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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유인경의 Happy Talk

‘그’의 잔여수명 테스트

입력 2008.05.19 13:55:00

‘그’의 잔여수명 테스트

신철, 기억풀이-산길을 걷다 캔버스에 아크릴릭, 72.7×60.6cm, 2008 신철, 기억풀이-꽃밭에서 캔버스에 아크릴릭, 72.7×60.6cm, 2008 신철, 기억풀이-봄맞이 캔버스에 아크릴릭, 116.7×91.0cm, 2008(왼쪽부터 차례로)


급한 일-갑자기 돈이 필요하거나 매우 궁금한 사건이 있거나 뭔가 물건을 찾아야 할 때 등-을 제외하고는 절대 전화를 걸지 않는 남편. 달콤한 사랑의 안부전화는 신혼시절에도 받은 바 없는데 어느 날 그가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목소리가 묵직했다.
“당신 나한테 잘해라.”
“언제는 당신한테 못하우? 갑자기 왜 그래?”
“나…(잠깐의 침묵과 한숨) 앞으로 5년밖에 못 산단다.”
“왜? 건강검진 받았어? 무슨 일인데?”
“아니, 친구가 메일로 ‘잔여수명 테스트’ 프로그램을 보냈는데 실행해 보니 남은 수명이 5년이야. 환갑도 못 넘긴다고 하네.”
그 프로그램을 직접 해보진 않았으나 대충 내용을 아는 나는 일단 심호흡을 하고 그에게 설명했다.
“담배를 끊겠다고 해. 다음 달부터 끊는다면서.”
“(잠시 정적 후) 7년을 더 사는 군.”
“거봐. 그리고 당신은 일단 유전적으로 90세는 보장인데 왜 그런 결과가 나왔을까. 친할아버지는 97세에 사고로, 외할아버지도 백세까지 사셨고, 아버지도 87세에 계단에서 넘어진 게 화근이 돼 돌아가셨잖아. 그런데 왜?”
“음. 어떻게 살고 싶으냐고 하는 질문에 ‘짧고 굵게 살겠다’ 라고 답했지.”
“그걸 ‘가늘고 길게’로 바꿔봐.”
“(또다시 정적 후 목소리 환해지며) 30년이 더 늘었네. 그럼 37년 더 살 수 있군.”
“끊어!!! 이 웬수.”
아, 결국 내 남편은 ‘애물단지 남편은 유난히 오래 산다’는 진리만 증명할 것 같다. 5년밖에 못 산다는 말을 남편의 애잔한 목소리로 들었을 때는 솔직히 ‘내가 과부가 되는 건가?’ 싶어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앞으로 장장 37년을 더 산다는 목소리에는 억장이 무너졌다. 이 게으르고 느물느물한 남편을 얼마나 더 오래 봐야 한다는 말인가.

‘가늘고 길게 살기’’현재에 만족하기’가 장수의 비결
그날 밤, 컴퓨터를 켠 다음 남편에게 그 프로그램을 다시 해보라고 했다. 술 마시냐, 담배 피우냐, 수술 받은 적 있냐 등등 객관적인 질문도 있지만 ‘어떻게 살고 싶냐?’는 질문이나 ‘지금 행복한가’ 등 매우 주관적인 질문도 있었다.
“짧고 굵게 살겠다니, 참 어이가 없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게 싫어서 전등 갈아달라는 부탁도 이사 갈 때야 들어주는 사람이 뭐가 짧고 굵게야? 나야말로 체형상 짧고 굵게지. 그리고 왜 행복하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했어? 마누라가 없어, 자식이 없어, 집이 없어, 직업이 없어, 뼈 빠지게 돈 들어갈 곳이 있어? 마누라가 바가지도 안 긁고 딸도 착하기만 하구먼….”
남편이 ‘행복하다’고 응답하는 순간, 어머나, 앞으로 47년을 더 살 것으로 예측됐다. 37년에도 만감이 교차했는데 이 남자가 47년을 더 산다고 생각하니 이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딸아이의 미래와도 연관된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중년이나 노년의 딸아이에게 내게 하듯 무뚝뚝하게 대하면서 자기가 필요할 때만 이것저것 요구할 게 뻔하니 말이다.
남편은 그 일 이후 매우 자신만만해졌다. 점쟁이가 장수한다고 한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의학전문가들이 과학적으로 분석한 프로그램에서 47년의 남은 수명을 보장받아서인가보다. 새벽까지 당구를 치고도 “오십 넘어 이런 체력 유지하기 힘들다”고 으스대는가 하면 술도 더 많이 마시고 담배도 끊지 않았다.
남편이 오래 사는 거야 자기 복이니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이 남자, 마누라 생명과 건강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요즘 나는 계속 감기를 앓고 있다. 감기 기운은 지난 한달 내내 나갔다 들어왔다 바람난 남편처럼 굴더니 끝내 몸 깊숙이 들어앉았다. 병원에서 주사도 맞고 약도 먹었지만 의사선생님 말씀은 한결같았다.
“쉬는 것밖에 치료가 없어요. 푹 쉬어야 해요.”
나도 쉬고 싶지만 회사에 매인 몸인데다 방송도 날마다 나가야 하고 강의 약속도 있어 무작정 쉬기는 어렵다. 지난 토요일 아침 갑자기 몸에서 기운이 쫙 빠지면서 손가락 끝부터 온몸 세포 마디마디가 쑤시고 아팠다. 열이 나서 가슴은 터질 것 같은데 정작 몸은 덜덜 떨릴 만큼 추웠다. 2년 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 겁이 덜컥 났다. 그때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방송도 나흘이나 쉬었다. 남편에게 “응급실에 좀 데려다줘”라고 했더니 아직 잠결인 그는 “그만한 감기로 응급실 가면 민폐다”라고 중얼거리며 전혀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그게 22년을 같이 부부로 살아온 남편이 할 대사인가. 119를 부르거나 날 업고 바람돌이처럼 병원으로 달려가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걱정은 해주길 바랐는데…. 하긴 남편 집안 식구들은 생고무 체질인지 단 한 번도 ‘몸살’을 앓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몸살이나 위경련 등이 어떤 아픔인지 전혀 모르니 남이 그러는 게 그저 엄살처럼 보이나보다.

남편 무심함 폭로하는 글 쓰며 스트레스 풀기
눈물이 나 부들부들 떨며 근처에 사는 지인의 차를 얻어타고 병원으로 갔다. 링거를 맞고 있는 동안 지인이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아니 마누라 죽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래도 조강지처인데”라고 했더니 “뭐 장례 치를 상황이면 치러야지요”라고 하더란다. 나름 유머인가보다.
감기 때문이 아니라 남편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울기, 화기, 광기가 폭발했다. 화병은 이래서 생기는구나 싶었다. 엉엉 울고 싶었지만 울면 몸이 더 아파 제대로 울 수도 없었다. 이달 말이 시아버님 기일인데 영혼에게라도 고자질하고 싶다. 왜 막내아들을 저렇게 무심한 성격으로 키우셨냐고.
지금 남편의 비리를 폭로하는 이 글을 쓰면서 화가 반은 풀렸는데 은근히 걱정이 된다. 딸아이가 또 우리 가족 이야기를 써서 자기 혼삿길에 지장을 주면 어떻게 하냐고 비난하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딸아, 걱정 말아라. 넌 그 정도 미모와 유머 감각이면 아빠보다 천배 만배 괜찮은 남자를 만날 거야. 엄마처럼 짧고 굵은 몸매가 아니지 않니.

유인경씨는…
경향신문사에서 선임 기자로 일하며 인터뷰 섹션을 맡아 흥미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직장 여성에 관한 책을 준비 중인데 성공이나 행복을 위한 가이드북이 아니라 웃으며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는 실수담이나 실패담을 담을 예정이다. 그의 홈페이지 (www.soodasooda.com)에 가면 그가 쓴 칼럼과 기사를 읽을 수 있다.

여성동아 2008년 5월 5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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