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다 가블러’를 통해 32년 만에 연극 무대에 오르는 이영애.
1993년 연극 ‘짜장면’ 이후 32년 만에 다시 무대에 서는 이영애가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다. 그가 선택한 복귀작은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헤다 가블러’. 공교롭게도 그에게 이 작품을 향한 마음을 품게 만든 이혜영 또한 같은 시기, 같은 작품으로 무대에 오른다. 이영애는 LG아트센터(5월 7일~6월 8일), 이혜영은 극립극단 명동예술극장(5월 8일~6월 1일)에서다. 2명의 헤다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연극계에서도 이례적인 사건이다.
입센의 고전 ‘헤다 가블러’는 1890년 발표 이후 지금까지도 수많은 배우에게 유혹과 도전의 작품으로 남아 있다. 주인공 ‘헤다’는 고전 속 여성 가운데서도 가장 복잡하고 해석의 여지가 많은 인물로, 아름답고 지적이면서 동시에 냉소적이고 파괴적이기까지 하다. 때문에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맡는 역할로 유명하다. 세계 어디서든 공연 일정이 발표되면 ‘헤다’를 누가 연기하는지가 가장 큰 관심사로 떠오른다.
작품은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헤다와 남편 테스만이 새로운 집에 들어서며 시작된다. 학자로서의 성공을 꿈꾸는 테스만은 승진을 기다리고 있고, 헤다는 그 곁에서 상류층 삶을 누릴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경제적 불안, 과거의 연인인 에일레트의 등장 그리고 그를 둘러싼 경쟁과 파국 속에서 헤다는 점점 벼랑 끝으로 몰린다. 그 과정에서 헤다는 타인의 인생에 개입하며 무의식적으로 파괴적인 선택을 반복하고, 결국 자신도 파멸을 향해 나아간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에게만 허락된 헤다
그 복잡한 인물을 관록의 배우 이혜영이 이미 2012년 국립극단 무대를 통해 완벽히 구현해낸 바 있다. 당시 연극은 전석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화제를 불러 모았고, 연출 박정희와의 조합은 원작의 밀도를 섬세하게 무대에 옮겨냈다는 평을 받았다. 이혜영은 “그녀가 아닌 헤다 가블러는 상상하기 힘들다”는 찬사와 함께 대한민국 연극대상 여자연기상, 동아연극상 여자연기상을 휩쓸었다. 그리고 13년이 흐른 지금 이혜영은 다시 같은 무대에 같은 연출과 함께 선다. 하지만 이는 ‘재연’이 아니라 ‘갱신’이다. 그 자신도 “그때와 지금의 공기가 다르다”고 말한다. 시간이 흐르며 쌓인 감정, 달라진 시대의 감수성 그리고 배우로서의 성숙함이 이번 ‘헤다’를 다시 써 내려갈 것이다.이혜영이 시간을 관통하는 베테랑 배우의 귀환이라면, 이영애는 단절을 깨는 도약에 가깝다. 대중에게는 드라마 ‘대장금’, 영화 ‘친절한 금자씨’로 각인된 얼굴이지만 무대 위에서는 여전히 미지의 존재. 그는 “‘짜장면’ 때는 신인이라 연극 포스터 붙이는 일도 했는데, 모든 작업이 너무 즐거웠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대학원에서 연극 공부를 하며 워크숍 무대에 서고, 김미혜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교수님이 연극을 보러 많이 데리고 다녀주셨는데 타이밍이 맞지 않아 그동안 무대에는 오르지 못했다”며 “입센 희곡 전집을 완역한 김미혜 교수님의 영향으로 언젠가 무대에 오른다면 ‘헤다 가블러’를 하고 싶단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좋은 기회가 왔다.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아 키우고, 또 그 아이들이 사춘기를 겪는 모습을 보며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다양한 감정을 갖게 됐다. 그게 헤다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영애가 출연하는 LG아트센터 ‘헤다 가블러’는 리처드 이어의 각색본을 기반으로 한다. 해당 작품은 영국 최고 권위 공연예술상인 로런스 올리비에상의 베스트 감독상, 베스트 리바이벌상(2006)을 수상한 바 있다. 리처드 이어의 각색본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전인철 연출은 “여성을 비극적인 희생자나 충동적인 인물이 아닌, 자신이 선택한 방식대로 행동하는 입체적인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직접적이고 간결한 표현으로 각 인물 간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춘 부분에 매료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이영애 배우에 대해선 “한 달 정도 함께 작업했는데, 놀랄 정도로 성실하다. 한순간이라도 기복이 있는 모습을 보질 못했다. 같이 연습해보니 귀여운 면도 많고, 사랑스러운 면도 많다. 헤다는 무서운 사람이기도 한데, 여러 가지 면을 무대 위에서 관객들에게 다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적정선을 찾아가고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LG아트센터 무대가 굉장히 넓은데, 오랫동안 카메라 앞에 서온 덕분인지 그 큰 공간을 너무나도 잘 활용한다. 리허설을 할 때마다 매번 달라지고 좋아진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헤다에 대한 궁금증이 커진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관록의 배우, 이혜영은 2012년 ‘헤다 가블러’로 각종 연극상 여우주연상을 휩쓴 바 있다.
“같은 작품을 서로 다르게 연기하는 걸 보는 건 즐거운 경험이죠. 어쩌면 누군가에겐 이 공연이, 그동안 나처럼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 있던 배우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요.”
이혜영은 베테랑의 시간으로, 이영애는 첫발의 에너지로 ‘헤다’라는 인물을 마주한다. 이영애의 ‘헤다 가블러’엔 김정호·지현준·이승주·백지원·이정미·조어진이, 이혜영의 ‘헤다 가블러’엔 김명기·윤상화·김은우·고수희·송인성·박은호가 함께한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다만 분명한 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배우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입센의 세계를 다시 쓰고 있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헤다 가블러’는 올 하반기, 해외에서 TV 드라마로도 제작될 예정이다. 135년 전 쓰인 이 이야기가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얼굴을 만나고, 새로운 시대에 소환되고 있다는 그 자체로 이 연극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은 더욱 뚜렷해진다. 당신이 보고 싶은 헤다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 선택이 곧 당신이 바라보는 ‘여자’의 초상이 된다.
#이영애 #헤다가블러 #여성동아
사진 조영철 기자 사진제공 국립극단 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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