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 문득 하나둘 돋아난 흰머리를 발견했을 때, 탱탱했던 피부가 탄력을 잃고 처지기 시작했을 때, 하룻밤 잘 자고 나면 싹 풀렸던 피로가 쉽게 가시지 않을 때 우리는 노화를 실감하며 씁쓸해진다. 영원한 청춘일 순 없지만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건강하게 노화를 맞이할 순 없을까? 안티에이징(anti-aging), 웰에이징(well-aging), 석세스풀 에이징(successful aging) 등의 단어가 대변하듯 그 어느 때보다 ‘나이 드는 법’에 대한 관심이 높은 요즘, 또 하나의 새로운 화두가 등장했으니 바로 저속노화다. 저속노화란 말 그대로 ‘천천히 진행되는 노화’로 식단 등 노화를 늦출 수 있는 일체의 방법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단순히 나이를 거스르자는 안티에이징을 넘어 기왕이면 건강하고 활기차게 삶을 가꿔 질병도 예방하고 노화의 속도도 늦추자는 적극적인 의지를 담고 있다. 생활 습관 개선, 적절한 운동, 마음 챙김 등 노화를 다스릴 방법은 다양하나 방점은 단연 식단에 찍혀 있다. 박용우 강북삼성병원 건강의학본부 교수는 “항산화 성분이 풍부한 식품을 꾸준히 섭취하는 것은 세포 손상을 줄이고 노화 속도를 늦추는 데 도움을 준다”며 “노화의 속도를 부추기는 단순당과 정제 곡물은 피하고 채소, 과일, 단백질 식품 등의 자연식으로 식단을 채워 급격한 혈당의 변화를 방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정희원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는 저서 ‘느리게 나이 드는 습관’을 통해 “식사를 개선하는 것은 삶에서 경험하거나 앞으로 경험하게 될 많은 문제를 개선 또는 예방하는 강력한 기제가 될 수 있다”고 조언한 바 있다.
천천히 늙고 싶은 MZ 정조준
저속노화로 건강상의 리스크를 낮출 수 있다는 점이 속속 알려지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점점 이에 쏠리기 시작했다. 시장조사기관 마크로밀 엠브레인이 전국 만 19~69세의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웰에이징(건강하고 활력 있는 노화 과정을 추구하는 것) 관련 인식 조사에서 전체 응답자의 67.8%가 “노화 방지에 관심이 있다”고 답했다.이러한 흐름은 각종 매체를 통해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스타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소개하는 유튜브 영상에서는 나이와 상관없이 ‘저속노화’라는 키워드가 빠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강주은은 본인의 유튜브 채널 ‘깡주은’을 통해 저속노화에 도움이 돼 즐겨 먹는다는 올리브오일부터 관련 요리까지 소개했고, 전현무는 MBC 예능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해 병아리콩, 양상추, 닭 가슴살 등을 푸짐히 넣은 김밥을 직접 말며 저속노화 식단을 선호한다고 했다.
저속노화는 당장 노화를 걱정해야 하는 중장년에게만 인기를 끄는 것이 아니다. 마라탕, 탕후루 등 자극적인 음식에 푹 빠져 ‘가속노화’를 경험한 MZ세대 역시 저속노화 식단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웰니스 관련 제품의 보급 및 확산 등으로 꾸준한 건강관리가 중요한 삶의 방식 중 하나로 자리 잡은 결과로 풀이된다.
달콤한 디저트와 음료, 맵고 짠 배달 음식, 간편하지만 영양이 부실한 편의점 식품 등에 노출된 요즘 MZ세대는 과거 ‘으르신들’의 전유물과 같았던 다양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19년 23만여 명이었던 20~30대 고혈압 환자가 2023년 26만여 명으로 11.1% 이상 늘었으며, 같은 연령대 당뇨병 환자는 2019년 15만2000여 명에서 2023년 17만8000여 명으로 4년 만에 14.4% 이상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일제히 망가진 식단이 이 같은 현상을 부추긴다고 지적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MZ세대가 건강을 위해 저속노화 식품에 덩달아 관심을 갖는 것이다. 직장인 이선호(32) 씨는 “저녁 식사를 저속노화 식품으로 대체한 지 3개월쯤 됐다. 확실히 소화도 잘되고 많이 졸리지도 않다”며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식단을 꾸준히 유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실제 마크로밀 엠브레인의 조사에서 ‘노화 방지를 위해 시간 및 비용을 투자할 의향이 있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67.8%가 “그렇다”고 답했으며, 이 중 30대의 동의율은 74%로 40~60대보다 높았다.

저속노화 제품군 매출 ‘쑥쑥’
소비자들의 니즈를 발 빠르게 반영하는 유통업계에서는 앞다퉈 저속노화를 위한 다양한 상품을 출시하고 있다. 저속노화 식단에 대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정제 탄수화물을 줄이고 식이섬유, 단백질 등을 포함한 식단과 상품을 제시하는 것이다. 현대백화점그룹 종합식품기업 현대그린푸드는 지난 1월 저속노화 트렌드를 반영해 케어 푸드 전문 브랜드 그리팅을 통해 헬씨에이징(Healthy Aging) 식단을 출시했다. 파리바게뜨는 프리미엄 건강 빵 브랜드 파란라벨(PARAN LABEL)을 선보이며 저속노화 열풍을 이어가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바 있다. 파리바게뜨 관계자는 “파란라벨을 통해 건강 빵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고, 누구나 빵을 밥처럼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시대를 열 것”이라고 말했다.편의점 또한 예외가 아니다. GS25는 저속노화 식단의 중요한 식자재로 꼽히는 잡곡의 매출이 2022년 15.4%에서 2023년 23.8%, 2024년 25.9%, 2025년 1월에는 60.7%로 오르자 아예 잡곡 파트를 집중 육성하는 모습이다. 그 일환으로 최근 백미와 현미의 장점을 고루 갖춘 프리미엄 상품 ‘오분도미’를 론칭해 소비자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커머스 플랫폼 컬리에서 판매 중인 식단 관리 도시락 브랜드 마이비밀의 다이어트 도시락 8종의 경우 지난해 12월 판매량이 같은 해 9월과 비교해 130% 증가했으며, 같은 기간 샐러드판다의 병 샐러드 12종과 이영애의 건강미식 효소 3종의 판매량 역시 각각 35%, 91%씩 올라 소비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반영했다.
건강기능식품 시장도 빼놓을 수 없다. 정관장이 지난해 10월 출시한 혈당 케어 건강기능식품 GLPro 코어와 GLPro 더블컷은 출시 5일 만에 3100세트가 판매돼 약 4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는 정관장 메가 브랜드 홍삼정 에브리타임 초기 매출의 12배를 뛰어넘는 수치로, 정관장 제품 중 가장 빠른 판매 속도다. 정관장 관계자는 “MZ세대에게 가장 큰 호응을 얻었다”며 “3월까지 매출 40억 원을 돌파했다”고 말했다.
일상 곳곳에서도 저속노화 트렌드가 여실히 묻어난다. 단체 급식 등 식자재 유통·푸드 서비스를 전개하는 CJ프레시웨이가 매월 ‘슬로잇 데이’를 지정해 구내식당 등에서 저속노화 식단을 제공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으며, 중고 거래 플랫폼 당근에서는 요즘 샐러드 모임이 폭증하고 있다. 당근 내 챌린지 기능을 이용하면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일종의 오프라인 모임을 할 수 있는데, 요즘 샐러드 섭취 인증, 샐러드 가게 정보, 레시피 등을 공유하는 유저가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당근에 따르면 지난해 8월 21일부터 올해 2월 20일까지 최근 6개월 동안 신규 생성된 샐러드 모임 수가 전년 동기 대비 78% 증가했으며, 관련 모임 이용자 수는 128% 뛰었다. 유통 전문 크리에이터 엄지용 비욘드엑스 대표는 “몇 년 전만 해도 MZ세대를 중심으로 마라탕, 탕후루 등과 같은 자극적인 식품이 유행하는 경향을 보였으나, 최근에는 저속노화 식품을 찾는 트렌드가 확산하고 있다”면서 “음료는 물론 주류 업계까지 당류를 사용하지 않는 제로 마케팅을 지속하고 있다. 저속노화와 관련된 상품 출시와 마케팅 등의 인기는 계속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초고령화, 초개인화 시대에 걸맞게 세분화된 소비자 취향을 반영할 수 있는 잡곡 등 건강 관련 제품군을 확충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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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게티이미지 사진출처 마이비밀 종근당 파리바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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