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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병기 화백의 ‘신동아’ 등 잡지 표지화(삽화)가 소중한 까닭

글 오홍석 기자

입력 2022.03.03 17:28:12

故 김병기 화백은 젊은 시절 ‘신동아’ 등 국내 여러 잡지의 표지화와 삽화를 담당하기도 했다. [가나아트센터]

故 김병기 화백은 젊은 시절 ‘신동아’ 등 국내 여러 잡지의 표지화와 삽화를 담당하기도 했다. [가나아트센터]

‘최고령 현역 화가’ 김병기(106) 화백이 3월 1일 별세했다. 1916년생인 김 화백은 1933년 일본 도쿄에서 유학하며 서구의 근대미술을 처음 접한 뒤 국내 화단에 추상화를 도입하고 자리 잡게 했다. 흔히 그를 한국 추상 미술의 선구자 또는 개척자라고 일컫는 이유도 그 때문.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 화백은 1930년대 후반 도쿄 유학 시절부터 여러 잡지의 표지화와 삽화를 그렸다. 당시 그가 그린 표지화와 삽화에선 젊은 시절 김 화백이 추구한 작품의 주제의식이 오롯이 드러난다. 한국 추상화 거장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할 단초를 엿볼 수 있다.

순수문예지 ‘단층’과 ‘사상계’ 창간호에 그림을 그리다

1937년 9월 출간된 순수문예지 ‘단층’ 3호의 표지화. [현담문고]

1937년 9월 출간된 순수문예지 ‘단층’ 3호의 표지화. [현담문고]

김 화백은 1930년대 후반 도쿄 유학중 평양 출신 문필가들과 어울리다 동인지 작업에 참여하는 기회를 얻었다. 순수문예지 ‘단층’이 바로 그것. 필진으로는 시인 김조규, 소설가 황순원 등이 참여했고 김 화백은 문학수, 이범승과 함께 표지화와 삽화 작업을 맡았다. 제2호(1937년 9월)와 제3호(1938년 3월)는 제호와 포지화를 모두 김 화백이 그렸다.

이후 귀국한 김 화백은 6.25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피난했다. 전란을 피해온 그는 故 장준하 선생과의 인연으로 1953년 4월 ‘사상계’ 창간호의 본문 내 삽화를 담당하게 된다. 당시 부산에는 김병기, 김환기, 백영수, 이중섭, 천경자, 한묵 등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할 작가들이 피난 와 있었다. 전쟁으로 작품 활동에 어려움을 겪은 화가들은 당시 인기가 높았던 잡지의 삽화 작업을 하며 생활을 이어갔다.

부산 피란 미술 작가들을 연구한 박정회 씨는 “(작가들이) 전쟁 통에 한정된 규격과 낙후한 인쇄기술이라는 악조건 속에도 잡지사의 요구를 적절히 수용하면서 자신만의 특유한 분위기를 잃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정회 씨는 김 화백의 표지화와 삽화에 대해 “김 화백은 어려서부터 추사 김정희 등 부친이 소장한 대가들의 글씨를 접해왔는데, 삽화에서 서예의 영향이 보인다”며 “캔버스에 동서양을 가로지르며 새로운 추상의 가능성을 실험한 것으로 추측한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1953년 故 김병기 화백이 그린 ‘사상계’ 창간호(4월호)와 5월호 본문 삽화.[‘항도부산’ 38권0호]

1953년 故 김병기 화백이 그린 ‘사상계’ 창간호(4월호)와 5월호 본문 삽화.[‘항도부산’ 38권0호]

1964년 ‘신동아’ 복간호 표지화를 세 번 다시 그리다

1964년 故 김병기 화백이 그린 ‘신동아’ 복간호(9월호) 표지화. [동아DB]

1964년 故 김병기 화백이 그린 ‘신동아’ 복간호(9월호) 표지화. [동아DB]

김 화백은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된 ‘신동아’의 복간호 표지화 작업도 맡았다. 1964년 서슬 퍼런 박정희 군사정권의 감시 하에 재탄생한 ‘신동아’ 복간호(9월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대단했다. 이 때문일까. 김 화백은  복간호 표지화 작업에 큰 부담감을 가졌다. 김 화백은 훗날 어느 인터뷰에서 “세 차례나 다시 그린 끝에 완성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복간호에 실린 ‘표지의 말’에는 김 화백이 고민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아래는 ‘표지의 말’ 전문이다.

“28년 만에 복간되는 ‘신동아’에 표지를 그리라는 주문이었다. 약간 당황했고 흥분했다. 그런데 편집실에서는 조건이 많았다.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형체라야 하고 창간호이니만큼 주제가 강하면서도 즐겁고 색채가 밝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자, 무엇을 그려야 하느냐? 나의 화풍이 테스트를 받는 것만 같다. 며칠을 두고 나의 상념은 주변을 맴돌았다. 무르익어가는 벌판, 아침의 강산 언젠가 차창에서 본 블루톤의 풍경은 어떠냐. 그런데 붓을 들고 보니 아틀리에서의 풍경이란 그냥 막연하기만 하다. 그래서 좀 더 단적인 주제로 시점을 돌렸다. 정릉골짜기 집 옆에 달려있는 소담한 밤송이가지 하나를 골라잡았다. 마침 두둑하게 발라놓은 청회색 캔버스에 익어가는 녹색의 밤송이 셋.”

故 김병기 화백의 잡지 표지화와 삽화가 소중한 까닭

이듬해인 1965년, 김 화백은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커미셔너로 참석한 뒤 돌연 미국으로 떠났다. 한국에서 작가이자 이론가, 행정가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던 그였기에 주변 사람에겐 갑작스럽고 뜻밖의 일이었다. 그는 후일 “오로지 작가로 살고 싶다는 생각에 내린 결정”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한국 미술계를 떠난 그는 20여년이 지난 1986년에서야 국내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박정회 씨는 “김병기 화백의 6.25전쟁 이전 작품들은 현재 모두 행방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김병기 화백이 남긴 잡지의 표지화와 삽화는 그의 초기 작품관을 짐작해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소중한 자료”라고 부연했다.

#김병기 #사상계# #신동아 #여성동아



여성동아 2022년 3월 6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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