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새벽 3시까지 얘기할 수 있어.”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가회동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난 김점선(62)은 긴 인터뷰를 해야 하는 기자의 부담감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40대 중반의 기자에게 대뜸 말을 놓는 그가 당황스럽지 않다. 오히려 오래 알고 지내온 듯 친근감이 느껴지니, 그의 말대로 ‘사람 사귀는 재주’는 타고났나보다.
그가 오른쪽 둘째손가락을 내민다. 작은 가시가 박혀 있다. 그림 그리다 캔버스 뒤쪽의 나무조각이 들어갔는데, 곪지 않게 하려고 소독약까지 갖고 다닌다고 한다.
“사흘 됐어. 이게 암 걸린 거보다 더 신경 쓰인다니까. 이것만 없으면 펄펄 날아다니겠는데…. 이거 뽑으려면 병원에 가서 진료신청하고 째고 해야 할 것 아냐?”
아직 항암치료 중이지만 그의 모습이 좋아보인다. 목소리도 쩌렁쩌렁하다. 그는 지난해 4월 난소암 진단을 받아 곧바로 수술했다. 얼마 안 돼 간에 암이 전이됐고, 지금까지 수십 차례 항암치료를 견뎌내고 있다. 한동안 머리가 다 빠지는 항암치료 부작용에 몹시 시달렸던 그는 올봄 한의사의 처방에 따른 체질식을 하면서부터 몸이 많이 회복됐다.
“병명이 풍선암이야. 체중이 11kg 늘었어. 의사들이 새로운 병 샘플을 얻으려고 몰려들 거야(웃음).”
그는 요즘 병원에 갈 때마다 의사가 완쾌됐다고 돌려보내는 상상을 한다고 한다. “이제 80% 이상 나은 것 같다”고 기대하는 말도 덧붙인다.
|
||||||
“암에 걸리니 대학에 새로 간 것 같아. 쓸 데 있는 거 없는 거 구분하게 되고, 생활을 깨끗하게 정리해 창작에 더 몰두하게 되고. 더욱 진수만을 향해 살도록 단련하는 것 같다 할까. 또 좋은 게 있어. 전엔 사람들이 나보고 예의 없고 거칠고 거만하다 했는데, 이젠 약속을 안 지켜도 암에 걸렸으니까, 그러면서 봐주지 뭐야(웃음).”
병실에서 어린 시절 체험을 동화로 만들어 1백 권 출간할 계획
아픈 중에도 그는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각별한 기억을 담은 이른바 ‘체험동화’ 시리즈다. 동화작가이자 출판기획자인 김진씨와 병실에서 의기투합해 무려 1백 권의 그림동화책을 낸다는 계획을 세웠다. ‘앙괭이가 온다’ ‘큰엄마’, 벌써 두 권이 나왔고 올 연말까지 5권을 더 펴낸다고 한다.
‘앙괭이가 온다’는 섣달 그믐날 밤 산봉우리를 한 발에 한 개씩 성큼성큼 밟고 건너와 댓돌에 놓인 신발을 신고 간다는 전설 속 귀신 ‘앙괭이’를 소재로 했다. 어린 시절 잠자리에서 고모가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 김점선은 “앙괭이가 무섭기는커녕 앙괭이처럼 나도 순식간에 이산 저산 딛고 어마어마한 거리를 오가는 상상의 체험을 했다”고 말한다. ‘큰엄마’는 “어린 시절 그가 유난히 따르던 큰엄마가 죽으면 학이 되어 일찍 사별한 큰아버지를 만나고 싶다고 한 이야기”를 토대로 한 것. 그림은 모두 그가 직접 그리지만,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
“이런 거야. 누구나 어렸을 때 감동했던 동화 같은 이야기가 있잖아. 크면서 잊어버리지만 자신을 맑게 해주는 거…, 어느날 휴가 떠난 사람을 우리가 잡아. 그리고 어린 시절 기억들을 끄집어내게 하지. 그럼, 어느 순간 최면에 걸린 것처럼 엉엉 울면서, 우리 외할머니가 그랬는데요… 하고 감동을 풀어놓는 거야. 그러니, 1백 권 넘게 시리즈를 내는 데 문제없겠지? 5년 내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거야!(웃음)”
아들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한 ‘못 말리는 김점선’
레스토랑에 그는 노트북을 들고 나왔다. 인터뷰하는 사이사이 펜 마우스로 태블릿(사방 10cm의 손바닥 만한 그림판)에 계속 무언가를 그린다. 그리고 그림들을 보여준다. 예순이 넘은 그가 쓱쓱 그려 노트북 화면으로 보여주는 그림들.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는 컴퓨터에 내장된 그림을 판화지에 출력해 ‘디지털 판화’라 부르면서 전시회도 여러 차례 열고 ‘10cm 예술’이라 이름 붙인 책도 펴냈다. 7년 전 오십견으로 오른쪽 어깨가 아파 그림을 못 그리게 된 그에게 컴퓨터를 전공한 아들이 노트북을 사다주고 작업을 할 수 있게 도와줬다고 한다.
“우리 아들? 이제 열흘 있으면 아이 낳아. 지금 미국 유학 가 있어.”
김점선은 3년 전 외아들을 장가보냈다. 그런데 아들 결혼식에 그는 하객으로 참석했다고 한다. 평소 즐겨 입는 티셔츠에 반바지, 운동화 차림으로. 결혼식장 신랑 부모 자리에는 아들 고모인 시누이 내외가 앉았다.
“아들에게 결혼식하지 말고 살라 꼬셨지. 내가 미혼모였을 때 가장 빛났다, 이 세상 가장 명예로운 게 미혼모다 그러면서.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 이게 얼마나 자연스러워. 그런데, 며느리가 꼭 면사포를 써야겠다는 거야. 그럼 ‘신랑은 집에 있다’ 하며 여자 혼자 세레모니를 해보라 권했는데, 그것도 안되고, 결국 이들이 권위주의적인 예식을 하고 말더군. 자유주의자인 나만 달랑 남았지.”
|
||||||
청첩장도 돌리지 않았지만, 입소문이 나는 바람에 작가 박완서·최인호, 피아니스트 신수정, 디자이너 앙드레김에 이르기까지 지인들이 참석해 이 ‘남다른 결혼식’을 목격했다. 김점선의 친정식구들도 넷이 왔다. 그가 기념일이나 관습적인 형식들을 챙기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을 아는 친정식구들은 김점선 몰래 아들에게 전화해 결혼 여부를 확인하곤 했는데, 마침 전화했을 때 “다음 날 결혼”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부랴부랴 참석한 것.
어쨌든 예식을 잘 넘기나 싶었는데, 부모에게 절하는 시간, 아들이 고모 고모부에게 절하기 전 김점선을 보고 고개를 까딱 하며 웃은 게 화근이 됐다.
“사람들이 까만 티셔츠를 입고 앉아 있는 날 보고, 저이가 엄만데 머리가 이상해 저러고 있다, 미쳤다 하면서 쑥덕쑥덕 소문을 내는 거야. 진짜 무서운 세상이더군!”
김점선은 이같이 ‘아주 특이한’ 엄마지만, 결코 나쁜 엄마는 아니다. 아니, 모두들 말로만 떠드는 이상적인 교육을 몸소 실천한 드문 엄마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시간을 들여 털어놓은 육아체험을 간략히 공개하면 이렇다.
“난 우리 아이 기를 때 공부 잘하란 얘기는 한 적이 없어. 장난으로라도 마약·도박은 하지 마라, 담배 멀리 해라, 이런 것들만 강조했지. 초등학교 4학년 아들 생일 파티에 친구들이 왔을 때 너희들 담배 피우지 마라, 했더니 아이들이 모두 뒤집어져. 웃느라고. 그런데 중학생 때 말했을 땐 아무도 안 웃어. 아들이 고 3 땐 그러더군. ‘담배 안 피우는 아이 우리 반에서 나 포함해 세 명뿐’이라고. 성적표를 보지 않았어. 성적에 대해 묻지도 않고. 10대, 20대엔 기본적인 윤리를 배우고 진짜 공부는 서른 넘어서 하는 거야. 60, 70까지 공부해야 해.”
아들은 사춘기에도 반항하거나 방황하는 일 없이 그와 잘 지내다가 고 3때 원서 한 장 써서 성균관대에 특차로 합격했다. 찌든 거, 싫어하는 거 없이, 많은 친구와 사귀며 지내왔고, 사람을 보면 누구에게나 웃는다고 그는 아들에 대해 자랑스럽게 말한다.
“난 아들을 아기 때부터 새끼다, 어리다, 이런 느낌 없이 대했어. 어린 사람의 형태를 띠었지만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보았지. 그래서 닭 보고 꼬꼬, 개 보고 멍멍 하는 식의 베이비 토크는 한 적이 없어. 늘 어른에게 말하듯 했지. 아무리 부모 자식 간이라도 자기 영역을 지켜주고 선을 넘지 않아야 해. 다 까발릴 필요 없지. 아들이 수원 집에 혼자 살 때 간 적이 없어. 아들 결혼 후에도 한번 간 적 없고. 아이에게 평생 막말 안 해봤어. 남들한텐 별별 욕 다 하면서. 진짜 치사하지?(웃음)”
하지만 그는 “아들에게 늘 조금 줬다는 생각밖에 없다”고 말했다. “늘 더 많은 기회를 줘야 한다는 생각뿐”이라고. 그는 세상의 틀을 깨는 데는 용감무쌍하지만 좋은 엄마임에 틀림없다!
인터뷰 중 KBS 서현숙 PD가 책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왔다. 서 PD는 그가 구상한 네 번째 그림동화책의 작가. 오리 이야기에 대해 쓰고 있는 서 PD는 요즘 그가 친하게 지내는 ‘당목클(당면에 목숨을 건 클럽)’ 회원이라고 한다. 이 모임은 안동찜닭을 먹을 때도 닭보다 당면을 먹는 데 혈안이 되는 여자 7명으로 구성됐는데, 혈연·지연·학연 아무 관계없이 ‘오다가다 눈 맞은’ 사람들이라고. 김점선 외에 아무도 그림 전공자가 없지만, 가장 나이 많은 ‘대빵’ 회원이 집을 비운 틈을 타 나머지 6명이 그 집에 물감으로 벽화를 그려넣은 즐거운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
낯선 남자에게 청혼, 만난 첫날 함께 자고 살림 차려
며칠 후 그의 광장동 워커힐 아파트를 찾았다. 우선 놀란 것은 그 곳을 쉴 수 있는 집으로 보기 힘들다는 것. 작업실을 겸한 커다란 창고 같다. 하지만 가족과의 즐거운 한때를 떠올리게 하는 작은 사진들이 곳곳에 보였다. 10년 전 세상을 떠난 그의 남편과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다소 생소한 그의 젊은 시절 모습, 아들 내외와 함께 익살스런 표정으로 찍은 사진, 아주 짧은 머리를 한 그가 중학생 아들과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
||||||
“이건 93년 사진이야. 남편이 아들 데리고 용평 가서 놀다 왔는데, 친구들을 우르르 몰고 왔지 뭐야. 용평 한번 가면 2주일은 걸렸어. 그럼, 난 그 사이 낮엔 그림 그리고 저녁 땐 산책하는 내 생활을 할 수 있는 거지. 그런데, 속세 대표인 남편이 생각하기에 낮엔 스키 타고 저녁엔 술집에서 노는 생활이 무지 재미있었나봐. 집에 돌아오면 아무도 안 만나고 말라서 입술이 파랗게 수도승처럼 된 내가 불쌍해보였다나. 시끌벅적 어울리면 나도 행복해질 거라 생각했다는 거야. 어쨌든 맥주 몇 박스 시켜놓고 친구들이 24시간 우리 집에 눌러 있다 갔는데, 어찌나 화가 나던지. 꾹 참고 있다가 남편하고 아들이 배웅 나갔을 때 내 긴 머리카락을 가위로 삐죽삐죽 막 잘라버렸지. 돌아와 남편이 놀라는 걸 보니 속이 다 시원하더라고(웃음).”
기가 질려 뒷걸음질 쳐서 조용히 방으로 들어간 남편과 달리 아들의 반응은 확실히 다르더라고 한다. 약간 놀라는 듯하더니, 바로 엄마 옆에 앉아 “어떻게 그 머리가 유행인 줄 알았어? 요즘 프랑스 모델들은 다 그 머리해” 하며 “최첨단 패션이다, 엄마답다” 농담하고 웃더라고. 한 달쯤 지난 후 아들에게 “안 놀랐니?” 물어보니, 엄마를 본 순간 우리가 잘못했구나, 엄마의 작업실에서 우리 식대로 놀아 엄마가 너무 힘들었구나, 깨달아 위로해준 거라 했다. 예나 지금이나 그에게 집은 일하거나 자는 공간이지 친구를 불러 노는 공간은 아니라고 한다. 한 달이 채 못돼 그가 ‘머리 깎은’ 일이 주위에 알려졌고, 이후 그의 집에 남편 친구들은 오지 않았다.
남편은 아들을 산으로 들로 바다로, 전국 각지로 데리고 다녔다. 아이가 방학한 날 데리고 나가 개학 전날 돌아왔다. 아이 방학 때만 되면 그는 밥하고 빨래하는 일에서 벗어나 독신이 되고 자유인이 됐다. 하지만 그는 철저한 칩거형 화가였다. 아무 약속, 아무 할 일 없이 그림에만 몰입해야 ‘진짜 그림’이 나온다, 죽기 살기로 전부를 걸어야 그림이 나온다, 그는 고집스럽게 매달렸다.
“내 그림에서 내가 탈출하고 싶으면 굶곤 했지. 헛것을 보려고. 정상적인 의식 속에서는 못 보는 ‘의식의 파괴’를 경험하려 했어. 그때 같은 동네에 살면서 한문을 가르쳐주시던 이이화 선생님(사학자)이 오시곤 했어.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이 없으면 혼자 있는 거 다 알아, 하셨지. 대문을 열면 또 굶었구나, 사흘 이상 굶으면 단백질이 빠져나가 복구가 불가능해, 뇌세포가 죽어, 협박하시면서 먹으라고 난리였어. 한번은 닷새간 물도 안 먹고 굶었더니 세상이 노랗게 보이더라고. 전엔 내 그림에 희뿌옇거나 푸른 바탕이 전부였는데, 노란색 바탕을 쓰게 됐지. 당시 한 일간지에서 정현종 시인의 시에 맞는 그림을 그려달라 했는데, 붉은 맨드라미 바탕을 노란색으로 칠했어. 빨강이 더 강렬해보여 토속적인 냄새가 나더라고. 닷새 굶은 게 고작 노란색 바탕으로 끝났어. 시시하게(웃음).”
“사람들은 그냥 바탕에 노란색을 칠했구나 하지만 작가는 조그만 변화에도 정말 목숨을 건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면, 이처럼 ‘지독한’ 예술가인 그는 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일상의 굴레’ 속으로 들어갔을까.
“서른 넘어서까지 결혼은 생각도 안 하고 있었지. 그런데, 하루는 친구들과 모여 있는데, 김상유 선생님(화가·작고)이 우리에게 진지하게 결혼하라고 말씀하셨어. 부모 돈으로 배 채우고 물감 사며 사는 생활을 계속한다면 구역질이 날 거라고. 아기 기저귀를 빨려고 얼음물에 손 넣고, 콩나물 백원어치를 사면서도 부들부들 떨어보라고, 그런 후에도 예술이라는 게 될지 말지라고…. 조용히 듣고 있는데, 부끄러우면서도 머리 한쪽이 열리는 느낌이었어.”
그는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남자를 두리번거리며 찾기 시작했고, 꼭 한 달 만에 찾아냈다. 후배들과 전시회를 자축하기 위해 모인 선배의 화실에서 목청껏 노래 부르는 낯선 청년에게 ‘필’이 꽂힌 것이다.
“노래를 듣는 순간 그만 반해버렸어. 한 소절이 끝나고 내가 ‘우리 결혼하자!’ 큰 소리로 외쳤지. 그랬더니 그 사람도 ‘좋다! 하자!’ 나만큼 큰 소리로 외치더라고. 그날 밤 여관에 갔고 일주일 후 방 하나 얻어 살림을 차렸지.”
그의 남편은 두 살 연하에 이혼남에 ‘백수’였다. 하지만 ‘고생하기로 작정한’ 그에게 조건은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다고 한다.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냥 함께 살았다. 2년 만에 아이가 태어났고, 아이가 백일이 지났을 무렵 남편이 몰래 동사무소에 가서 혼인신고를 하고 출생신고도 해버려 법적 가족이 됐다.
그는 처음 어떤 남자를 만나도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에 낯선 남자와의 생활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빗물 떨어지는 단칸방에서 그에게 닥친 가난은 예상보다 훨씬 혹독했다. 남편이 가게를 열고 새로운 일을 벌였지만 번번이 빚을 안았다. 친정에서 돈을 얻어다 주는 일을 반복했다. 남편은 친구들과 술 마시고 돌아다니는 습성을 고치지 않았다. 그는 매일 밤 늦는 남편과 죽기 살기로 싸웠다.
“어느 날 남편이 난 능력이 없나 보다, 하며 두 손을 들더라고. 친정에서 돈을 더 가져올 수도 없는 형편이 됐을 때. 그래, 좋다, 이제 내가 그림을 그려 먹고살자 하고는 서울에서 떠나 경기도 산골마을에 들어갔지. 그곳에서 정말 굶어죽을 뻔했어. 첫 개인전 때 그림이 팔렸는데, 그 돈을 친구에게 떼였거든. 무일푼이 되니 평화가 오더라고. 술 먹자는 남편 친구들이 얼씬도 안 하니 싸울 일이 없어진 거지.”
“박완서 선생과는 평생 싸우지 마라” 남편의 유언
남편도 그도 서로에게 점점 적응해갔다. 무엇보다 남편은 철저하게 그의 편이 돼주었다. 유치원생 친구 같았다. 그는 자신이 완성한 그림을 자랑하기 위해 남편이 들어오는 저녁을 기다렸다. 남편은 때로 ‘범상치 않은 이유’로 우는 아내를 달래주는 일도 곧잘 했다.
“난 ‘자뻑’이야. 내 그림에 내가 반해. 컴퓨터를 이용해 그리기 전엔 아름다운 내 그림이 곧 날 떠난다는 생각에 엉엉 울곤 했지. 남편이 날 다루는 법을 잘 알았어. 다리를 뻗고 눈물을 흘리고 있으면 남편이 말해. ‘걱정하지 마! 이 그림은 절대 안 팔려. 무식한 사람들이 이 그림을 알아볼 리가 없어.’ 내가 ‘진짜?’ 하고 물으면 남편이 ‘그래. 예전에 우리가 말했던 그거 돌아왔잖아. 사람들이 이걸 이해하는 데 30년은 걸려’ 했지. 그럼 ‘아, 됐다!’ 하고 밥하러 부엌에 나갔어.”
|
||||||
신문에 안 좋은 전시 평이 실려도, 자신의 그림이 낮게 평가받아 속상할 때도 그는 남편 앞에서 펑펑 울 수 있었다. 남편은 남과 다툼이 없는 성격이었지만 싸움이 잦은 아내를 개의치 않았다. 늘 그가 골라준 옷을 입고 다니면서 ‘화가 아내’의 감각을 믿었고, “우리 아들 지 엄마 닮아 공부 잘해요” 하며 자랑하고 다녔다. 그런 남편이 갑작스레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 생을 마감했을 때 그는 “할 수 있다면 악마와 거래를 해서라도 남편을 살려내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남편은 작가 박완서의 사위가 주치의가 돼줘 삼성병원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전에 집에서 남편이 안락의자에 기대고 유언처럼 한 말을 그는 잊지 못한다.
“자기는 평생 동안 안 싸우는 어른이 꼭 한 명은 있어야 해. 그 어른을 박완서 선생님으로 정해. 죽을 때까지 박선생님하고는 싸우지 말고 살아!”
그 후 10년, 그는 “박선생님에게 무얼 일러바치거나 고자질은 많이 해도 대든 적 없이 착하게 살고 있다”고 자신한다.
“엊그제 박선생님을 만나 ‘지난주 세 명의 악마를 만났거든요’ 하며 이런저런 하소연을 했지. 선생님이 ‘악마는 무슨! 별 거 아닌데, 네가 화가 난 거지’ 하면서 ‘널 보니까 다 나았다. 네 목소리에 귀청이 떨어질 것 같아’ 하시더라고(웃음).”
시골에 살 때 이이화 선생의 한문 제자로 만난 박완서와 김점선은 둘 다 개성 사람이다. 김점선은 “개성 사람은 무조건 좋다”고 말한다. 다섯 살 때 피란 내려오느라 개성을 떠났지만, 그는 자신을 무척 아꼈던 할머니에 대한 기억, 고향 집에 대한 추억을 곱게 간직하고 있다. 폐암으로 남편을 먼저 잃은 박완서는 김점선의 남편에게 홍삼 달인 물, 버섯 달인 물을 가져다주며 치료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남편이 세상을 뜬 다음 날 김점선은 하혈을 했고 폐경이 됐다. 정신력이 강하다고 자부해온 그였지만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정신병원에 가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고 한다.
“새벽 4시에 성당에 가면 항상 한두 사람이 먼저 와 있는 거야. 나보다 더 괴로워서 침상에 못 누워 있는 사람이 있구나, 생각하면 움직임 없이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는 게 조금은 위안이 되더라고. 49재가 지나고는 다른 사람의 슬픔이 보였어, 우리 아들도 슬프구나, 그토록 좋아하던 아들을 두고 간 남편 자신도 슬퍼서 눈이 안 감기겠구나….”
지치고 힘들 때 끄집어내는 행복의 기억이 나의 그림
적잖은 굴곡을 겪었음에도 그의 그림은 무척 밝다. 말·오리·토끼·고양이·나팔꽃·맨드라미…, 친근한 동물들과 식물들이 동심을 떠올린다. 행복감에 젖은 듯 부드럽게 미소 짓는 말, 경쾌하게 달리는 오리, 환한 꽃밭, 그 어디에도 어두운 구석은 찾을 수 없다.
“생활이 지치고 힘들 때 어린 시절의 기쁨, 환희의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거지. ‘아, 나는 행복해지고 싶다’ 하면서. 그게 없다면 음침하고 재미없는 일상을 어떻게 견뎌왔겠어? 워즈워드의 시 ‘수선화’ 같은 ‘브레인 파워’가 작품에 들어가 있어야 해. ‘어느 날 호숫가에서 수천 수만 송이의 수선화 꽃무리가 춤추고 있는 것을 보았네’ 이것만으로는 안 되지. ‘이후에 외로이 침상에 누워 있을 때 그 꽃송이들이 마음에서 피어나 춤추네’ 이렇게 기억이 확장돼야 한다는 말이야. 나도 환희의 기억들을, 그 감동을 증폭시켜서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어. 이 세상이 힘들고 썩었지만 그래도 좋은 게 굉장히 많다, 본질은 굉장히 아름답다 말하고 싶은 거지. 누구나 감성을 발달시켜 섬세하게 아름다움을 느낄 권리가 있고 그걸로 재충전을 할 수 있어.”
|
||||||
김점선은 미술의 대중화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그는 작품의 ‘희소성’에 가치를 두지 않는 대중적인 작가다. 그는 자신의 유화를 먼저 사진으로 찍어 판화처럼 유통시켜 돈에 눈이 멀었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한다.
“40·50대가 경제적으로 안정돼 유화를 구입하는 건 재산적인 가치 외에 별 의미가 없어. 미술이 가장 필요한 건 아이 때야. 그림을 출력해 벽지에 붙이고 아이가 세 살 때부터 그 위에 자기 취향대로 막 그리게 해야 해. 그래야 독자적인 감각이 키워진다고. 우리 국민의 그림이 밀레의 ‘만종’ 아니야? 저작권 문제가 없어서 그런 거지. 그림의 대중화가 정말 필요해. 우리나라 화가들의 그림도 성냥통, 국수 싸는 종이에까지 많이 들어가야 해. 화가들이 많이 참여해야지. 그게 애국애족이야.”
자신의 그림을 아이가 막 찢고 위에 크레용을 칠해도 기분 나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섬세한 떨림’을 가진 예술가란 사람들
가수 조영남은 “김점선은 나보다 30배는 더 괴짜다. 내가 김점선을 극도로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탁월한 그림 외에 그 옆에만 있으면 내가 정상으로 어필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김점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그는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불안해하는 사람들 때문에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엔 초대받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라고 한다. 그런 그가 사람에 대해 갖는 ‘섬세한 떨림’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내가 용감해보이지만 상대를 어려워하는 게 있어. 대중을 대할 때는 막 얘기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수줍어해. 영혼을 접하게 되니까. 사람 속에는 멋있는 게 다 있어. 그래서 아무리 오래 알고 지낸 사람도, 왕이나 무명작가나 모두 어려워. 섬세한 떨림을 누구에게나 다 느끼기 때문이지.”
그는 작가 최인호를 만났을 때 느낀 감동을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루에 밀물과 썰물이 너무 심해 살 수가 없다는 거야. 그 얘기를 듣는데, 눈시울이 붉어져 얼른 다른 질문을 던졌어. 섬세한 감성을 가지고 이 세상을 함께 버텨나가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랄까, 나이 들고 예술적 성취를 이루어가도 매일매일 생살에 소금 뿌리듯 아픈 것을 아무도 모르는구나 했는데…. 예술가는 인간 원형 그대로 살아 있어야 해. 틀에 얽매이지 않고 껍질이 굳어지지 않아 20대처럼 상처받고 격렬히 환희하는 게 소원인 사람들이지….”
김점선은 해가 지면 그림 그리기를 멈춘다고 한다. TV도 보지 않고 책도 읽지 않는다. 오로지 상상의 나래를 펴기 위해서. 가만히 자신의 몸을 누인 채 눈을 감는다. 그는 불면조차 즐긴다고 한다. 매일 밤 그는 다른 세상에 가 있다. “결혼 전 집에서 공상하고 있으면 우리 엄마가 ‘저년, 또 궁량질(궁리)한다’고 했지. 쓸데없는 생각만 한다고(웃음).” 기발한 그의 상상은 그림으로 나오고 글로도 풀어져나온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차창을 통해 본 하늘이 유난히 파랗다. 난 새가 아닌데 왜 하늘에서 날아야 해? 하늘에서 흰 뭉게구름 사이로 신나게 걷는 모습을 그린 그의 그림이 생각났다. 화가 김점선은 이 하늘을 보고 무얼 느낄까, 궁금해졌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