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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LITERATURE TRAVEL

〈채식주의자〉와 광주

무엇이 그들의 평범한 일상을 무너뜨렸나

글&사진 · 남기환 | 디자인 · 박경옥

2016. 08. 09

예쁘지도 세련되지도 않으면서 ‘무난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영혜는 그런 이유로, ‘세상에서 가장 평범해 보이는’ 여자와의 결혼을 결심한 ‘나’를 내조하며 단조로운 일상을 이어간다. 이 단조로움을 일순간 깬 것은 2월 어느 밤에 꾼 꿈이었다. 그녀의 ‘채식주의’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단조로운 일상을 뒤흔든 갑작스러운 변화

수백 개의 시뻘건 고깃덩어리가 내걸린 헛간과 그 고기들에서 떨어진 핏물이 고인 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얼굴,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씹으며 느끼는 날고기의 감촉. 이런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로 가득한 꿈에서 깨어난 뒤 영혜는 집 안의 고기와 생선은 물론, 갖은 육가공품까지 모조리 내다 버린다. 식탁은 온통 푸성귀로만 채워지며 남편인 ‘나’의 식성과 취향을 아랑곳하지 않게 된 그녀의 변화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새벽까지 잠을 거의 이루지 못하고 전보다 더 브래지어를 멀리하더니 급기야 평소에도 벗어던지는 지경에 이른다. ‘나’와의 잠자리도 노골적으로 거부하게 되었다. 이유는 육식을 끊은 것보다 더 당황스럽다. ‘나’의 몸에서 고기 냄새가, 땀구멍 하나하나에서 그 고기 냄새가 난다는 거였다.

그럭저럭 일상은 이어갔지만 영혜의 꿈은 계속되고, 살해와 살육의 처참한 이미지들은 그 강도를 더해간다. 그렇게 마치 딴 세상 사람인 듯한 눈빛과 그만큼의 낯섦만 자리한 불안한 시간이 벌써 몇 달째 흐르는 사이 영혜의 몸은 앙상하게 말라 간다. 그리고 그녀는 ‘나’의 회사 중역들과의 중요한 식사 자리에서조차 단 한 입도 고기나 생선을 먹지 않음으로써 ‘나’를 더욱 난감하게 만든다. 평범하기 짝이 없던 아내였기에 이 변화가 보여주는 충격의 낙폭이 더 컸던 것일까? 그녀만큼이나 평범한 처가의 식구들은 언니 인혜의 집들이 날, 말로만 듣던 영혜의 ‘채식’이 그녀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낱낱이 목격하며 적지 않은 충격을 받는다. 이에 장인과 가족들이 선택한 방법은 억지로라도 영혜를 과거로 되돌려놓으려는 듯 우격다짐으로 고기를 먹이는 것이었다. 딸의 채식을 막으려는 장인의 의지는 손찌검과 ‘제압’으로 이어지고, 이를 온몸으로 거부하기 위해 영혜는 자해를 한다. 병원으로 옮겨진 이후 영혜는 안정을 되찾은 듯했지만 더욱 치열하게, 극도로 자아에 몰입한 모습을 띠게 된다.

꿈에서 비롯된 영혜의 변화는 온갖 동물성 음식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고기와 생선류는 물론이고 우유와 달걀까지 금하는, 그야말로 채식 중에서도 완전한 채식을 의미하는 ‘비건(Vegan)’의 단계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만 설명하면 영혜의 내면을,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한참 빗나간 해석이 될 듯하다. ‘채식주의자’라는 말로 누군가를 단정 짓기에는 그가 어느 정도 자발적인, 그러니까 환경이나 생명 존중 혹은 종교적인 확신 등을 이유로 선택한 과정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혜의 선택(혹은 거부)은 이와 달랐다. 끔찍한 살육, 그 대상이 동물이든 사람이든 그러한 이미지를 현실인 듯 생생히 경험한 뒤 고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꿈속에서 경험한 그 냄새와 이빨에 닿는 육질의 느낌, 그 핏빛 살육의 순간이 너무도 생생해 잠을 이룰 수도 고기를 입에 댈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런 영혜의 모습은 ‘나’와 가족들을 더욱 당황시켰고, 동시에 ‘공격성’을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유가 되었는지 모른다. 논리와 설득으로 그녀의 마음을 달랠 계제는 아니었고, 병원 치료가 필요한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꾸짖음과 강제만으로도 육류를 즐겼던 그녀의 옛 식성을 되돌릴 수 있으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 꿈 이전의 그녀는 뭔가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많은 평론가와 독자들은 꿈속의 환영들, 남편과 가족들의 태도, 뒤늦게 되새겨진 어린 시절 영혜의 기억 등을 통해 그녀가 ‘육류를 거부하는 것’에 대한 이해의 근거로 ‘폭력성’을 들고 있다. 드러내지 않고 딱히 거부하지도 않았지만 영혜는 남편의 가부장적 태도에 짓눌려 있었고, 그보다 훨씬 전 부친이 보여준 생명에 대한 잔인함의 기억이 그녀의 내면에 억압되어 있었다. 몸을 옥죄는 브래지어를 노골적으로 벗어던지는 행동 역시 단순한 불편함에 대한 거부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 남편인 ‘나’와 가족들이 보여준 영혜에 대한 시선과 태도는 현실에서 무수히 벌어지는 여성들에 대한 폭력이나 억압과 이어져 있다.   



올해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하며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발표(2004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된 지 10년도 더 넘은 단편 작품이다. 처음 소개되었을 당시에도 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으며 작가 한강의 입지를 높여주었다. 특히 독자들은 군더더기 없고 만연하지도 않으면서 사소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 그의 문체에 사로잡혔다. 단어 하나도 그냥 흘려보낼 수 없을 듯 치밀하게 짜인 작가의 글은 큰 흡입력을 발휘했다.

인간의 의식에 숨어 있던 폭력성과의 조우,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사람들의 탐욕에 대한 이야기는 〈채식주의자〉에서 멈추지 않고 연작인 〈몽고반점〉과 〈나무 불꽃〉으로 이어진다. 당연히 이들을 모두 동일한 흐름에서 놓고 읽어보길 권한다. 일상의 한 부분으로 지나쳤기에 인식조차 하지 못할 폭력과 억압들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일이 된다는 것을, 작가는 소설을 통해 섬뜩할 정도로 생생하게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잔인했던 기억을 따라 떠난 여행

〈채식주의자〉와 함께 떠난 이번 문학 여행의 목적지는 광주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소설 〈채식주의자〉의 배경은 어느 도시를 특정하지 않을뿐더러, 작품 어디에서도 광주는 언급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필자는 〈채식주의자〉를 읽어가며 광주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1980년의 광주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 작가의 고향이 광주라는 점에서 시작해 비교적 최근작인 장편 〈소년이 온다〉가 오롯이 당시를 배경으로 한 수작이어서 많은 이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는 점, 그리고 몇 차례의 인터뷰들을 통해 볼 때 세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폭력성에 대한 인식은 1980년 광주에 대한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작가의 기억에서 출발했다는 유추가 가능하다는 점 등이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전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공간에서 이만큼 참담한 폭력성과 마주했던 사건이 또 있었을까?

그런 생각에서 광주에 도착해 처음 방향을 잡은 곳은 옛 전남 도청이었다. 만약 그 언젠가 ‘5월 광주’의 현장을 찾았다가 꽤 오랜만에 다시 간다면 도청과 그 주변의 달라진 모습이 어색할지 모른다. 2005년 무안으로 전남 도청의 기능이 이전하면서 옛 도청 본관과 부속 건물들은 민주평화교류원 혹은 도청 뒤에 웅장하게 자리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부속 건물로 쓰이게 되었다. 몇 번의 리모델링을 거치는 사이 새하얀 외벽에 그럴듯한 세련미까지 갖추게 되었지만 오랜 흑백 사진과 영상으로 기억되던 그 건물의 형체는 짐작하기 충분하다. 민주주의를 지키려 했던 아픈 역사를 증명하기 위해 옛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자는 요구도 적지 않았지만 새로운 의미를 담은 공간으로 거듭나는 방식으로 도청은 달라졌다. 도청 앞의 분수대는 그나마 옛 모습에 가까운 편이다. 계엄군을 광주에서 몰아낸 시민들이 매일같이 구름처럼 모여 연설을 하거나 듣고 궐기 대회를 열었던 예의 그 장소로 사람들에게 익숙한 공간이다.

이 옛 전남 도청 건물과 광장, 분수대를 중심으로 1980년 5월 광주의 주요한 사건들이 벌어졌던 금남로가 지나간다. 그 역사의 현장들은 이제 ‘오월길’이라는 이름의 걷기 길이자 순례 길로 조성되어 있는데, 계엄군 첫 발포지였던 광주 고등학교 정문 인근, 전남대학교 정문, 녹두서점, 옛 광주 MBC 등에는 당시 상황을 알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어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광주 도심에서 만난 폭압적인 역사의 현장은 상무지구에 자리한 ‘5 · 18 자유공원’에서 보다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이곳은 원래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거점 역할을 했던 상무대가 있던 자리로, 1990년대 후반 전남 장성으로 옮겨간 뒤 대단위 아파트 단지와 상업 시설이 들어섰다. 그러나 상무대에서 벌어졌던 비극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5 · 18 자유공원이다.

이곳에서 계엄군에 의해 끌려간 광주 시민들이 어떤 취급을 받으며 서슬 퍼런 폭력에 시달렸는지를 생생히 접하게 된다. 옛 군사 법정과 영창, 헌병 내무반과 사무실 등의 공간이 그대로 복원되어 있고, 그 안에서 시민들에게 자행된 갖은 악행들이 마네킹 재현과 설명, 사진 자료 등을 통해 전해진다. 실제 영창에서의 구속과 재판 과정을 경험하는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해 학생과 일반인들의 참가가 끊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저 옛 건물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당시의 섬뜩했던 잔혹성과 공포가 전해지는 느낌이어서 오싹하다. 만약 36년 전 이 창살 너머에서 모진 폭력에 시달렸을(어쩌면 그렇게 세상을 떠났을지 모를) 이름 모를 그 누군가에 대한 아픔에 먹먹해진다면 적어도 당신의 가슴은 제대로 살아서 뛰고 있다고 봐도 좋다.

그리고 조금 여유가 있다면 그 당시 죽어간 이들의 넋이 잠든 국립5 · 18민주묘지로 향해볼 일이다. 1980년 5월의 어느 하루로 삶의 시계가 멈춘 이들의 묘비는 말로는 차마 다 못 할 슬픔들을 전하고 있다. 이 넓은 묘지에 가라앉은 적막 사이로, 17세에 거리에서 숨을 거둔 아들에게 보내는 엄마의 편지와 먼저 간 아내에게 남기는 남편의 통곡이 소리 없이 가득하다.



광주에서 마주한 또 다른 과거, 100년의 시간 속으로

이제 잠시 마음도 추스를 겸, 그리고 36년 전 기억을 간직한 공간들이 아닌 이 도시가 지닌 100년 동안의 흔적들과 만나고 싶다면 옛 전남 도청에서 멀지 않은 양림동으로 향해볼 일이다.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일대는 110여 년 전 기독교 선교사들이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여들었던 곳으로, 이제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근대 문화유산 걷기 여행지가 되었다. 양림동은 1904년 유진벨, 오웬 등의 선교사들이 정착하면서 병원을 개설하고 학교(광주수피아여고)와 교회를 세워 일명 서양촌으로 불렸던 곳인데, 주민센터를 기점으로 아직 개발의 손을 덜 탄 마을길로 걸어 들어가면 여전히 남아 있는 당시의 흔적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1904년에 창립된 붉은 벽돌의 그림 같은 양림교회와 교회 부지 안의 오웬기념각(1914년 건립)을 비롯해 어비슨기념관, 1920년대에 지어져 광주에 남은 가장 오래된 서양식 주택이면서 앞뜰의 푸른 잔디가 너무나 이국적인 우일선(윌슨) 선교사 사택 등이 이 시간 여행에 함께한다. 뿐만 아니라 근대식 양반 가옥인 이장우가옥에 들러 고급스러우면서도 푸근한 정경이 그만인 정원을 바라보며 대청마루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인 김현승의 자취를 따라가 보는 여정도 의미 있다.  

광주에서 103년의 시간이 다시 해석되어 사람들의 분주한 발길을 이어가는 공간이 하나 더 있다. KTX로 광주를 드나드는 관문인 광주송정역 바로 건너편에 자리한 ‘1913송정역시장’이다. 이름 그대로 1913년에 세워진 이 오랜 시장이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면서 요즘 광주에서 가장 ‘핫’한 공간으로 손꼽히고 있다. 변화의 초점은 옛 정취를 살리되 다양한 연령층이 찾아올 수 있도록 지속적인 즐거움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장의 터줏대감이나 다름없던 가게에는 그 역사와 주인을 소개하는 간판이 설치되었고, 상인들이 떠나 비어 있던 상점은 크로켓, 롤 케이크, 국수, 수제 어묵, 드립 커피 등을 선보이는 세련된 공간이 대신한다. 이제는 이름마저도 가물가물해진 의상실이 여전히 멋들어진 간판을 내걸고 성업 중이다.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 특산물 가게는 전혀 ‘촌스럽지’ 않다. 그러니까 103년 전부터 이어오던 전통적인 시장의 이야기에, 흥미롭고 인상적이며 현대적인 정취가 더해진 것이다. 이색적인 간판의 글씨체와 색감 등은 그 자체로 볼거리 가득한 디자인 요소가 되어 젊은 여행자들을 자극한다.

그 덕분에 ‘장을 보러 온’ 이들이 평일 낮에도 카메라를 들고 시장 구석구석을 담고, 갓 구운 빵을 맛보러 가게 앞에 줄을 선다. 맛깔스럽게 버무린 비빔국수와 푸짐한 국밥은 기차에 오르기 전 속을 든든하게 채워줘 인기 있다. 다양한 간식거리는 광주에 왔을 때 꼭 챙겨야 할 특산품으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그리고 그들 틈에 원래 이 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어르신들의 모습이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다. 젊은이들이 오가고 가게를 지키니 전에 없던 생기가 돌아 좋다 한다. 그저 보기 좋게 꾸미는 게 아니라 지역 주민의 생업을 위한 대안도 되니 보다 적극적인 도시재생사업의 하나로 알려져 타 지자체 관계자들의 숱한 견학도 이어진다.

무엇보다 이 시장을 둘러보는 사이 과거가 어떻게 현대적으로 멋지게 재해석되고 있는지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오래된 것은 허물고 무조건 새것으로 바꿔야 한다는 개발 시대를 지나온 우리에게, 이 시장은 얼마나 많은 그 옛 시간과 공간들을 놓쳤는지 되묻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채식주의자〉를 들고 떠난 광주 여행은 그 소설의 출발점이었을지도 모르는 36년 전 폭력의 역사와 더불어 100여 년을 무시로 넘나드는 여정을 함께할 수 있는, 뭐라 말로 다 설명하기 힘든 긴 여운을 남기는 순간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Travel Information1 광주 여행 정보
광주문화관광포털 : utour.gwangju.go.kr, 광주관광협회 : www.gjtravel.or.kr

2 1913송정역시장
이용 문의 : 050-1455-34341913, songjungmarket.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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