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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같은 추억 남기는 홋카이도 기차 여행

나는야 홋카이도의 무인역장

글·사진 | 황경성 일본 나요로시립대학 보건복지학부 교수

입력 2012.11.02 14:05:00

주요 관광지와 명승지를 관통하는 하코다테혼센과 무로란혼센, 일본 최북단 왓카나이로 향하는 소야혼센. 도중에 영화 ‘행복한 빵’의 무대 카페 ‘마니’를 찾아간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동화 같은 추억 남기는 홋카이도 기차 여행

무로란의 지큐미사키.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바다가 타원형으로 보인다.



올해 홋카이도는 언제 여름이 시작되고 끝났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불투명한 계절감을 보이더니 어느 틈엔가 성큼 가을에 들어섰다. 여름의 끝머리와 가을의 입구에서 두 차례 여행을 다녀왔다. 목적지는 홋카이도 최남단 부근과 최북단이었는데 자동차 대신 기차를 이용한 것이 색다른 경험이었다.
내게 기차 여행은 어린 시절의 특별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함박눈 내리는 겨울밤 야간열차에 몸을 싣고 여행하는 것 자체가 적지 않은 설렘을 동반한다. 게다가 기관사들의 전용 공간에 앉아 삼류 극장 영사기처럼 내리쬐는 불빛에 춤추는 눈발을 바라보는 것은 표현하기 힘든 환희다. 그때 기관사들로부터 얻어 마신 따뜻한 차 한 잔은 그 어떤 차보다 더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있다.
그런 동화 같은 기차 여행을 하기에 홋카이도가 안성맞춤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잘록한 여인의 허리 같은 언덕을 배경으로 먼 발치에 우뚝 솟은 산이 있고 드넓은 목초지와 밭, 숲과 강이 쉼 없이 새로운 풍경을 연출해 지루할 틈이 없다. 여기에 청정 자연에서 뿜어져나오는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실 수 있다. 홋카이도의 자연은 어디를 가든 이방인들을 감탄시키는 매력을 가진 듯하다.

홋카이도 기차 여행의 백미, 하코다테혼센·무로란혼센
일본은 철도가 거미줄처럼 깔려 있는 철도대국으로, 전국적으로 역 수만 9천 개가 넘는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절반 이상이 무인역이다. 일본에는 세상으로부터 소외받은 듯 고독하게 서 있는 무인역만 찾아다니는 여행 마니아들도 있다. 닛싱 역의 무인역장으로서 나 역시 홋카이도 내 무인역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번 여행은 철도회사(JR 홋카이도)의 지원으로 홋카이도 내 무인역과 유명 관광지가 있는 역들을 찾아가기로 했다.
제일 먼저 하코다테혼센(函館本線)과 무로란혼센(室蘭本線)에 눈길이 갔다. 두 철도는 홋카이도의 내륙 아사히카와에서 남서쪽으로 향하면서 주변의 아름다운 관광지와 명승지를 두루 거치는 황금 노선이다. 이번 여행의 주 목적지는 무로란혼센에 있는 기타후나오카(北舟岡) 역으로 정했다. 이 역은 플랫폼이 바닷가와 나란히 있어 진홍빛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을 보러 찾아오는 이들이 많다.
삿포로에서 이 노선를 타고 가다 몇 군데 역을 지나면 한국에서 홋카이도로 온천 여행을 오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노보리베쓰(登別) 역에 도착한다. 이곳은 온천의 백화점이라고 부를 만큼 온천 마니아라면 누구나 한 번 이상 들르는 곳이다. 아무 데나 파도 온천이 나온다고 할 만큼 수량이 풍부하고 수질이 다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온천에 몸을 담가보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아쉬움을 달래며 석탄 수송으로 번성했던 도시 무로란으로 직행했다. 무로란 시에는 지금도 철강 관련 공장들이 많이 남아 있어 높은 굴뚝이 연출하는 야경이 특별하다. 관광객들은 무로란에 오면 홋카이도 내 역사(驛舍) 중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옛 무로란 역부터 찾는다. 지금은 역사로 쓰이지 않고 전시관으로 시민들에게 개방되고 있는데 올해로 지은 지 1백 년이 됐다고 한다. 갈색 지붕과 흰 벽이 고풍스러우면서도 이국적인 분위기여서 이 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이들이 많다.
역사를 구경하고 다음으로 찾아간 곳이 무로란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지큐미사키(地球岬)다. 이곳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바다 모양이 지구처럼 타원형을 이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내가 찾아간 날은 마침 구름 한 점 없이 맑아서 등대 밑 하얀 포말이 선명한 타원형을 그려내 마치 지구의를 보는 듯했다.
탁 트인 태평양을 가슴에 품고 다음 목적지인 기타후나오카 무인역으로 향했다. 서너 개 무인역을 지나쳐 도착한 기타후나오카 역은 홋카이도에서 가장 바닷가에 근접했다. 기차에서 내리지마자 저녁노을이 플랫폼까지 붉게 물들였다. 때마침 무리지어 어디론가 날아가는 갈매기 떼를 카메라에 담는 사진작가의 분주한 셔터 소리만이 스산한 바닷바람을 가로지를 뿐이었다. 해가 뉘엿뉘엿해 어슴푸레해지는 때를 황혼(黃昏)이라 하던가. 황혼과 바다와 무인역의 조화에 도취돼 잠시 말을 잃었다.

동화 같은 추억 남기는 홋카이도 기차 여행

1 기타후나오카 역의 진홍빛 저녁노을. 2 영화 ‘행복한 빵’의 무대인 카페 ‘마니’. 3 영화 ‘행복한 빵’의 한 장면.



영화 ‘행복한 빵’의 무대 카페 ‘마니’
지난밤의 감흥이 식기도 전에 다시 무로란선 열차를 탔다. 이번에는 2008년 7월 G8 정상회담이 열렸던 도야 호(洞爺湖)에서 가까운 도야 역이다. 도야 호는 일본에서 아홉 번째로 큰 호수로 다 둘러보려면 버스나 택시, 렌터카를 타고 관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내가 이곳을 꼭 가고자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도야 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은 카페 ‘마니’를 찾아가기 위해서다. 이 카페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된 영화 ‘행복한 빵(しあわせのパン)’은 올해 초 일본에서 개봉돼 잔잔한 화제를 불러왔고, 한국에서도 ‘해피 해피 브레드’라는 제목으로 개봉됐다. 도쿄에서 도야 호로 이주해온 젊은 부부가 빵 카페를 운영하는 모습과 카페에 찾아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영상으로 그려낸 영화다. 주 무대가 카페 ‘마니’일 뿐만 아니라 모든 촬영이 홋카이도에서 이루어졌다.
무로란에 거주하고 있는 대학 동료 후나네(船根) 씨의 안내로 도착한 카페 마니는 한적한 호숫가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곳에 위치해, 눈에 호수를 담고 명상을 하거나 산책을 하기에 좋다. 도중에 민가도 거의 없어서 카페 진입로를 알기 위해 밭일을 하던 할머니에게 물어보니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할머니는 23년 전 삿포로에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는데 이처럼 유명해질 줄 몰랐다며, 예나 지금이나 인적이 드물고 자연이 아름다워 살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카페 이름은 영화에서와는 다르지만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꼭 영화가 아니라도 일단 이곳에 찾아오면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궁극적인 행복의 가치에 대해 대화를 나누게 될 것 같은 분위기다.
카페 주위를 둘러보고 호변 도로를 따라 언덕 위로 올라가자 G8 정상회담이 열렸던 호텔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호텔 앞에는 골프장이 태평양을 내려다보듯 펼쳐져 있고 뒤쪽으로는 도야 호가 한눈에 들어왔다. 왜 이곳으로 세계의 정상들을 모았는지 고개가 끄덕여지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도야 호에서 돌아오는 길에 예쁜 꽃들로 단장한 레이크 힐 팜(Lake Hill Farm)에 들렀다. 귀엽고 앙증맞은 외관에 반해 카페 안으로 들어서지 않을 수 없다. 탁 트인 창가에 앉아 조금은 우아하고 여유롭게 차를 마시면 이 여행에 함께 오지 못한 소중한 사람들이 저절로 떠오른다.



동화 같은 추억 남기는 홋카이도 기차 여행

1 도야 호 부근의 카페 레이크 힐 팜. 2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옛 무로란 역은 올해로 지은 지 1백 년이 된 목조건물이다. 3 왓카나이 역의 최북단 선로.



일본 최북단 왓카나이로 향하는 소야혼센
두 번째 기차 여행은 가족, 지인들과 함께 소야혼센(宗谷本線)을 타고 하코다테혼센과는 정반대쪽이며 일본 최북단으로 유명한 왓카나이(稚內)로 향했다. 북으로 올라갈수록 민가나 마을이 뜸해지고 드넓은 초원 위에 잘 쪼개진 대나무처럼 쭉 뻗은 도로가 나 있다. 이렇게 한 시간 남짓 달리자 첫 목적지인 도요토미(豊富) 역이 나타났다. 이곳은 최북단 온천이 유명하다. 참고로 이 지역은 온갖 시설마다 최북단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우리 일행이 마을 직영 온천에 들렀을 때 나는 눈을 둥그렇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시설을 찾는 사람들마다 자기만 한 여행 가방을 끌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찬찬히 보니 대부분 심한 아토피 환자인 듯했다. 이곳 온천은 피부병에 특효가 있기로 정평이 나 있어 일본 전역에서 이런 사람들이 모여든다.
온천수의 색깔은 갈색에 가까웠고 석유 비슷한 특이한 냄새가 나며, 물 위에는 오래도록 우려낸 갈비탕 같은 기름이 둥둥 떠 있다. 이 온천수 기름으로 만든 비누도 아토피 등 피부병에 효과가 있다고 소문이 나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있다.
온천에 몸을 담그고 여행의 피로를 씻어낸 뒤 도요토미 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샤로베츠 원생화원으로 향했다. 200km²가 넘는 광활한 대지에 들어서자 갑자기 억새풀로 뒤덮인 지평선이 눈앞에 펼쳐졌고, 멀리 웅장한 산이 시야를 가로질러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육지에 있는 산인 줄 알았으나, 나중에 설명을 듣고서야 섬이라는 것을 알았다. 바로 일본 명산 1백 선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하며 리시리후지(利尻副士)라는 애칭을 가진 리시리 섬이었다. 이 섬은 도요토미 역에서 최북단 종착역 왓카나이 역에 이르기까지 기차를 타고 가면서 줄곧 시야에 잡힌다. 때로는 손에 잡힐 듯 다가오다가 때로는 저만치 뒤로 물러나기도 하는 등 변화를 즐길 수 있는 코스다.
홋카이도의 최북단, 아니 일본의 최북단 역 왓카나이에 도착하면 현대식 역사를 관통해 역 광장으로 뻗은 선로의 끝을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최북단의 선로 끝머리에 서게 되는 셈이다. 끊긴 선로임에도 상징성이 큰 덕에 많은 관광객이 일부러 이곳을 찾아가 기념 촬영을 한다.
이 역을 둘러본 뒤 일행은 왓카나이 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노샷프미사키(ノシャップ岬)에서 화창한 날씨 덕분에 말로만 듣던 사할린 섬을 육안으로 볼 수 있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왓카나이 역에서 나요로 시로 향하는 기차에 다시 몸을 싣자, 리시리 섬 뒤로 붉은 노을이 깔리고 있었다. 기차가 출발하고도 꽤 시간이 흘러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았지만 리시리 섬은 때로는 멀리서 때로는 가까이서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쉬이 내 시야를 떠나지 않았다.·#52062;W

동화 같은 추억 남기는 홋카이도 기차 여행


홋카이도 닛싱 역의 명예역장 황경성은…
고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서 체육교육을 전공했으나 복지에 뜻을 두고 일본 도쿄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일본 나요로시립대학 보건복지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지역 사회의 문화·예술 진흥에 힘을 쏟고 있다. kyungsungh@daum.net

여성동아 2012년 11월 5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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