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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LIFE IN HOKKAIDO

“사람들이여 모여라, 시골 오아시스 닛싱 포럼에!”

나는야 홋카이도의 무인역장

글·사진 | 황경성 일본 나요로시립대학 보건복지학부 교수

2012. 04. 02

무인역 옆에 카페라는 공간이 생기자 대학 동료들과 함께 ‘닛싱 포럼’을 시작했다. 10명도 안 되는 사람들로 출발한 포럼은 만 4년이 지나 어느새 35회를 넘기며 나요로 시의 ‘오아시스’가 됐다.

“사람들이여 모여라, 시골 오아시스 닛싱 포럼에!”

눈 덮인 숲 속의 사슴. 홋카이도의 북쪽은 4월에도 이처럼 여전히 눈 세상이다.



속담에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곧 1백 세가 되는 나의 부친이 그렇다. 배울 기회가 없거나 배울 머리가 안 돼서 그런 것도 아니다. 사실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고 한다. 배워야 인간이 된다고 회초리를 든 조부에게 차라리 맞겠다고 버틴 소년이 바로 나의 아버지다. 아버지는 평생 이렇다 할 직업을 가진 적도 없다. 결국 가계를 꾸려나가고 자식을 가르치는 것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머니는 동두천 미군부대에서 물건을 사다가 지방으로 내려가 파는 등 온갖 고생을 하며 4남매를 키우셨다. 막내였던 나는 용산역에서 목포행 밤 기차에 올라타는 어머니를 바라보고 코 묻은 옷으로 눈물을 훔치며 유년기를 보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정반대로 학문만이 인간답게 살게 한다고 굳건히 믿으셨다. 그런 어머니의 독려에도 불구하고 나는 형제들 중 유달리 공부와 거리가 멀었다. 솔직히 책상 앞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운동하는 게 훨씬 좋았다. 하지만 운동선수가 되겠다는 꿈이 좌절되자 나는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검정고시로 대입 자격을 얻어 체육 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는데 막상 대학에 진학해보니 공부를 못해서 운동이나 한다는 식의 편견에 견딜 수가 없었다. 오기가 났다. 마침 그 무렵 맏형이 도쿄대학에서 사회학 박사 과정을 하고 있어 나도 무작정 도쿄대학에 도전했다. 그것도 체육 관련 교육학부가 아닌 의학계 보건학을 택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일본의 나요로시립대학 보건복지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것이 내가 살아온 짧은 궤적이다. 어린 시절 공부와 담을 쌓았던 내가 외국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고 대학 교수가 됐다는 게 인생의 공교로움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맞아 죽어도 글만큼은 배우지 않겠다’던 아버지의 영향 탓인지 솔직히 지금도 책 읽기를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이 작은 도시의 무인역 옆 카페 닛싱에 앉아 시민들을 위한 포럼을 열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순전히 이런 나의 게으름 때문이었다. 나처럼 책 읽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누군가 잘 정리된 내용을 강연으로 들려주면 좋겠다! 그것을 요약한 책자와 영상물도 있으면 좋겠다! 필요하면 만들면 되지 않겠나. 나의 제안에 대학 동료들의 반응도 좋았다. 이들과 함께 지방 소도시에서 지식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시민들에게 청량제가 돼줄 포럼을 만들기로 했다.

팔방미인 달변가 시라이 선생의 유쾌한 진행
하지만 첫 포럼은 기대 이하였다. 카페 닛싱의 단골들조차 포럼에 와달라고 하면 주저할 만큼 참여가 저조했다. 대학 교수가 주도한 포럼이니 골치 아픈 학문적 내용을 다룰 거라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초기에는 10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모여 소박한 공부 모임으로 시작했다. 만 4년이 지나고 포럼 횟수가 35회를 넘기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나서기 쑥스러워하던 일반인들도 이제는 적극적으로 강연자에게 질문을 하고 자신의 의견을 밝혀 활발하게 토론이 진행된다. 나아가 시민들 가운데 발표를 자청하는 사람도 하나둘 생겼다.
포럼 참가자의 직업과 연령층도 다양해졌다. 처음에는 현역 및 은퇴한 교육자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의사, 사법서사, 지역 연구소 연구원, 사회활동가, 시의회 의원, 신문기자, 은퇴 고령자 및 전업주부들까지 회원으로 등록하고 있다. 고무적인 것은 참가자들의 범위가 점차 주변 도시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요즘은 자동차로 2시간 정도 떨어진 아사히가와(旭川) 시와 오토이넷푸(音威子府)라는 곳에서 찾아오기도 한다. 특히 이들 가운데는 홋카이도 밖에서 이주해온 분들이 많아서 특별한 삶을 살아온 분들을 발표자로 소개해줘 포럼의 내용이 나날이 풍성해지고 있다.
대학 동료들의 이해와 협조 덕분에 포럼을 꾸리는 문제는 실타래가 풀리듯 술술 풀려나갔다. 아쉬운 게 있다면 이 모임을 지적이면서도 즐거운 분위기로 이끌어줄 리더였다. 이 고민도 어렵지 않게 해결됐다. 동료들 가운데 군계일학인 시라이 노부아키(白井暢明) 선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포럼의 취지를 설명하고 리더가 돼달라고 하자 그 자리에서 흔쾌히 승낙했다.
시라이 선생은 홋카이도 남서부 도시 무로란(室蘭) 출신으로 홋카이도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독일 유학을 마친 뒤 대학에서 철학과 사회사상사를 가르쳤다. 우리 대학으로 옮겨온 후 단아하고 수려한 외모에다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한 달변 덕분에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서 대학 교수로 은퇴하기 전부터 시민합창단 지휘자로 활약하고 있다. 또 은퇴 후 아사히가와 시의 ‘홋카이도 신문’이 주최하는 시민 강좌에서 독일어를 가르치는 등 일반인들과의 교류를 즐거워하는 분이다. 또 시라이 선생은 홋카이도에서 발행되는 월간지 ‘홋포 저널(Hoppo Journal)’에 15년 가까이 ‘홋카이도 독립론’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홋카이도가 일본으로부터 분리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사람들이여 모여라, 시골 오아시스 닛싱 포럼에!”

1 닛싱 포럼이 열린 카페 닛싱의 모습. 마이크를 든 이가 사회를 맡은 시라이 노부아키 선생이다. 2 포럼이 열린 날 카페 마당을 가득 메운 자동차들. 홋카이도뿐만 아니라 오사카에서도 이 포럼을 찾아오는 이가 생겼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좁히는 진정한 오아시스
2009년 닛싱 포럼의 강연 내용을 요약해 첫 책을 엮었는데 시라이 선생은 여기서 포럼의 목적을 “자연과 예술, 그리고 자유와 지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카페 닛싱에 모여, ‘조금 지적’인 담론과 맛있는 음식을 즐김으로써, 사랑하는 나요로의 일각에 소박한 문화의 빛을 밝히는 것”이라고 정의해주었다. 2011년에 발간된 2권에서는 ‘시골의 오아시스 닛싱 포럼’이란 제목의 글을 써주었다. 일부분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오아시스라고 하면 보통은 사막 또는 도시 한가운데를 연상한다. 어느 쪽이든 황량하고 삭막한 세계의 한복판에 돌연 나타나는 코발트빛 물과 푸르름이 넘치는 숲을 연상한다. 심신이 지쳐 목마른 사람들이 목을 축이고 생명의 환희를 회복하는 곳, 그곳이 오아시스다. 여기 홋카이도 북쪽 지역 전원 지대를 이미 오아시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지역은 일본의 최고 과소 지역이기도 하다. 즉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멀다. 이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교류를 가능케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오아시스라 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시라이 선생과 나는 그때 이후로 지금껏 많은 부분에서 가치를 공유하고 서로의 의견을 지지해오고 있다. 계속해서 선생은 “이곳은 전문가들끼리 모여 전문 용어를 주고받는 학회도 아니며 강연자의 일방통행이 되기 쉬운 공개강좌도 아니다. 프로와 아마추어, 학문과 일상생활이 서로의 담을 넘어 직접 만나는 장소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음식을 함께 한다는 점이 여기에 모이는 사람들에게 일체감을 연출해주는 감초 역이다. 역사적으로도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등 유명한 철학가들의 대화도 음식을 함께 하는 ‘심포지온, 향연’이었다. 이것이 심포지엄의 어원이다”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지금 우리들을 둘러싼 세계는 메마르고 단절돼 있다. 지금 우리가 원하는 부드러움과 갈증을 해소해주는 생명의 물, 그것은 대화와 공감, 결국 완전히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의 커뮤니티고 그것이야말로 오아시스다”라고 했다. 마지막 말은 “사람들이여 모여라, 이 시골의 오아시스 닛싱 포럼에!”



대학의 지역 공헌 실천장이 된 카페 닛싱
대학의 지역 공헌이라는 측면에서 닛싱 포럼의 존재를 누구보다 높이 평가하고 기뻐해준 사람은 나요로시립대학의 전 학장인 구보타 히로(久保田宏) 선생이다. 닛싱 포럼을 학내 행사처럼 즐겨 참석해온 구보타 선생은 2009년 강연집에 이런 말을 남겼다.
“닛싱 포럼의 중심 멤버는 나요로시립대학의 교원이지만 일반 시민에게도 개방돼 매회 시민의 참가가 두드러져 대학에 의한 지역 공헌의 역할을 하고 있다. (중략) 나도 작아진 뇌가 조금이라도 커지기를 기대하면서 참가하고 있는데, 포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은 항상 뇌가 조금은 묵직해진 기분으로 닛싱 카페를 뒤로한다. 이런 모임은 내 경험으로는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모임은 별개라고 생각된다. 이유는 참가해보면 알겠지만 출석자의 마음가짐이 다른 모임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지속은 힘’이라는 말이 있듯이 포럼이 나요로시립대학의 질적 향상과 발전에 기여하리라 믿는다.”
최근에는 오사카 소재 대학에서 온 6명의 교수들이 포럼에 참가해 ‘홈리스’에 관한 발표를 하고 장시간 토론도 했다. 그중 한 분은 올여름에 다시 와서 발표하겠다고 약속했다. 지금까지 진행된 35회의 포럼 테마만 보아도 문학에서 시작해 천문·환경·건강·복지·예술 등 실로 다양하다. 포럼 덕분에 자신의 지식과 교양이 전에 없이 깊어지고 있다며 몇 번이고 머리 숙여 인사하는 참가자들을 보며 절대 녹지 않을 것 같았던 동토가 따뜻한 봄볕을 받아 녹아내리는 생명력과 희망을 느끼곤 한다.

여성동아 연재에 대한 일본의 반응
“나요로 시를 일본인보다 한국인이 먼저 알게 될 듯”

“사람들이여 모여라, 시골 오아시스 닛싱 포럼에!”

월간지 ‘홋포 저널’ 3월호에 실린 글(위). ‘여성동아’ 표지와 함께 게재된 지면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아래는 ‘홋카이도신문’ 1월 31일자에 실린 황경성 교수 부부 인터뷰.

‘나는야 홋카이도의 무인역장’이라는 제목으로 ‘여성동아’ 연재가 시작되자 홋카이도 내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에서 지명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홋카이도 북쪽 지역이 한국의 대표적인 매스컴에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기 때문이다. ‘홋카이도 신문’은 1월 31일자에 황경성 교수가 홋카이도 나요로 지역의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를 한국인들에게 알리고자 칼럼을 쓰고 있다는 것과, 정작 이곳 주민들이 그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한다는 내용의 기사와 함께 황 교수 부부의 사진을 실었다.
‘홋포 저널’3월호에는 황 교수의 대학 동료였던 시라이 선생이 직접 글을 썼다. 역시 황 교수가 나요로 시에 정착해 카페 닛싱을 열게 된 경위를 소개한 뒤 그가 한국의 대표적 월간지 ‘여성동아’에 “맑은 공기와 별이 가득한 하늘, 해바라기 밭, 아름다운 노을을 즐길 수 있는 나요로”에 대해 매달 칼럼을 쓰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이 잡지의 영향으로 1년 뒤에는 틀림없이 ‘나요로’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일본인보다 한국인이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시라이 선생의 지적이 눈에 띈다.


“사람들이여 모여라, 시골 오아시스 닛싱 포럼에!”


홋카이도 닛싱 역의 명예역장 황경성은…
고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서는 체육교육을 전공했으나 복지에 뜻을 두고 일본 도쿄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일본 나요로시립대학 보건복지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지역 사회의 문화·예술 진흥에 힘을 쏟고 있다. kyungsungh@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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