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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惡女 김서형을 말하다

글 김유림 기자 | 사진 지호영 기자 || ■ 의상협찬&소품협찬 XIX 제시byNewYork QooStyle 강희숙 앤디앤뎁 나우하나 D.BLUMG J.MI.ERICA GIORGIOMI 액세서라이즈 AmelliebyElizabeth CAMEO 인핑크 ■ 스타일리스트 신우식 ■ 헤어&메이크업 허정아(컬처앤네이처)

입력 2009.03.24 14:33:00

연예계 ‘늦된 배우’를 꼽으라면 김서형도 빠지지 않는다. 열정 하나로 연기 세계에 뛰어든 지 어느덧 15년. 그동안 그의 존재감은 무명도 유명도 아닌 그야말로 ‘연기하는 사람’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그랬던 그가 ‘아내의 유혹’으로 연기 인생에 새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惡女 김서형을 말하다


올 상반기 최고 인기 드라마는 단연 ‘아내의 유혹’이다. 불륜과 복수로 얼룩진 ‘막장 드라마’라는 지적도 있지만, 저녁 7시20분만 되면 ‘아내의 유혹’을 보기 위해 하던 일을 멈추고 TV 앞에 모여드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시청률 40%의 성공은 아무나 이뤄내는 게 아니지 않는가. 무엇보다 장면마다 핏대를 세우고 열연을 펼치는 배우들의 연기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인물은 악녀 신애리 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내고 있는 김서형(34). 인터넷에서는 그가 독한 표정으로 고함지르는 모습을 캡처해놓은 ‘애리의 분노 3종 세트’가 인기다. 네티즌은 그에게 맹수 호랑이를 빗대어 ‘애랑이’라는 별명까지 붙여줬다.
하지만 화면 밖 그에게서는 날카로운 발톱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상냥하면서도 털털한 말투로 상대를 무장해제시키는 묘한 매력을 지닌 그였다.
“드라마 초반에 강한 인상을 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일부러 화장도 무섭게 했는데 처음에는 ‘남자 같다’며 불편해하는 분도 계시더라고요(웃음). 하지만 여러 선배님과 맞붙어도 밀리지 말아야겠다는 욕심에 최대한 독하고 강하게 보이려고 애썼어요.”

惡女 김서형을 말하다

“저 자신을 버리고 배역에 몰입하고 있어요”

처음부터 각오한 일이지만 드라마 초반 악녀 연기는 그에게 적잖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애리의 강한 면과 여린 면을 동시에 보여주고 싶었기에 대사 하나를 하더라도 몇 번이나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것. 하지만 그는 드라마가 전개될수록 ‘단순한 게 좋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마음껏 소리 지르는 것이 시청자에게 한발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라 생각했다고. 그는 “한때 애리와 내 본연의 모습 사이에서 혼란스러웠지만 요즘은 촬영장에서만큼은 철저하게 애리로 살고 있다”고 말했다.
“‘아내의 유혹’이 가끔 유치하고, 코믹할 때가 있잖아요(웃음). 이혼할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도 비빔밥을 퍼먹으며 시어머니한테 ‘이 밥 먹고 정신 똑바로 차려야죠!’ 하고 외치는 장면 등은 일반인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들죠. 하지만 그런 장면들이 대중의 마음을 끌어당긴다고 생각해요. ‘나 자신을 버리고 완전히 배역에 몰입하는 것’ 그게 이번 드라마를 하면서 배운 교훈이에요.”
드라마 초반 캐릭터를 받아들이기까지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김서형은 드라마가 막바지에 치닫는 요즘 체력적으로도 쉽지 않은 듯 보였다. 거듭 분노에 찬 연기를 하고 나면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다고 한다.
94년 KBS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김서형은 처음부터 ‘고속 엘리베이터’에 오르지는 못했다. 처음 3년 동안은 기수생으로 활동하며 잠깐씩 드라마에 얼굴을 내비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가 넘어야할 벽은 점점 높아만 갔다고 한다.






“연기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어린 나이에 데뷔해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잘 몰랐던 게 원인인 것 같아요. 흔히 말하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부족한 점이 많았죠. 특히 연예계는 인맥이 가장 큰 재산인데, 성격상 싹싹하지 못해 손해를 많이 봤어요. 일하면서 기회는 몇 번 찾아왔지만 그걸 잘 활용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원칙을 중요시하는 성격 또한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타협하는 방법을 잘 몰라서 그는 “짧고 편하게 갈 수 있는 길도 한참을 돌아서 간 적이 많다”고 말했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지금도 그 성격은 여전히 남아 있어 주위 사람들을 답답하고 불편하게 만들 때가 있다고 한다.
“일을 즐기면서 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돼요. 열심히 할 줄만 알지 여유를 부리지 못하거든요. 또 이쪽 일을 하면서 성격이 많이 바뀌었어요. 오랫동안 뜻대로 일이 잘되지 않아서인지 사람이든 일이든 자꾸만 집착하게 되더라고요.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연기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여기까지 어떻게 버텼는데…’ 하면서 오기로 다시 시작하곤 했거든요.”

惡女 김서형을 말하다

김서형은 스물여섯 되던 해 대대적인 변신을 감행했다. 불현듯 ‘더 이상 허송세월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외모부터 바꾸기로 하고 고민 끝에 오랫동안 길러온 머리카락을 삭둑 잘랐다. 그때만 해도 여자 연예인이 커트머리를 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연기자로 살아남으려면 우선 저와 맞는 이미지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평소 방송 관계자나 지인들로부터 ‘도회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도, 어느 순간 제 모습을 보니까 청순함만 강조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머리를 자르고 프로필 사진도 새로 찍어서 방송국, 영화사를 돌며 직접 인사를 다녔어요. 그때까지 매니저 없이 혼자 일했는데, 간혹 촬영 제의가 들어오면 직접 의상을 챙겨서 촬영장에 가고, 메이크업도 혼자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나 싶어요.”

노출 연기 부담 안고 출연한 영화 ‘맛·섹·사’로 연기인생 전환점 맞아

‘포기하느냐, 다시 시작하느냐’의 기로에서 후자를 택한 김서형은 2003년 영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이하 맛·섹·사)을 통해 대중에게 얼굴을 알렸다. 당시 영화는 남녀 배우의 파격적인 노출과 노골적인 정사 신으로 화제를 모았다. 여배우에게 노출 연기는 ‘양날의 칼’이지만 김서형은 ‘맛·섹·사’를 통해 연기자로서 한 단계 더 성숙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출연을 결정하면서 부담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크게 고민하지도 않았어요. 이미 대중의 눈이 많이 달라졌다고 판단했죠. 대부분의 연기자가 그렇겠지만 저는 작품을 대할 때 ‘잃을 것’을 먼저 생각하지 않아요. 다행히 ‘맛·섹·사’를 통해 많은 걸 얻었고, 처음으로 ‘연기가 이런 거구나’ 하는 걸 깨달았죠.”
이듬해 그는 SBS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 남자 주인공 한기주(박신양)의 전처로 출연하면서 지적이고 당찬 이미지로 시청자에게 다가갔다. 이후 ‘굳세어라 금순아’ ‘그린로즈’ ‘연인이여’ 등에 차례로 출연하며 서서히 연기의 비중을 높여간 그는 어느 순간 드라마와 영화에 동시출연하며 바빠지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모든 걸 얻으려 애쓰기보다 조금씩 목표를 높여가며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처음부터 승승장구했다면 지금 누리는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몰랐을 거예요. 요즘 들어 연기에 물이 올랐다고 칭찬을 해주실 때면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버텨준 제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져요(웃음). 물론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지만요.”
김서형은 차갑고 도도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마음이 여리고 눈물도 많다고 한다. 4년 전 초등학교 동창생을 찾아주는 KBS ‘해피투게더-프렌즈’에 출연했을 때는 단짝이었던 친구의 얼굴을 보자마자 통곡에 가까운 눈물을 쏟아내 보는 이의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그때 얘기를 꺼내자 그는 이미 오래전 일인데도 또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누구나 순수했던 시절에 대한 향수가 있잖아요. 저 역시 연예인 생활하면서 힘들 때마다 학창시절을 떠올렸던 것 같아요. 고향이 강원도 강릉인데, 어린 시절 친구들과 산과 바다로 뛰어다니며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었어요. 솔직히 처음 ‘프렌즈’ 섭외를 받았을 때는 친구들을 만날 자신이 없어서 안 나가겠다고 했어요. 아직 연기자로서 미숙한 점이 많은데, 친구들 앞에 제가 마치 유명인사라도 된 것처럼 나선다는 게 내키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방송에 나간 덕분에 오랫동안 보고 싶었던 친구들을 다시 찾았고, 좋은 추억으로 남게 됐어요.”

배역 비중 떠나 다양한 연기 펼치는 배우 되고 싶어

연예계에 데뷔하면서 서울 생활을 시작한 그는 15년 가까이 “언니네 집에 얹혀살다” 최근 독립했다. 두 조카가 초등학생이 되면서 더 이상 함께 지내는 건 무리라 판단했다고 한다. 현재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며 혼자 살고 있는 그는 촬영이 없는 날에는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는 결혼 계획을 묻는 질문에는 “당분간 싱글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고 싶다”고 답했다. 게다가 남자친구가 없어도 전혀 외롭지 않다고 한다.
“아직은 결혼이 중대한 문제로 다가오지 않아요. 솔직히 말하면 과연 결혼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는 것 같아요. 흔히들 결혼해서 아이 낳고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행복하다고 하는데, 제 생각에는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주위 친구들을 봐도 주부만큼 바쁘게 사는 사람들이 없거든요. 저 자신에 대한 욕심이 조금 줄어들었을 때,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줄도 알게 됐을 때 결혼하고 싶어요.”
얼마 전 그는 MBC ‘무릎팍 도사’ 이미숙 편을 감명 깊게 봤다고 했다. 이날 이미숙이 “여자 연기자는 왜 나이가 들면 ‘엄마 역할’만 맡게 되는지 모르겠다. 예순이 돼도 베드신에 도전하고 싶다”고 한 말이 그의 가슴에 와 닿았다는 것.
“평소 존경하는 선배님인데, 방송을 보고 새삼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기자로서 궁극적인 목표는 ‘변신’이거든요. 한편으로는 과연 40대, 50대 제 모습은 어떨까 궁금해요. 지금보다 더 넓은 연기의 폭을 갖추고 있을 걸 생각하면 나이 드는 게 즐겁게만 느껴지죠. 20대 때는 한 살 먹을 때마다 초조하고 두려웠는데, 30대 중반에 접어드니까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지면서 ‘나이 듦’에 대해 관대해지더라고요. 비중의 크고 작음을 떠나 오랫동안 다양한 연기를 펼치는 배우가 되면 좋겠어요.”
김서형은 ‘아내의 유혹’을 마친 뒤 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한동안 애리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다”며 벌써부터 서운한 표정을 짓는 그는 “여행에서 모든 걸 비우고 새롭게 시작하겠다”고 다짐한다. 욕심 많은 연기자, 김서형이 앞으로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여성동아 2009년 3월 5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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