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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세계가 주목하는 부조회화 대가, 남춘모

이진수 기자

2023. 02. 13

프랑스 생테티엔에 위치한 세손 앤드 베네티에르 갤러리 본점에서 남춘모 작가의 ‘Spring展’이 한창이다. 현지 반응은 뜨겁다. 덕분에 2024년에는 세손갤러리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룩셈부르크점에서 새 전시를 열기로 했다. 1월 10일, 한국 미술의 위상을 널리 떨치고 있는 남춘모 작가를 만났다.

“한국 갤러리는 전시 오프닝에서 작가 소개를 필히 시키는데 유럽 갤러리 는 그런 게 없어요. 비평가나 전문가들이 나서서 얘기하고, 작가는 그 뒤에 서 있거나 관객과 같이 보고 있죠. 말을 안 시켜서 좋아요(웃음).”

파리에서 돌아온 남춘모(62) 작가가 그의 작업실에서 전시 후일담을 들려 줬다. 동대구역에서 청도 방향으로 차를 타고 30분가량을 더 달리면 공장 형 건물이 하나 보인다. 통창으로 둘러싸여 하루 종일 해가 드는 남 작가의 작업실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벽면에 ‘스트로크 라인 (Stroke-lines)’ 시리즈가 걸려 있다. 검고 흰 선들이 거침없이 부딪히는 것 같은 그림들. 작가가 작업 초기에 즐겨 그리던 회화다.

작가는 남보다 조금 늦게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1989년 스물여덟의 나이에 계명대 미술대학원을 졸업했다. 2010년에는 하종현 원로 화백의 예술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하종현미술상’ 작가상에 선정됐고, 2012년에 는 대구 금복문화재단이 제정한 ‘금복문화상’을 수상했다.

대구에 도착해 만난 작가의 작업실은 분주했다. 마당에 산처럼 굳어 높게 쌓인 합성수지의 모습은 43년간 미술 인생을 더욱 궁금하게 했다. 인터뷰는 작가가 대구 작업실에 오게 된 배경에 관한 내용으로 시작됐다.

청도를 거쳐 대구와 쾰른

대구 달성군에 위치한 남춘모 작가의 작업실.

대구 달성군에 위치한 남춘모 작가의 작업실.

남춘모 작가는 대구와 독일 쾰른 두 지역에 개인 작업실을 두고 있다. 대구 작업실을 사용하기 전까지는 당시 대구 시공갤러리를 운영했던 이태 대표의 제안으로 청도의 한 폐교를 개조해 후기 단색화가로 꼽히는 이배·최병소 작가와 함께 사용했다. 셋은 ‘대산 포럼’이라는 걸 만들어 전시와 세미나를 열고, 2박 3일간 대구를 주 무대로 활동하는 작가들을 불러 모아 밤새워 토론하기도 했다. 해당 폐교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새 건물의 교실 네 칸, 목조로 지은 옛 건물의 교실 네 칸으로 이뤄졌는데, 작가는 20여 년간 옛 건물을 사용했다. 2018년 청도교육청에서 폐교를 철거해야 한다는 공문이 내려왔고, 작업실을 옮기려던 찰나 그해 리안갤러리와 소속 작가 계약을 진행하면서 지금의 작업실로 옮겨왔다.



폐교 작업실은 공간이 무척 넓었겠어요.

시내의 집세가 부담스러워서 폐교를 사용하게 된 건데 덕분에 작업이 완전히 바뀌었죠. 한 발만 내디디면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운동장이 있고, 공간이 넓어서 입체 작업도 시작할 수 있었어요.

쾰른에도 작업실을 두고 계시죠. 어떤 곳인가요.

쾰른시에서 배를 보관하던 창고 공간을 작가 스튜디오로 개조한 곳이에요. 분양받아 일정 세를 내고 5년마다 연장해서 사용하는 시스템인데, 지금 14년째 쓰고 있어요. 최근에 그 스튜디오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후임 작가도 많아졌고, 여러 문제가 생겨서 올해 안에 비워줘야 한대요. 다른 스튜디오 입주 작가들은 변호사를 사서 시위 중이에요. 머리 아프네요. 작업 공간을 새로 찾아야 하거든요.

쾰른에서 다른 나라나 다른 지역으로 옮길 생각도 있나요.

지금 세손갤러리에서 스튜디오를 내어준다고 프랑스 파리로 오라는데 마음이 반반이에요. 프랑스 파리는 아는 지인·작가들도 많아서 심심할 틈이 없어요(웃음). 독일은 비밀스럽게 혼자 조용히 있다가 올 수 있거든요. 프랑스가 다시 현대미술의 부흥기가 될 조짐이 보여서 그런 면에서는 매력 있는데, 갤러리가 제공하는 스튜디오 공간에 들어가게 되면 아무래도 구속력이 커질 테니까 고민이에요.

남춘모의 모든 작업은 ‘선’에서 비롯된다. 선을 그리는 평면 회화와 선을 입체화하는 부조회화, 조형, 설치 작업까지 선이라는 한 가지 주제로 표현 방식에 차이를 두고 다양하게 연작한다. 특히 그는 광목천과 합성수지를 이용해 부조회화라는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해왔다. 천에 합성수지를 발라 나무틀에 굳힌 뒤 건축 빔과 같은 ‘ㄷ’ 자 모형의 작은 조각으로 손질하고, 캔버스 위에 붙여 선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시골의 밭고랑을 연상시킨다.

사실 작가는 미술대학 입학 후 취업이 잘된다는 이유로 공업디자인 전공을 희망했다. 지금의 학부제처럼 1년간 모든 과를 경험하고, 이듬해에 전공을 선택하는 계열별 모집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는 공업디자인을 염두에 두고 학과장과 진로 상담을 하던 중 “졸업은 가능한데 취업은 보장 못 한다”는 답변을 들었다. 학교를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회화과를 선택했다. 작가는 당시 상황을 두고 “운명이라는 게 참,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흘러가더라”고 말했다.

“운명이라는 게 참 이상하게 흘러가더라고요”

세손 앤드 베네티에르 갤러리에서 열린 ‘Spring展’

세손 앤드 베네티에르 갤러리에서 열린 ‘Spring展’

지금 하고 계신 비구상 작업은 언제부터 시작했나요.

대학교 3학년 때부터 거의 비구상 작업을 했어요. 추상과 구상의 중간 단계죠. ‘잘 그렸다, 못 그렸다’ 이런 평가 방식에 회의감이 들었어요. 당시 내 장래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 내면적인 갈등이 많이 일어났어요. 그때 접한 게 독일의 표현주의적인(작가의 주관적인 감정이 강하게 표현되는) 방식이고, 그때부터 막연히 독일에 가는 걸 꿈꿨던 것 같아요.

선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대학교 1학년 때 여러 과의 수업을 들으면서요. 한국화 시간에 선대 작가들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어요. 단 몇 개의 선으로 입체감, 여백의 공간감이 다 드러났죠. 이런 부분을 ‘내 방식으로 풀어낼 수 없을까’ 고민하다가 선을 입체화하게 된 거죠. 초반에는 직선 작업을 주로 했어요. 그러다가 현대 건축에서 뼈대 역할을 하는 ‘빔’처럼 부수적인 작업 요소들을 다 빼버리고, ‘ㄷ’자 뼈대로 선을 표현하는 부조회화 작업을 시작해 선 자체에 의미를 뒀죠. 제목도 ‘빔’으로 붙였고요.

곡선은 언제쯤 나오기 시작했나요.

2018년 대구미술관 전시 ‘풍경이 된 선’에 제 어린 시절을 소환했어요. 저는 경북 영양에서 태어났어요.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도 나오는데, 영양에는 평야가 없어요. 부모형제가 산비탈을 개간(開墾)해서 거기에 고추나 담배 농사를 지었죠. 고인돌과 큰 나무를 피해서 소달구지가 끌고 가는 대로 이랑이 만들어지고, 그 위에 검정 비닐을 덮고. 비닐 한쪽을 내가 잡고 있으면 형님이 반대쪽으로 비닐을 끌고 가고, 아버지는 중간에서 바람에 펄럭이는 비닐을 잡고. 그런 기억들이 작업으로 흘러들어오게 된 거죠. 그러면서 곡선이 나온 거예요.

회화, 조형, 설치 등 매번 작업 방식을 달리하고 계신데요.

사람들이 처음 제 작업을 보고 “이거 미술이에요?”라고 물어봐요. 국민학교(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그리기 말고 만들기가 있잖아요. 꼭 그리는 것만이 미술은 아니에요. 농사도, 땅 위에 같은 것만 심으면 토질이 나빠져요. 작물도 병들고, 내성이 생겨서 열매도 안 열려요. 땅을 풍요롭게 하려면 다른 것도 심어봐야 해요. 이번 세손갤러리 전시에서는 공중에다가 조각을 설치해 평면 작업이 3차원의 공간에서 보이도록 했어요. 저도 놀랐고, 사람들 반응도 좋았죠. 저는 설치든 조각이든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다 활용해서 멀티플레이를 하고 싶어요.

부조회화 작업을 시작하신 게 1998년부터죠.

작업 초기에는 선대 작가들이 화선지에 선을 그리듯 캔버스에다가 선을 많이 그었어요. 선에 공간감을 주기 위해서 그 밑에 입체로 그림자도 넣어보고요. ‘선을 어떻게 하면 입체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시절이죠. 캔버스에 선을 무작위로 꽉 채워 그리거나 그걸 다시 선으로 다 덮어버리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입체를 만들게 됐죠.

2019년에 다시 초기 회화를 꺼내셨던 게 큰 화제였어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코로나19가 한편으론 마음을 새롭게 다잡는 자극이 됐어요. 회화 페인팅 작업을 다시 할 수 있게 됐거든요. 중국이 국경을 봉쇄하는 바람에, 상하이 파워롱미술관 전시도 연기되었고 춘절 기간에 맞춰 베이징·상하이 생로랑 매장에 제 작품을 걸기로 했는데 그 계획이 다 무산됐죠. 그 당시 대구도 코로나19가 심해서 한 발짝도 밖으로 못 나갔어요. 그러면서 스스로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어요. 그때 저는 미술시장의 혼돈 속에 있었죠.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 온통 시커멓게 칠한 그림을 다시 찾아봤고, ‘이 시대 얘기에 자극받지 않는 건 예술가가 아니다. 코로나는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경고다’라는 생각으로 이걸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리고 저도 페인팅으로 스스로에 대한 경고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함이었죠.

2021년 남춘모 작가의 회화 작업은 큰 화제를 모았다. 당시 “남춘모의 신작이 탄생했다”며 기사와 관심이 넘쳐났고, 미술시장에서 큰 이슈가 됐다. 하지만 회화는 이전부터 작가가 작업해오던 초기 그림 방식이다. ‘정신 차리자’는 결심으로 회화를 꺼냈던 것이 신의 한 수. 작가는 “페인팅을 다시 꺼내길 정말 잘한 것 같다”고 연거푸 말했다.

절실하고 우연하게 출발한 해외 활동

작가가 33세 되던 해, 그는 처음으로 해외에 발을 디뎠다. 대학원 졸업 후 대학교 강의를 하다가 회의감을 느껴 조급한 마음에 독일 뒤셀도르프로 도피성 유학을 떠난 것. 그곳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대학 ‘쿤스트아카데미’가 있었는데, 당시 현대미술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와 한국의 대표 작가 백남준이 교수로 재직했다. 작가는 ‘다 핑계지만 작가인데 뭘 배우러 학교에 들어가나’ 싶어서 그 어떤 학교도 들어가지 않고 있다가 체류 비자 문제로 2년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해외에서 전시회를 열 기회를 얻게 된 것. 남 작가는 그렇게 대구와 독일을 오가며 조금씩 자리를 잡았고, 어느덧 한국을 대표하는 중견작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그는 한국의 미술사를 알린 1세대 선배 작가들을 떠올리며 ‘자신도 선배 작가들처럼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울컥한 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첫 해외 개인전이 언제인가요.

33세에 독일에서 열었죠. 경력으로 삼기 부끄러워서 언급하지 않은 것들이 많아요. 이름 없는 곳에서도 많이 했고요(웃음).

기억에 남는 전시가 있나요.

독일에 처음 가서 말을 배워야 하니까 한 대학교의 부설 어학당을 다녔어요. 수업 시간이 끝나면 시립미술관에 가서 작품 보는 게 낙이었죠. 거기서 일반 관람객 가이드를 하는 분이 계셨는데 알고 보니 어학당 선생님이셨어요. “한국에서 그림 그리는 사람이다” 하니까 “그럼 네 집에 가보자” 하더라고요. 어느 날 그분이 에피큐어라는 갤러리의 전시를 하나 가져와 제안했어요. 그렇게 개인전을 열었죠. 그 뒤 비자 문제로 한국에 돌아가게 됐어요. 10년쯤 지났을 때 퀼른아트페어에 그 화랑이 나와 있었어요. 그곳에서 저를 보자마자 “당장 네 그림 보러 가자” 하더라고요(웃음). 다른 한국 작가도 소개시켜주고 그랬죠.

이번 세손갤러리 전시는 어떠셨어요.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한 전시였어요. 프랑스의 ‘쉬포르쉬르파스’ 미술운동의 중심에 선 굉장히 전통 있는 갤러리거든요.

공중에 설치물을 선보이셨는데요.

제가 어떤 작품을 준비했는지 갤러리에서 리스트를 보내달라고 해서 보냈어요. 저는 이게 메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작품을 갖고 오라는 이야기가 없는 거예요. 그냥 보내버렸죠. 다른 건 너희들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는데 이건 내가 꼭 걸어야겠다. 반응이 좋아서 다음 전시를 또 하게 됐어요. 세손갤러리가 파리를 비롯해 리옹, 미국 뉴욕, 스위스 제네바, 룩셈부르크 등 6곳에 있는데 룩셈부르크점이 가장 커요. 내년에 스위스 ‘아트 바젤’ 기간에 거기서 전시를 하자고 하더라고요.

해외 갤러리와 국내 갤러리를 경험해보니 어떤 차이점이 있던가요.

세손 갤러리에는 한국에서 말하는 상업적으로 팔 만한 그런 스타일의 작업이 없어요. 작가들이 다 난해하고, ‘이런 걸 어떻게 팔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실밥이 보이고 곧 바스라질 것 같은 작업을 하고 있더라고요. 아마 ‘탈캔버스’ 운동의 영향일 텐데, 그런 작가들 작업이 대부분이고 작업 면에서 굉장히 자유로워요.
해외 진출을 꿈꾸는 후배들이 많습니다.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가장 먼저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를 깨달아야죠. 어릴 때는 아버지가 왜 돌을 골라내고 황무지를 개간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작업도 농사와 같아요. 좋은 환경에서 취미로 그리는 그림이 아니잖아요. 심마니가 나를 발견할 때까지, 온갖 에너지를 응축해놓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해요. 요즘은 자기 자신을 너무 빨리 드러내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안타까워요. 그 방법이 좋을 수도 있겠지만 꼭 내 작품이 팔려야 하고 남이 알아줘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지 않아도 요즘 한국 작가들 다 재능 있고 소질이 많아요. 내 작업실에 작품이 수백 점으로 넘쳐난다면 알아서 냄새 맡으러 올 거예요.

#남춘모 #부조회화 #여성동아

이진수 기자의 비하인드 아틀리에
美에 사는 기자.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공간이 좋아서 갤러리에 간다. 참을성이 없지만 근성은 있다. 데이비드 호크니 선생님을 만나는 그날까지 세계 곳곳 아틀리에 탐험을 계속할 참이다.

사진 김도균 
사진제공 리안갤러리 리버런스 공식 유튜브 채널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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