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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유인경의 Happy Talk

애교세포는 이식이 안되나요?

입력 2007.08.10 11:18:00

요즘 좀 우울하다. 내가 사랑하던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이 끝났기 때문이다. 워낙 코미디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 프로그램은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기에 재방송까지 챙겨봤다. 야동순재, 식신준하 등 각종 별명을 만들어냈던 숱한 에피소드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애교 문희’편이었다.
남편에게 무시당하고 잘난 며느리에게 기죽어 지내며 이혼한 둘째 아들이 낳은 손자를 돌보며 지내는 문희할머니. 부부동반 모임에서 한 여자(코맹맹이 소리로 유명한 탤런트 김애경씨가 그 역할을 맡았다)가 “영숙이는 더워용~” “영숙이는 이게 먹고 싶어용~” 등 대화마다 자기 이름을 들먹이며 애교를 부리는데 그 남편은 짜증을 내거나 신경질을 부리기는커녕 예뻐 죽겠다는 듯 “정말?” “응, 그래 알았어”라며 요구를 다 들어준다.
그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은 문희할머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도 애교전법을 시도한다. “여봉, 문희는 포도가 먹고 싶어용~” “여봉, 문희 목말라요, 물 좀 가져다주세용~” 하면서 시험 삼아 애교를 떨자 신기하게도 고집불통에 무뚝뚝한 남편은 군말 없이 들어준다. 애교가 먹힌다는 것에 고무된 문희할머니의 애교와 재롱은 점점 더해진다. 묵묵히 받아주던 남편은 결국 그녀를 신경정신과에 데려가 뇌파검사를 받게 한다. 노망든 것 같다며….
다른 이들은 그저 재미있게만 봤을지 모르지만 난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아 한숨이 나왔다. 어릴 때부터 내 유전자엔 애교 인자가 없었는데다 후천적으로도 애교를 떨거나 애교로 승부할 환경이 되지 못했다. 그저 씩씩하고 명랑하게만 살다 보니 “어머, 난 몰라 잉”이란 감탄사보다 “제기랄~”이란 말이 더 익숙해졌고, 눈망울을 반짝이며 애교를 떨어야 할 순간에도 어색한 상황을 못 견뎌 엽기 모드로 변환시켰다. 그러니 이 나이에 애교를 부리면 주책 떤다고 욕먹거나 문희할머니처럼 치매환자로 오인돼 강제로 입원당할지도 모른다.

애교 혹은 카리스마로 승부하는 그녀들
그런데 학창시절부터 애교덩어리였던 친구들을 보면 중년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애교스러움을 잃지 않는다. 20여 년 살았으면서 뭐가 그리 반가운지 남편 전화에도 “자기, 일찍 들어올 거지?”라고 콧소리를 내고, 하다못해 레스토랑 웨이터에게도 “아유, 커피가 너무 맛있는데 리필 되죠?”라며 윙크를 하기도 한다. 두드러기가 돋을 지경인데 신기한 것은 그 애교가 여전히 ‘먹힌다’는 것이다. 왜 우리 엄마는 애교 유전자를 주시지 않았을까. 왜 어린 시절부터 때려서라도 애교 있게 웃고 말하고 행동하는 법을 지도편달하시지 않았을까. 슬그머니 돌아가신 엄마를 원망해보기로 한다.
애교만이 아니다. 어느 상황에서나 자신을 여왕으로 대접받게 만드는 묘한 재주를 가진 여성이 많다. 중년의 한 디자이너는 모임에 참석했던 모 기업 사장에게 “사장님, 제가 약속 있어서 그러는데 사장님 차 좀 쓸게요. 기사한테 ○○호텔까지 저 데려다 주라고 하세요”라고 말했다. 그녀의 태도가 너무 거침없고 자연스러워서 그 사장은 “예예, 그러시죠”라며 기사를 찾았고 정작 자신은 다른 사람의 차를 타고 저녁식사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왕년의 모 앵커의 여왕증세도 심각하다. 모든 사람이 그녀를 중심으로 움직여야 하고 그녀의 모든 요구 조건을 들어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도와줘요”나 “부탁해요”는커녕 “이거 좀 해줘야겠어요”라고 명령하고 제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녀의 여왕다운 위엄과 카리스마에 압도돼 마당쇠와 삼월이처럼 수발을 들게 된다.
귀여운 애교도 여왕의 카리스마도 없다면 ‘홍도’ 역할로 험한 세파를 이겨나갈 수 있다. “홍도야, 우지 마라. 오빠가 있다”란 노래처럼 만인의 여동생이 되어 애절한 눈빛과 가련한 태도로 동정심을 자아내는 것이다. “갑자기 아파서 이 서류, 다 마무리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이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해결해야 하는데…” 등등 연약한 홍도로 변신하면 대부분의 남자는 ‘오빠’가 돼 해결사 역할을 해준다. 왜? 그녀는 연약한 여자, 내 사랑스러운 여동생 홍도니까.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캐릭터를 잘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애교를 안 부리다가 어느날 부터 애교스럽게 굴면 “드디어 망령 들었구나”란 비아냥에 시달리고, 평소 무수리 역할에 충실하며 궂은일을 도맡던 이가 여왕 흉내를 내면 “주제를 모르고 잘난 척한다”며 비난의 화살이 쏟아진다. 어쩌다 아프거나 연약한 모습을 보이면 “아니, 댁도 아프단 말야? 로봇은 고장나도 씩씩한 당신은 절대 탈이 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역시 늙는 게 무섭군” 등의 대꾸로 가슴에 비수를 꽂기도 한다.

애교 인자를 갖지 못한 삼월이의 비애
물론 애교덩어리건, 카리스마 여왕이건, 애절한 홍도건 도에 지나치면 뒤에서 욕을 먹긴 한다. “아유, 세포 마디마디가 여성호르몬이 넘친다니까. 징그러워 죽겠어”라거나 “여왕벌을 쫓아다니면 꿀이라도 얻어먹지, 저 여왕병 환자에는 약도 없어요”라는 뒷말을 듣고 “만날 저렇게 징징거리니 뭐가 잘되겠어”라고 험담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당사자 앞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그 애교와 연약함에 녹아내려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을 수십 년간 직접 보아 왔다.
그래서 결심했다. 더 이상 무수리로, 삼월이로 살진 않겠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제일 좋을 때다. 이제라도 대접받고 편안하게, 우아하게, 여성다움을 인정받고 살아야겠다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남편이나 동료들에게 너무 달라진 모습을 보이면 이상한 오해를 받을 것 같아 딸아이에게 실험(?)을 해봤다.
“내 딸, 유라는 뭐해? 엄마는 오늘 너무너무 유라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엉~”
전화를 걸어 내 딴에는 최고의 애교와 귀여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더니 단순명료한 딸의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 충격받았수? 아님 벼락이라도 맞은 거유? 곱게 늙읍시다. 어머니.”
역시 평소 내 모습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힘들다고 판단, 회사로 걸려오는 전화를 최대한 상냥하게 받았다.
“안녕하세요? 유인경입니다~”
일순 침묵. 잠시 후 당황한 후배의 말이 서글펐다.
“선배, 제가 뭐 여쭤볼 게 있어서 전화드렸는데요. 지금 힘든 일이 있으신 것 같으니까 다음에 걸게요. 건강… 조심하시고요.”
아, 애교세포를 이식하거나 애교호르몬 주사라도 맞으면 인생이 달라질까?
유인경씨는…
애교세포는 이식이 안되나요?
경향신문사 여성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최근 군가산점 문제, 성희롱 사건 등 여성관련 민감한 사안이 많아 다양한 사람을 취재하며 바쁘게 지내고 있다. 한 토론 프로그램에 참석해 의견이 다른 사람들에게 심한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욕먹으면 오래 산다는 말로 위안을 삼는다. 올해 대학 들어간 딸이 좋은 성적을 받아와 감격했고 은근히 장학금을 기대하는 중이라고. 그의 홈페이지(www.soodasooda.com)에 가면 그의 칼럼과 기사를 읽어볼 수 있다.


여성동아 2007년 8월 5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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