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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유인경의 Happy Talk

대출금과 펀드와 나

입력 2008.12.10 10:57:00

대출금과 펀드와 나

휴대전화로 문자가 들어왔다. 내가 든 펀드가 반 토막이 났으며 앞으로도 더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리고 울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난 돈을 무척 사랑하고 좋아하지만 재테크엔 전혀 재능이 없고 머리도 돌아가지 않는다. 예전에 야무진 친구를 따라 용인 땅에 투자했거나 강남 대치동에 아파트를 사두었다면 지금쯤 노후 걱정을 하지 않고 우아하게 살며 딸에게 “당장 유학 가거라, 그리고 MBA도 엄마가 밀어주마” 하고 친구들에게도 “생일선물로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 샀다”라며 인심을 썼으련만, 솔직히 투자할 돈도 없었지만 관심도 없었다. 그래서 그동안 남들이 다 한다는 주식투자도 하지 않고, 달러도 사 모으지 않고, 계도 붓지 않고 살아왔다.

달콤한 꾐에 넘어가 투자한 펀드, 반 토막으로 돌아오다
그러다 3년 전인가, 남편이 돈이 급하다기에 내 입장에서는 거액을 대출받아 줬다. 이자는 책임지겠다더니 몇 달 후부터는 흐지부지됐다. 남편은 갚을 뜻도 없고 형편도 되지 않는 듯해 아침방송, 강의, 외부 원고 등으로 애써 모은 알토란 같은 저축액으로 갚기로 했다. 은행에 가서 돈을 갚겠다고 하니 착하고 온순하게 생긴데다 그간 친절하게 대해준 은행 담당자가 돈을 갚지 말라고 했다. 대신 고수익성 펀드에 투자하라고 권했다. 그는 디즈니 만화영화에 나오는 날개 달린 천사 같은 표정에 달콤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은행 대출이자가 올라봤자 얼마나 오르겠어요? 이 펀드는 아주 우량한 회사의 주식에 투자하는 것으로….”
각종 그래프와 자료, 신문기사 등을 보여주며 자신감에 가득 차서 설명하는 은행담당자의 말에 난 마치 마취주사를 맞은 사람처럼 뇌기능이 흐려져서 나도 모르게 사인을 하고 ‘거금(속이 쓰려서 도저히 정확한 액수를 밝히지 못하겠다)’을 펀드에 넣었다.
설마 믿을 만한 은행의 친절하고 똑똑한 은행원이 내게 엉터리 조언을 하겠는가. 그도 같은 상품에 투자했다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지 않았던가. 그러곤 잊어버렸다. 내가 무슨 상품에 투자했는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신문기자라고 해서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 다 밝은 것은 아니며 정보에 능통하지도 않다. 나는 경제의 ㄱ자도 잘 모르고 은행상품 역시 보통예금과 적금만 알고 살아왔다. 적금을 찾을 땐 알량한 이자나마 은행에 감사했다. 그런데 세상에, 대출금 갚을 돈으로 투자한 펀드가 반 토막이 났다니 이렇게 황당하고 억울한 일이 있나.
그동안은 다른 일들로 정신 쓸 일이 많아 잊었고, 그 후엔 막연히 경기가 좋아지겠지라며 잊고 있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은행에 갔더니 담당자는 나 외에도 숱한 고객들에게 시달렸는지 탈진하고 넋이 나간 얼굴로 말했다.

“당시에 이렇게 경기가 나빠질 걸 누가 예상했겠어요? 언젠간 좋아질 테니 조금만 더 여유를 갖고 기다리세요. 이제 조금씩 경기가 풀린다잖아요. 저는 대출까지 받아서 펀드 가입해서 정말 죽을 맛이에요.”
따지러 갔다가 오히려 그를 위로하고, “점을 보니 내년 제 운이 굉장히 좋다니까 제 펀드도 원상복귀되겠죠”라며 돌아섰다.
그런데 친구들과 대화를 해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교수인 한 친구는 은행원이 집까지 찾아와 가입을 권유해 2억원이 넘는 돈을 넣었다가 폭삭 망했다고 하고, 한 친구는 올 초 주식으로 손해본 것을 만회한다며 돈을 빌려서 펀드에 투자했다가 집을 팔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고 한다.
더 괴로운 것은 이런 사정을 모르는 가족 때문이다. 남편에겐 절대 내 경제상황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데 속도 모르는 남편은 요즘 뉴스를 보면서 마구 신나한다.
“야, 정말 다행 아냐? 우리가 펀드가 있나, 주식이 있나, 걱정거리가 없잖아. 다들 펀드 때문에 망했다고 난리고 주식투자해서 집을 경매당한 친구도 있는데 우린 얼마나 속 편하냐. 안 그래?”
마치 대저택이 불타는 광경을 보며 아들에게 ‘우리는 집이 불탈 걱정을 안 하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하는 거지 아버지처럼 남편은 없는 자의 행복을 맘껏 누렸다. 정작 자기 마누라는 자기가 쓴 돈 때문에 이중고를 겪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솔직히 고백할 수도 없고 표정관리도 잘 안되는 나는 “억울하게 손해봐서 죽고 싶은 사람들 많은데 그렇게 신나하는 건 옳지 않은 일이야”라며 착한 척할 수밖에 없었다.
손실액을 라면 몇 개, 몇 년 치 월급, 몇 년 치 원고료 등으로 따지면 억장이 무너져서 그저 이명박 대통령과 강만수 장관을 비롯한 경제팀이 대한민국 경제를 살려주기를 바랄 뿐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이명박 대통령을 위해 간절한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새해엔 더 많은 행운과 기쁨이 찾아오길 바라며…
황망하게 돈이 사라져서 소화도 안되고, 체력도 저하돼 끙끙 앓는데 뉴스에 ‘귀족계’ 사건이 소개됐다. 강남에서 대형 식당을 운영하는 주인을 계주로 한 귀족계에 가입했던 계원들이 적게는 수천만원, 많게는 수십억원을 떼이게 됐다는 것이다. 한 유명인사의 아내는 30억원이 넘는 돈을 잃게 됐고, 착실하다고 소문난 연예인도 큰 돈을 손해보게 생겼다고 한다. 계가 무너진 경우엔 원금을 받기 더 어려울 것 같아, 경제가 좋아지고 경기가 풀리면 회복될 수도 있는 내 펀드 문제는 차라리 나은 경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야 있다가도 사라지고 없다가도 불쑥 찾아오는 것. 내 손을 떠난 펀드로 우울해할 것이 아니라 더 많은 행운과 기쁨이 찾아오길 기대해야겠다. 소매치기를 당하거나 금전적으로 손해봤을 때 우리 엄마가 해주시던 말씀이 떠오른다.
“얘, 그래도 돈만 없어진 게 다행인 줄 알아라. 만약 네 팔이나 다리 하나가 사라지면 어쩔래? 가족이나 친구를 잃으면 어떻게 하고? 돈은 좇는다고 오는 게 아니니 그냥 보내줘라. 언젠가 다시 올 거다.”
2008년에 내 곁을 떠나간 돈들아. 2009년에는 부디 다른 친구들까지 다 데리고 내게 찾아오렴. 난 널 기쁘게 맞을 준비가 돼 있단다.







대출금과 펀드와 나

▼유인경씨는…
경향신문사에서 선임 기자로 일하며 인터뷰 섹션을 맡아 흥미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직장 여성에 관한 책을 준비 중인데 성공이나 행복을 위한 가이드북이 아니라 웃으며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는 실수담이나 실패담을 담을 예정이다. 그의 홈페이지 (www.soodasooda.com)에 가면 그가 쓴 칼럼과 기사를 읽을 수 있다.

여성동아 2008년 12월 5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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