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열리는 시장은 브르노 뒤쪽 광장에 위치해 있다. 겨울시즌에는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대체된다.
체코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꺼내면 사람들은 거의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어머, 좋으시겠어요. 나도 거기 살고 싶다. 여행도 많이 다니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곳은 한국 사람들이 많이 찾는 프라하가 아닌 브르노라는 도시다. 브르노는 ‘체코 제2의 도시’라는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늘 부연 설명이 필요할 정도로 한국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브르노에는 한국인이 거의 살지 않는다. 우리 가족을 제외하고는 어쩌다 들르는 여행객이나 교환 학생들이 전부다.
그래서 브르노에 산다는 것은, 체코인들의 시선을 늘 한 몸에 받는 부담감 속에 지내는 걸 의미한다. 게다가 이곳은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 영어 표지판도 많지 않다. 우린 체코어를 모른다. 여기서 사는 게 그리 녹록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이곳이 좋은 이유는, 여행하기에 더없이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도시 그 자체로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프라하는 2시간 남짓, 오스트리아 비엔나는 1시간 30분, 헝가리 부다페스트는 3시간이면 자동차로 닿는다. 공항으로 나가면 영국 런던과 네덜란드 에인트호번 그리고 이집트, 그리스, 터키(비록 여행 시즌에만 있지만!) 비행기 편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 여행하기엔 정말 멋진 곳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특별한 조건이 늘 따라붙는다. 바로 올해로 다섯 살 된 딸 리안이다.
아이가 있다는 건 모든 것이 두 배, 아니 서너 배쯤 느리다는 걸 의미한다. 다행히 역마살이 있는 남편과 살고 있고, 리안이도 그 피를 물려받아 여행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좋아한다. 리안이는 미국과 한국, 체코는 물론 유럽 내 여러 나라들을 여행했다. 우리 부부는 가끔, “리안이가 다닌 마일리지를 환산하면 아마 어린이 가운데 상위 1% 안에는 들지 않을까?”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
이렇게 여기저기 옮겨 다니지만 여행지에서는 아이가 먹는 것과 자는 것, 그리고 싸는 것에 늘 신경이 쓰인다. 그리고 아이가 자랄수록 점점 더 교육적인 부분도 고려해야 한다. 게다가 난 ‘꽃누나’들처럼 저질 체력을 타고났기 때문에, 큰 짐을 끌고 반나절 이상 움직이면 입에서 온갖 불평과 투정이 저절로 튀어나오는 상태가 되곤 한다.
그럼에도 또다시 여행 가방을 싸게 되는 건,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기와 환경을 마주하고픈 열망 때문이다. 거기에는 리안이의 시야가 넓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담겨 있다. 프라하의 바츨라프 광장에서 비눗방울 예술가를 보고 거리의 즉흥 연주를 들으면서 박수를 치고 함께 즐길 때, 벨기에 놀이터에 가서 그 나라 아이들과 어울려 스스럼없이 놀 때, 비엔나에 갔다가 우연히 관람한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춰 춤을 출 때, 아이의 행동은 우리에게 묘한 감동을 전해줬다. 물론 그 뒤에 늘 고행과 인내심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이달부터 아이 엄마의 시선으로 본 유럽 여행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 첫 번째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브르노와 아름다운 소도시, 올로모우츠다.
1 브르노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슈필베르크 성. 2 브르노 구 시청 건물 벽에 있는 조각. 자세히 보면 조각상 중 하나가 휘어져 있는데, 건축가가 잔금을 받지 못해 화가 나서 일부러 그랬다는 이야기가 있다. 3 브르노의 탁 트인 메인 광장. 시즌마다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1 여행을 좋아하는 부부와 다섯 살배기 딸 리안이는 태어나서 1/3은 여행길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체코 사람들은 자신의 케이크를 다른 사람과 나눠 먹지 않는다.
체코는 프라하를 중심으로 한 보헤미아 왕국과 브르노를 중심으로 한 모라비아 왕국이 합쳐져 만들어진 나라다. 브르노(Brno)는 인구와 규모 면에서는 체코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지만, 관광지 인기도로 보자면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체스키크룸로프나 온천 도시로 유명한 카를로비바리에 훨씬 못 미친다.
간혹 이곳에 들르는 한국인들도 있지만 동유럽 투어를 하면서 하룻밤 묵어가는 정도다. 브르노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다면 멘델의 유전학 실험이 진행됐던 곳(이곳에 멘델의 이름을 딴 대학교가 있다)이라는 점 혹은 스타로브르노(Starobrno)라는 맥주 브랜드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프라하에서 브르노까지는 기차를 타고 오면 쉽다. 중앙 기차역에 도착해 메인 광장까지는 어른 걸음으로 10~15분 정도 걸린다. 드디어 도착한 메인 광장에 아이를 풀어놓는다. 아이는 그저 신나게 뛴다. 그러면 이곳까지 오는 동안 아이에게 쌓인 스트레스는 웬만하면 풀린다.
잠시 쉴 겸 근처의 노천 카페에 자리를 잡는다. 엄마와 아빠는 커피, 아이는 케이크 한 조각이면 만족이다. 체코 케이크는 꽤 맛이 좋아서 우리는 카페에 가면 꼭 한 조각씩 시켜서 먹곤 한다. 특히 ‘메도브닉(medovnik)’이라는 케이크가 유명한데, 여러 겹의 레이어드 사이에 크림을 넣은, 꿀과 호두가 들어간 부드러운 케이크다. 가정집에서 만드는 홈메이드 케이크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기 때문에 슈퍼마켓에서도 살 수 있다.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케이크라 장거리 여행을 마치고 집에 오면 꼭 이 케이크가 생각나곤 한다.
체코 사람들은 디저트로 커피와 케이크 한 조각을 먹는다. 1인 1케이크 시스템이다. 자신의 케이크를 절대 다른 사람과 나눠 먹지 않는 점도 흥미롭다. 여기에 병에 든 물을 따로 시키거나 아이스크림을 주문하기도 한다. 심지어 커피와 콜라를 시켜서 한입씩 번갈아 먹는 사람도 있다.
잘 먹고 잘 쉬었다면 이제부터는 신나는 관광객 모드. 브르노의 랜드마크인 언덕 위쪽의 세인트 피터 앤드 폴 성당 앞에서 사진도 찍고, 구 시청 건물 안에 들어가 이곳의 상징인 매달려 있는 악어도 구경해 본다. 어른보다 역시 아이가 좋아한다.
그 근처에 작은 광장이 하나 더 있다. 그곳은 겨울 시즌과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늘 장이 서는 곳이다. 근처에서 생산된 신선한 제철 과일과 채소를 늘 쌓아두고 판다. 우리도 이곳을 종종 이용하는데, 마트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더 신선한 것들을 살 수 있어 좋다. 시장이 문을 닫는 겨울 시즌에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다. 각종 공예품과 크리스마스 관련 제품, 먹을거리를 판매해 눈과 입을 자극한다.
시내를 둘러보고 오후가 되면 시내와 연결된 언덕을 통해 슈필베르크 성에 올라 시내를 조망해볼 시간. 도심 속 숲속 같은 분위기를 주는 슈필베르크 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나무로 둘러싸인 언덕이라 아이와 조용히 산책하기 좋다. 성 위쪽까지 올라가면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우린 여길 동네 공원 다니듯 자주 오른다. 아이랑 놀기에 이만한 곳이 없으니까. 입장료를 내고 안에 들어가면 더 높이 올라 볼 수 있는 전망대도 있다. 브르노는 겨울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날씨가 좋은 편이라 아곳에서는 파란 하늘을 자주 볼 수 있다. 해 지는 시간에 맞춰 이곳을 오른다면 일몰 풍경도 한 번에 볼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해가 지면 금세 어두워지니 내려갈 때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잘 뛰어놀던 아이가 갑자기 화장실이 급하단다.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레이더망을 총동원해야 한다. 성 안은 공원처럼 넓어서 화장실을 찾기가 쉽지 않다. 표지판을 잘 봐두었다가 필요할 때 빨리 찾아가는 센스를 발휘해야 한다. 다행히 성 바로 앞에 무료 화장실이 있다.
아이와 다닐 때 가장 신경 쓰는 것 중 하나가 화장실이다. 특히 유럽 여행 중에 화장실 찾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지라 화장실 지도 같은 걸 만들어보면 어떨까, 정말 심각하게 고려 중이다. 아이는 기다려주지도, 미리 말해주지도 않는다. “엄마, 쉬”라는 말을 한 순간, 근처에 화장실이 안 보인다면 그때부터 패닉 상태가 돼 버린다. 리안이는 지금은 참을성이 생겼지만, 기저귀를 떼고 나서도 한동안 자신이 언제 ‘쉬’가 마려운지 몰라 바지에 가끔 실수를 하기도 했다. 한 번은 호텔에서 잠깐 외출해 여벌옷이 없는 상태에서 ‘쉬’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자마자 바지가 젖어 들어갔다. 이것만큼 난감한 일이 없다. 다행히 치마를 입고 있었던 덕분에 팬티와 바지를 벗기고 담요로 아이를 둘둘 말아 유모차에 앉혀서 다시 호텔로 급하게 들어온 기억이 있다. 정 안되면 새 바지를 하나 사야 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브르노에서 화장실을 가기 가장 좋은 곳은 역시 카페다. 카페에서 가능한 한 볼일을 해결하도록 하는 게 가장 좋다. 메인 광장 분수대 앞쪽에 ‘OMEGA’라고 쓰인 모던한 건물 2층에도 유료 화장실이 있다. 이용 요금은 5코루나(약 3백원). 영국이나 프랑스 유료 화장실의 이용료가 1천~2천5백원 정도인 것에 비하면 체코의 화장실은 참 착한 편이다.
3 4 브르노 광장의 먹거리 축제와 원형 분수대의 모습. 5 세인트 피터 앤드 폴 성당을 뒤로하고 여유롭게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
1 100m에 달하는 세 개의 첨탑이 있는 세인트 벤츠스라스 대성당. 2 정교한 모자이크로 만들어 가까이 볼수록 아름다운 천문 시계. 3 올로모우츠의 호르니 광장에 있는 17세기 바로크 양식의 조각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다. 4 아빠와 여행을 즐기는 딸. 부녀의 다정한 뒷모습이 아름답다.
브르노에서 기차로 1시간 10분 정도 떨어진 올로모우츠(Olomouc)를 가려면 브르노 기차역에서 늦어도 오전 10시 30분 이전에 기차를 타는 것이 좋다. 올로모우츠 광장의 명물인 천문 시계 퍼포먼스(낮 12시 정각)를 봐야 하니 말이다. 기차에서 내려 트램을 타면 올로모우츠 호르니 광장에 금방 도착한다. 올로모우츠는 브르노보다 규모가 작고 인구도 훨씬 적지만, 관광지로는 브르노보다 잘 알려져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오래된 역사적인 건물과 건축물이 많기 때문.
호르니 광장에 도착하니 탁 트인 광장을 중심으로 다양한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브르노보다 규모는 작지만 훨씬 안정적인 느낌이 든다. 아이는 돌바닥에서 뛰어노느라, 남편은 새로운 곳을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다.
이 광장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건 두 가지. 햇빛을 받아 더욱 빛이 나는 광장의 조각 탑과 시청 건물 벽면에 있는 커다란 천문 시계다. 광장에 높이 솟아오른 조각 탑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돼 있는 35m 높이의 성삼위일체 석주(Holy Trinity Column)로, 바로크 건축물로서 가치가 꽤 높다고 하니 더욱 눈여겨보게 된다. 탑 위쪽에 금빛으로 칠해진 장식은 햇빛을 받아 더욱 찬란하게 빛이 난다.
석주 오른쪽에는 시청이 있는데 그 건물 한쪽 벽면은 아름다운 천문 시계 차지다. 정오가 가까워오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우리도 리안이를 데리고 시계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정교한 모자이크는 가까이서 보니 노동자들이 일하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12시 정각이 되자 음악 소리가 나더니 피규어가 망치질을 하고 인형들이 움직인다. 대단한 볼거리는 아니었지만 아이는 신기해하며 좋아한다. 리안이는 “엄마 인형이 이렇게 움직였어” 하며 따라 하기까지 한다.
광장 주변에는 여러 개의 분수대가 있었는데, 청동으로 만든 고대 신화 속 조각상들이 너무나 정교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광장 안에서도 볼 것이 많아 그곳에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이제 이동해야 할 시간. 하지만 아이는 돌바닥 사이에 끼인 작은 돌을 줍느라 꼼짝도 하지 않는다. 다른 볼 것들이 널려 있어 마음이 바쁜데 아이가 따라주지 않으니 답답했다. 이럴 때는 경험상 아이를 기다려주는 게 맞다. 억지로 끌고 가면 결국 더 큰 화(?)를 부르게 된다. 잠시 뒤 저쪽에서 핑크색 풍선 하나가 날아왔다. 딸아이에게 핑크 풍선을 주워 줬더니 좋아한다. 그리고 우린 얼른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핑크 풍선을 보느라 우리가 어디로 가든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이는 여행지에서 예상 밖의 이유로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한다. 풍선을 갖고 논 기억은 꽤 오랫동안 아이를 지배하는 듯했다. 리안이는 집에 돌아와서도, 가끔 사진을 볼 때마다 핑크 풍선에 대해 이야기를 하곤 했다.
트램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유명한 세인트 벤츠스라스 대성당이 나온다. 3개의 뾰족한 첨탑의 높이가 100m나 된다는 이 성당은 멀리서도 눈에 잘 띈다. 네오고딕 양식이라는데 너무 높아 카메라에 다 안 잡힌다. 한 걸음 떨어져서 아이가 잠깐 놀고 있을 때 잽싸게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성당 앞마당에서 사진을 찍다가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이곳을 방문한 마더 테레사 수녀의 사진도 눈에 띄었다. 리안이는 성당에 들어오면 왠지 모르게 평온한 느낌을 아는지, 기도하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들을 따라 해보기도 하고,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낮춰 말하기도 한다.
성당을 나와 앞쪽에 있는 뮤지엄에 잠시 들어갔다. 시간이 나면 둘러보는 것도 좋겠지만 우린 잠시 앞마당에 머물기로 했다. 몇몇 작품이 전시돼 있는 앞마당도 꽤나 운치 있어 보였다. 오래 걸은 우린 거기에 앉아 잠시 쉬었다가 다시 건너편 골목길 탐험에 들어갔다. 핑크색 집, 노란색 벽, 파란색 하늘… 골목길 안에서도 다양한 컬러의 향연이 이어진다. 색상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이곳만의 독특한 느낌을 만들어낸다.
아이와의 여행은 늘 의외의 신선함을 가져다준다. 우리는 오래된 건물과 조각품을 보며 감탄하지만 아이는 길가에서 얻은 풍선을 보며 좋아한다. 아이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세상의 또 다른 것들을 보고 배운다. 여행을 통해 오늘도 아이의 상상력이 한 뼘쯤 자랐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즐겁다.
정윤숙
‘여성동아’ 기자 출신으로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살다가 체코로 터전을 옮긴 지 올해로 2년째다. 체코 브르노대에서 강의하는 남편과 다섯 살 된 딸 리안을 두고 있으며, 현재 핸드메이드 인형 만드는 작업에 몰두해 있다. 여행과 사진 찍는 것을 취미로 하는 남편과 함께 유럽의 많은 곳을 여행하면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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