듯해요.
‘캐릭터 컬렉터’라는 별명이 있는데, 더 해보고 싶은 역할이 남았나요.
연기자로서 다양한 일을 많이 해보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하고, 그럴 기회가 지금까지 있어줘서 너무 감사해요. 저는 제가 나온 작품의 DVD를 모으는 게 정말 좋아요. 조금씩 다른 모습의 포스터로 드러나는 이정재가 재밌더라고요. 앞으로도 더 많은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기회가 온다면 더 열심히, 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이정재의 도전은 연기 이외의 영역으로도 이어진다. 그는 다음 영화 ‘헌트’의 감독 및 주연을 맡아 연출자 데뷔를 앞두고 있다. 시나리오 또한 이정재가 집필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출에도 도전하게 됐는데 다방면의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나요.
원래 연출이나 제작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쌓인 촬영 현장의 경험을 살려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런저런 방식으로 풀어보면 재밌겠다 싶었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영화 제작, 연출, 시나리오 집필을 하고 있더라고요(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이제 선배로서 무엇이라도 좀 더 이끌어나가게 됐기 때문인 것 같네요.
이정재 씨에게 연출은 어떤 도전 의식을 담고 있나요.
시나리오를 쓰고 나니 ‘이걸 제일 잘 찍을 수 있는 사람은 나구나’ 싶어서 연출을 하게 됐어요.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어요. 지금까지 수많은 감독과 작업했는데도, 직접 연출해보니 이제야 알겠더라고요. 다른 배우분들도 기회가 있다면 해보길 추천합니다(웃음).
사진제공 넷플릭스
이정재의 연기 인생은 마냥 순탄하진 않았다. 그의 첫 번째 전성기는 비교적 이른 시간에 찾아왔다. 1993년 드라마 ‘공룡선생’으로 데뷔해 서서히 인지도를 쌓아가던 이정재는 드라마 ‘모래시계’(1995)에서 윤혜린(고현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보디가드 백재희 역을 맡아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얻었다.
걸 그룹 블랙핑크의 제니가 한 방송에서 “엄마가 이정재 씨의 팬이라 ‘모래시계’의 백재희에서 내 이름을 따왔다”고 밝힐 정도. 1999년엔 영화 ‘태양은 없다’에서 지금까지도 ‘절친’으로 유명한 정우성과 함께 주연을 맡아 그해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며 최고의 하이틴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후 거짓말처럼 그의 커리어는 하락세로 접어들게 된다. ‘이재수의 난’(1999)을 기점으로 이후 그가 출연한 영화들이 연이어 흥행에 실패했고, 드라마 ‘에어시티’(2007)와 ‘트리플’(2009) 등도 큰 인기를 끌지 못하면서 이정재라는 이름은 잊히는 듯했다.
이정재가 선택한 돌파구는 그간 보여왔던 ‘하이틴 스타’ 이미지를 탈피하는 것. 영화 ‘하녀’(2010)에서 전도연과 파격적인 정사 신을 선보이는 등 연기 변신을 꾀한 이정재는 ‘도둑들’(2012)로 ‘천만 배우’ 반열에 오르며 제2의 전성기 시작을 알렸다. 이어 2013년 영화 ‘신세계’ ‘관상’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특히 ‘관상’에선 카리스마 넘치는 수양대군 역으로 분해 돌계단도 런웨이로 만드는 역대급 등장 신과 ‘내가 왕이 될 상인가!’ 라는 유행어를 남기는 등 강렬한 인상으로 데뷔 이래 이어진 연기력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러한 부활 뒤엔 치열한 노력이 있었다. 그의 두 번째 천만 관객 영화 ‘암살’(2015) 촬영 당시 이정재는 불안하고 예민한 심리 상태의 변절자 염석진 역을 소화하기 위해 15kg의 체중을 감량하고 48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은 채 작업에 임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 개봉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는 잔인한 킬러 레이 역을 맡아 코로나19 시국을 뚫고 흥행에 성공했다. 이에 “이정재가 악역을 맡으면 흥행한다”는 속설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는 그의 악역 연기에 대한 찬사임과 동시에 이정재가 ‘세지 않은 역할’로는 깊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후자의 경우 흥행이나 연기력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더 박한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에서 이정재의 연기 변신은 이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는 ‘오징어 게임’에서 철저히 지질하고 짠내 가득한 소시민 성기훈으로 변신했다. 성기훈은 구조조정으로 실직한 후 도박판을 전전하다 지하철에서 만난 의문의 남자가 건넨 명함을 받고 서바이벌 게임에 참가하게 되는 인물이다. 이정재는 기훈을 소화하기 위해 추레한 옷차림과 덥수룩한 헤어스타일을 고수함은 물론, 노모의 돈을 훔쳐 경마를 하러 달려가거나 살기 위해 달고나를 게걸스럽게 핥아대는 등 그간의 멋스러운 모습을 전부 벗어던진 채 열연을 펼쳤다.
화상으로 마주한 이정재는 ‘오징어 게임’ 속 자신의 모습에 대해 “확실히 오징어가 됐다”며 웃었다. 하지만 그는 “나는 연기자이기에 이런 역할, 저런 역할도 하는 것이다. 기훈이라는 캐릭터를 잘해내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망가졌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며 담담히 소회를 밝혔다. 모든 질문에 신중히 답하는 이정재의 모습에서 연기에 대한 깊은 고민이 느껴졌다.
멋을 걷어내고 느낀 편안함
기훈 역에 “이정재의 반전 매력을 느꼈다”는 사람이 많아요.나이가 들다 보니 근래엔 악역이나 센 역할밖에 안 들어오더라고요. 대개 극 중에서 긴장감을 크게 불러일으키는 캐릭터를 소화하곤 했죠. 하지만 사실은 생활 연기가 가장 힘들어요. 자연스러워야 하지만 그렇다고 다큐멘터리는 아니니까요. ‘오징어 게임’에선 극한의 상황에서 겪는 감정을 연기해야 했는데, 시간이 지나며 해소되긴 했지만 처음엔 연기가 자연스럽지 않더라고요. 표현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할지 계속 고민됐어요. 예를 들어 달고나 뽑기 게임에서 핥는 장면이 있는데, ‘이렇게까지 핥아야 하나’ 싶더라고요(웃음). ‘목숨을 걸고 하는 거니까 그럴 수 있겠지’ 생각하면서 열심히 핥았던 기억이 나요(웃음).
후줄근한 소시민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했을 듯해요.
사실 어릴 때 그다지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어요. 가족들과 가난을 이겨나가야 했던 기억을 ‘오징어 게임’에 최대한 활용했죠. 제 연기를 보니 많은 걸 벗어던졌더라고요. 평상시 잘 안 나오는 표정도 나왔고요. 외형적으로는 모자가 정말 안 어울렸다고 하는데, 진짜 오징어가 된 것 같아요(웃음). ‘내가 저랬구나’ 하면서 많이 웃었어요. 그래도 멋스러운 걸 걷어내고 연기하니까 더 편하더라고요. 외모를 신경 쓰지 않고 촬영, 편집 과정에 더 재미있게 참여할 수 있었죠.
기훈 역을 선택하는 데에 마음을 움직인 점이 있을까요.
기훈이 가지고 있는 선함이 좋았어요. 약게 살면 본인의 몫을 챙길 수 있는데도 그 선함 때문에 그러지 못하죠. 극한의 상황에 처했어도 타인을 신경 쓰고, 도와주는 따뜻한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물론 엄마의 돈을 훔쳐 경마를 하기도 하지만 도박에 중독돼서라기보다는 자신이 처한 곤궁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절박함으로 느껴졌고요.
이정재 씨가 기훈과 같은 상황이라면 게임에 참가했을까요.
어휴, 저는 못 했을 거예요. 목숨을 걸면서까지 경쟁을 하는 건 겁이 나서 못 하겠어요(웃음).
기훈처럼 4백56억원의 상금을 받게 된다면.
기부할 거예요. 그렇게 갑자기 생긴 돈이라면 주저 없이 그렇게 할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게임을 한다는 설정이 상당히 충격적이기도 해요. 출연을 제안받았을 때 고민이 됐을 법도 한데.
‘도가니’ ‘남한산성’ ‘수상한 그녀’ 등을 연출한 황동혁 감독을 믿었기 때문에 도전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저는 작품을 할 때마다 항상 위험을 안고 가는 것 같아요. “이정재 쟤는 왜 저런 걸 찍었대” 소리를 듣는 것부터(웃음)… 관객들에게 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열망이 있어요. 이러한 마음이 절 계속 도전하게 만들고요.
가장 재미있었거나 어려웠던 게임을 꼽자면.
다 힘들게 촬영해서 재밌었던 걸 얘기하긴 쉽지 않네요(웃음). 가장 어려웠던 건 ‘징검다리 건너기’ 촬영이었어요. 1.5~2m 공간을 뛰어서 강화유리를 밟아야 했는데, 스태프들은 안전하니까 뛰라고 했지만 잘 안 됐어요. 다른 배우들은 잘 뛰던데 저는 발에 땀이 나서 자꾸 미끄러지더라고요(웃음).
‘오징어 게임’에서 기훈은 다소 감정적이고 상우(박해수)는 이성적이라 서로 상반된 성향을 보이는데, 제3자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누구에게 더 공감이 가나요.
저는 누가 더 이성적이거나 감정적이라고 해석하진 않았어요. 극한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 ‘도덕성을 얼마나 포기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일 거 같아요. 상우 관점에선 목숨이 달려 있는 게임인데 자신이 살기 위해서 ‘이 정도’는 괜찮다고 여겼던 것이고, 그 ‘정도’에서 기훈과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고 생각해요. 두 사람 모두 이해가 되죠.
가장 애착이 가는 대사가 있다면.
“쌍문동의 성기훈”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아요. 쌍문동이 뭐가 그리 중요한 건지, 왜 스스로를 소개할 때 자신이 사는 동네를 꼭 넣으려 한 건지(웃음). 기훈에게는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수식어가 ‘쌍문동’이라는 말밖에 없었던 거죠. 참 짠하더라고요.
넷플리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이정재 씨의 리즈 시절 영상이 재조명되고 있어요. 그때가 그립진 않나요.
예전으로 돌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그때의 추억들이 떠오르곤 해요(웃음). 데뷔 초를 돌이켜 보면 오연수 선배가 가장 먼저 생각나요. 사실 연수 누나 어머니께서 연기자 생활을 시작하게 해주신 거나 다름없거든요. 연수 누나가 주인공이었던 드라마 ‘남자는 외로워’(1994)의 작은 역할이었는데, 연수 누나 어머니께서 저를 소개해주신 덕분에 출연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연기를 정말 못했어요. 너무 추워서 입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의 날씨였는데 계속 NG를 냈어요. 어찌나 죄송스럽던지(웃음). 연수 누나는 요즘도 작품이 흥행하면 그때마다 덕담을 건네주세요. 이번에도 연수 누나한테 “‘오징어 게임’ 정말 재미있게 봤다”고 메시지가 왔어요. 마치 동생이 잘돼서 뿌듯해하는 친누나처럼 느껴져서 정말 고마워요.
이제는 연기력으로도 인정받는 배우가 됐어요. 변곡점이 된 작품을 꼽자면.
그게 다 연륜이라고 생각해요. 작품을 하나씩 해나가면서 다양한 감독, 스태프, 선배 배우들과 함께 작업하며 쌓은 경험이 좋은 연기를 선보일 수 있게 해준 거죠. 여러 가지가 모여 지금의 저를 만든 거지, 어떤 하나의 작품이나 계기가 절 변화시킨 건 아닌 듯해요.
‘캐릭터 컬렉터’라는 별명이 있는데, 더 해보고 싶은 역할이 남았나요.
연기자로서 다양한 일을 많이 해보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하고, 그럴 기회가 지금까지 있어줘서 너무 감사해요. 저는 제가 나온 작품의 DVD를 모으는 게 정말 좋아요. 조금씩 다른 모습의 포스터로 드러나는 이정재가 재밌더라고요. 앞으로도 더 많은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기회가 온다면 더 열심히, 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넷플리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연출에도 도전하게 됐는데 다방면의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나요.
원래 연출이나 제작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쌓인 촬영 현장의 경험을 살려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런저런 방식으로 풀어보면 재밌겠다 싶었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영화 제작, 연출, 시나리오 집필을 하고 있더라고요(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이제 선배로서 무엇이라도 좀 더 이끌어나가게 됐기 때문인 것 같네요.
이정재 씨에게 연출은 어떤 도전 의식을 담고 있나요.
시나리오를 쓰고 나니 ‘이걸 제일 잘 찍을 수 있는 사람은 나구나’ 싶어서 연출을 하게 됐어요.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어요. 지금까지 수많은 감독과 작업했는데도, 직접 연출해보니 이제야 알겠더라고요. 다른 배우분들도 기회가 있다면 해보길 추천합니다(웃음).
사진제공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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