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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그리운 마음

여운계 딸 차가현의 思母曲

“어머니 떠난 지 2년…”

글·김유림 기자 사진·조영철 기자

2011. 03. 17

2009년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 탤런트 여운계. 죽는 순간까지 연기 열정을 불사른 그는 유언 한마디 남기지 않은 채 조용히 삶을 마감했다. 그로부터 2년, 딸 차가현씨가 KBS 퀴즈쇼 ‘사총사’에서 우승하면서 다시금 그의 이름이 회자됐다. 치과 의사인 딸이 들려주는 ‘나의 어머니 여운계’.

여운계 딸 차가현의 思母曲


인터뷰 당일, 약속 장소에 먼저 나와 있던 차가현씨(47)를 보는 순간 기자는 멈칫했다. 어머니 고(故) 여운계씨와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차씨도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도 방금 놀란 일이 있다고 했다. 카페 벽면에 걸려 있는 TV에서 과거 어머니가 출연했던 드라마가 나오고 있다는 거였다. 그는 “제목이 ‘애기씨’였던가?” 하면서 작품명을 정확히 기억해내지 못하는 걸 못내 아쉬워했다. 이날 방영되고 있던 드라마는 2007년 이다해 주연으로 방영된 ‘헬로! 애기씨’였다. 극중 여운계는 억세고 드세 보이지만 속정이 깊은 이학 할매를 연기했다.
요즘 차씨는 이렇듯 어머니와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 알고 싶어진다고 했다. 어머니 생전 많은 추억을 함께 만들지 못했기에 뒤늦은 후회가 든다고. 요즘에도 “네 엄마한테 도움 받은 게 많다”며 연락해오는 어머니의 지인들을 대할 때면 숨겨져 있는 보물을 찾은 듯 반갑고 고마운 마음이 든다. ‘어머니 추억 찾기’에 가장 큰 힘이 돼주고 있는 사람은 NGO 단체 ‘아줌마는 나라의 기둥(아나기)’ 김용숙 대표. 여운계와 김 대표의 인연은 40년 가까이 이어져왔는데, 이제는 차씨가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아나기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1월 말에는 KBS 퀴즈쇼 ‘사총사’에 아나기 회원들과 출연해 첫 우승자가 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날 방송에서 차씨는 폐암 투병 중에도 드라마에 매진했던 어머니의 일화를 공개해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적셨고, 상금 3천만원을 NGO 단체에 기부했다.
“제가 초등학생 무렵, 저희가 전세로 살던 주인집에 당시 고등학생이던 김 대표가 놀러왔다가 어머니와 친해지셨어요. 당시 김 대표는 어머니보다 열두 살이나 아래였는데, 어머니 팬을 자처하면서 잘 따랐다고 하더라고요. 어머니 역시 누구에게든 허물없이 잘 대해주시는 성격이어서 가깝게 지내셨던 것 같아요. 김 대표는 MBC 공채 탤런트 출신인데, 어머니를 보면서 연기자의 꿈을 꾸셨다고 해요. 얼마 안 돼 연기생활을 그만두고 항공사 승무원이 되셨지만 평생 어머니를 당신의 롤 모델로 삼았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자식들 걱정할까 암 검사 비밀에 부쳐

여운계 딸 차가현의 思母曲


차씨의 기억 속에 어머니 여운계는 연예인이지만 사치와는 거리가 멀고, 늘 성실한 사람이었다. ‘참 피곤하겠다’ 싶을 정도로 주위 사람들을 잘 챙기고,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등 인간미가 넘쳤다. 누가 아프다는 말만 전해 들어도 용하다는 병원을 수소문해 소개해주고, 주위에 축하할 일이 생기면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특히 입이 무거워 고민을 상담해오는 친구들이 많았다고 한다. 차씨는 “어머니 친구 중 한 분이 ‘네 엄마한테 이야기하면 새나갈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했다”며 “어머니는 동료 연예인들 관련 소문에 대해 언제나 함구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예전에는 어머니가 정이 많은 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돌아가시고 나니까 얼마나 따뜻하고 현명한 분이었는지 알겠어요. 저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성격이라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도 싫고, 제가 간섭받는 것도 싫어하거든요. 어머니가 주위 사람들 일에 일일이 마음 써주는 게 못마땅할 때도 있었죠.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어머니가 남긴 흔적을 되새기며 살고 싶어요.”
요즘 가장 후회스러운 건, 어머니 생전에 같이 여행 한번 못 해봤다는 사실이다. 몇 년 전 한 아침 프로그램에서 어머니와 함께 떠나는 여행을 제안해온 적이 있지만, 카메라가 부담스럽다며 그가 끝내 거절했다. 차씨는 “어머니는 참 가고 싶어 하셨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치과 의사인 차가현씨는 학창시절에는 공부하느라, 대학 졸업 후에는 바로 결혼해 남편과 일본에서 유학생활 하느라, 또 돌아와서는 아이 키우며 병원일 하느라 어머니에게 딸 노릇 한번 제대로 못 했다고 고백한다. 어머니 역시 육아와 살림, 직장일로 허덕이는 딸을 안쓰러워하며 늘 당신이 도와줘야 하는 자식으로만 여겼다고. 조금이라도 그가 부담스러워하거나 신경 쓸 것 같은 일은 만들지도 않았고,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도 알리지 않은 적이 많았다.



여운계 딸 차가현의 思母曲

1 젊은시절 연극배우로 활동하던 고 여운계의 모습(오른쪽). 2 어머니와 함께 했던 순간. 차가현씨는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 많지 않다며 아쉬워했다. 3 아버지 생신 때 찍은 사진.



“하루는 어머니 친구 분께서 전화를 하셨어요. 지금 엄마가 종기 제거 수술을 받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알고 있느냐고요. 금시초문이라고 했더니, 엄마가 ‘별거 아닌 수술인데 바쁜 가족한테 알릴 게 뭐가 있느냐면서 혼자 치료받고 나가겠다고 했다’는 거예요. 저희는 어머니가 늘 방송일로 바쁘시니까 그날도 밤새 촬영하고 집에 안 들어오신 거라 생각했거든요. 나중에 알고 얼마나 죄송하던지…, 어머니는 그런 분이셨어요.”
폐암 선고를 받기 전인 2007년, 신장암 진단을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진료 중이던 차씨는 친지의 전화를 받고서야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어머니는 “수술하면 괜찮대”라고 하며 태연했다. 다행히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 여운계는 남편이 은퇴 후 머물고 있는 제주도로 내려가 한동안 요양을 했다. 이후 건강을 되찾아 다시 연기생활을 시작했지만 병마는 또다시 그를 덮쳤다. 수술 후 1년 반 만에 암세포가 폐로 전이된 것.
“다 나으신 줄 알았는데 또 암이라니 너무 기가 막혔어요. 병원에서 ‘사이버나이프’라고 하는 방사선 치료로 암 덩어리를 줄이면 생활하는 데 큰 지장이 없을 거라고 했어요. 다만 당장은 어렵고 치료를 해서 어느 정도 상태가 호전된 뒤 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제주도에서 요양하시는 동안 상태가 많이 좋아졌는데, 수술 날짜가 잡힌 상태에서 덜컥 감기에 걸리셨어요. 컨디션이 좋아지니까 방심하고 다시 연기활동을 시작하신 게 원인이었죠. 당시 꽃샘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였는데, 아침드라마 ‘장화홍련’에 출연하느라 새벽에 강화도를 왔다 갔다 하면서 무리하신 모양이에요. 그게 폐렴으로 번졌고 손쓸 새도 없이 갑자기 세상을 뜨셨어요.”

“너무 일 욕심을 내서 미안하다”가 유언 될 줄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던 차씨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는 “그때 어머니를 쫓아다니면서 보살폈어야 하는데, 아니면 절대 연기를 못 하도록 말렸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은 게 너무 후회스럽다”며 결국 눈물을 보였다. 두 차례나 암 투병을 했지만 한 번도 어머니의 죽음을 생각해본 적이 없던 그는 어머니가 폐렴으로 중환자실에 있을 때도 집중치료를 받은 뒤 다시 일어날 거라 믿었다. 죽음을 예감하지 못한 건 환자 당사자도 마찬가지.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남편에게 “당신 말 듣지 않고 너무 일 욕심을 많이 내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 것이 유일한 유언이 됐다.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재학시절 연극 동아리 활동을 했던 고인은 졸업 후 TBC 방송국 공채 탤런트 1기로 뽑히면서 본격적으로 연기생활을 시작했다. 결혼 후에도 연기생활을 쉬어본 적이 없는데, 신혼 초에는 남편이 외국 유학길에 오르면서 남매를 키우며 생활을 꾸려가기 위해서라도 연기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누구보다 연기자로서의 사명감이 컸고,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존재감 있는 역할을 꾸준히 해오면서 어느덧 그에게 ‘연기가 곧 삶’이 됐다.
죽는 순간까지도 연기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한 고인은 과거 한 인터뷰에서 “배우 여운계라고 하면 사람들이 끝까지 연기하는 사람이었다고 기억해주면 좋겠다. 나는 죽을 각오로 무대에서 연기하고, 죽는 그 순간까지도 죽음이라는 연기를 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기도 했다.
“처음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는 자식으로서 자책감에 시달렸는데, 훗날 어머니가 평생 어떤 마음가짐으로 연기를 하셨는지 알고 나서는 마음이 조금 편해졌어요. 어머니가 진정으로 원하셨던 건 연기였고, 자신의 소원대로 죽음의 문 앞에서까지 연기자로 불리셨으니 그것만으로도 고인에게는 위안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여운계 딸 차가현의 思母曲


여운계는 밖에서는 베테랑 연기자였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평범한 가정주부로 할 일을 다했다. 자식들에게도 촬영을 핑계 삼아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게 한 적이 없었다. 보수적인 남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촬영이 없는 날에는 보통 가정주부보다 더 살뜰하게 가족을 챙겼다. 설령 아침 일찍 촬영이 있어도 전날 밤 미리 가족들의 아침식사를 준비해두었고, 집 안도 말끔하게 치워놓았다. 차씨는 사춘기 시절에도 어머니에게 불만을 가진 적이 없다고 한다.
“어머니는 늘 최선을 다하셨다고 생각해요. 학창시절에는 아침을 잘 먹어야 한다며 늘 한 상 가득 차려주셨는데, 바빠서 다 못 먹고 나가면 문 앞까지 쫓아와서 숟가락으로 밥을 떠 먹여주셨어요. 저녁에는 집에서 갓 지은 따끈따끈한 도시락을 학교로 직접 가져다주기도 하셨고요. 다 커서는 오히려 제가 너무 무심한 딸이었죠. 직접 만날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주로 전화로 안부를 물었는데 이제 그 전화마저 받지 못하시니 마음이 많이 허전해요.”

어머니 이름 걸고 제2의 연극 인생 시작
여운계의 검소한 생활은 연예계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다. 차씨가 고등학생 때 입었던 옷들은 대부분 어머니가 동료 탤런트들로부터 얻어온 것이다. 그는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정윤희 아줌마가 줬다면서 어머니가 옷을 한 보따리 가져오셨는데, 한복부터 외출복까지 예쁜 옷이 많아서 오랫동안 잘 입었다”고 말했다.
연예인이라고 해서 혹은 나이 많은 선배라고 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특별대우를 바라거나 우쭐대는 법도 없었다.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여운계는 오히려 자신을 낮추는 게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었다.
“몇 년 전인가, 여러 사람이 함께 밥을 먹으러 간 적이 있는데, 온돌방으로 된 식당이었어요. 식사를 마치고 모두 일어섰는데 어머니가 가장 먼저 내려가 당신 신발을 신으시더니 나머지 신발을 일일이 다 신기 편하게 돌려 놓으시더라고요. 원래 성격이 소탈하다는 건 알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새삼 깜짝 놀랐어요.”
장례를 치르는 동안 문상 온 사람들을 일일이 붙잡고 어머니와의 인연을 묻고 싶었다는 차가현씨. 어머니가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길 바란다는 그는, 어머니 뒤를 이어 연극무대에 서기로 마음먹었다. 오래전부터 연극을 하는 치과의사들의 동호회 ‘덴탈씨어터’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대중을 상대로 하는 프로극단 무대에 서고 싶다는 것. 덴탈씨어터 회원으로 함께 활동하고 있는 남편 역시 그의 결정을 존중해주었다.
“대학 때부터 연극 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어머니는 제가 연극하는 걸 무척 좋아하셨어요. 2003년 연극 ‘안티고네’에서 주인공을 맡자 어머니도 대학시절 똑같은 배역을 맡은 적이 있다고 해서 더욱 의미 있는 작품이었죠. ‘위기의 여자’에 출연할 때는 어머니가 직접 옷을 맞춰주기도 하셨어요. 당시 배경이 70년대 프랑스였는데, 집 안에서 구두를 신으면 이상하다면서 실내화에 예쁜 코르사주를 달아주셨고요. 제가 무대에 설 때는 항상 보러 와주셨고, 잘한다 싶으면 다음 날 전원주·선우용녀 아주머니를 모시고 또 오셨어요(웃음).”
현재 대학생과 중·고등학생 3남매를 키우고 있는 차씨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잡혀 있는 건 아니지만 조만간 “치과 문을 닫는 한이 있더라도” 본격적으로 연극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사람들 입에서 차가현이란 이름 석 자보다 ‘여운계의 딸 차가현’으로, 또 “여운계 딸이라 연기 좀 한다”는 말을 듣게 되면 좋겠다고 했다. 나이 들수록 외모뿐 아니라 내면, 그리고 연기관까지 어머니와 닮아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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