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2월 4일 개봉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이하 ‘왕사남’)는 강원도 영월로 유배된 조선 6대 왕 단종과 그를 끝까지 곁에서 돌본 촌장 엄흥도의 우정을 그린 작품이다.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집계에 따르면 6월 15일 기준 누적 관객 1689만 명을 동원하며 역대 한국 영화 흥행 2위를 기록 중이다. 누적 매출액은 1630억 원을 넘어서며 역대 국내 개봉 영화 중 매출 1위라는 새 이정표도 세웠다.
아이돌이 들려주는 한국 역사
‘왕사남’ 개봉은 끝났지만 임금님 덕질은 꾸준히 이어지는 추세다. 수양대군이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은 사건 ‘계유정난’을 배경으로 한 영화 ‘관상’(2013)은 다시 역주행하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온라인상영관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왕사남’ 흥행 이후 IPTV에서 ‘관상’ 구매 건수는 전월 대비 1137.3% 급증했고, 영화 부문 순위도 전달보다 57계단 뛰었다. ‘왕사남’이 수양대군 즉위 이후를 그린 만큼 시간상 앞선 이야기를 담은 프리퀄로 소비되는 양상이다.웹툰·웹소설 시장도 들썩이고 있다. 단종 소재 웹툰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은 현대 심리상담가가 단종의 보모 나인으로 환생해 비극적 운명을 바꾸려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로, 영화 개봉 이후 조회수가 개봉 전 대비 약 3배가량 증가했다. 댓글창에는 “‘왕사남’ 보고 왔습니다” 같은 반응이 줄을 이으며 댓글 놀이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죽지 않는 왕-무왕 단종’ ‘단종이 너무 강함’ 등 단종이 수양대군과의 싸움에서 이겨 조선을 통치한다는 내용의 웹소설 장르도 인기다. 역사적 비극을 현대인의 시각으로 뒤집어보려는 욕구가 콘텐츠 소비로 이어지는 셈이다. 여기에 ‘왕사남’과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형제의 대립을 그린 영화 ‘몽유도원도’도 올 하반기 개봉을 앞두고 있어 단종 열풍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경복궁·창덕궁·덕수궁·창경궁·종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국내 최대 규모의 국가유산 축제 ‘궁중문화축전’.

‘조선왕조실록’ 원본을 직접 볼 수 있는 강원도 평창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역사 덕질의 끝판왕으로는 자격증이 꼽힌다. 취업 준비생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이 이제는 세대를 가리지 않는 국민 자격증으로 자리 잡는 분위기다. 국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한능검 응시자 수는 2024년 28만498명에서 2025년 32만8341명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개그맨 서경석도 유튜브 채널 ‘그래서경석’을 통해 한국사 강의 콘텐츠를 선보이며 화제다. 최근에는 ‘왕사남’을 언급하며 단종·세조·계유정난을 풀어내는 강의가 특히 관심을 끌었다.
왕의 시간 속으로 떠나는 나들이

덕수궁 석조전 테라스에서 클래식 선율과 함께 고종의 가배차(커피)를 즐기는 야간 체험 프로그램 ‘덕수궁 밤의 석조전’.
경복궁 옆 국립고궁박물관 상설 전시도 빼놓을 수 없다. 왕이 직접 쓴 어필, 측우기 등 과학 발명품, 순종 황제 어차, 덕혜옹주의 당의와 스란치마, 왕실 의례 영상 등 조선왕실 유물 약 4만5000여 점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가을에는 왕실의 삶을 경험할 수 있는 현장 행사도 줄줄이 이어질 예정이다. 경복궁·창덕궁·덕수궁·창경궁·종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국내 최대 규모의 국가유산 축제 ‘궁중문화축전’이 오는 10월 열린다. ‘덕수궁 밤의 석조전’ ‘경복궁 생과방’ 등 지난봄에 열린 축전에서 24개 예약 프로그램이 전 회차 매진됐던 만큼, 가을 축전 역시 티케팅이 치열할 것으로 보인다. 조선 최고의 개혁 군주로 꼽히는 정조를 만나볼 수 있는 행사도 있다. 서울시, 경기도, 수원시, 화성시가 협력해 창덕궁에서 수원 화성행궁을 거쳐 융릉까지 59km를 잇는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재현’이 10월 펼쳐진다.
왕의 공간을 순례하고, 600년 된 기록을 탐구하며, 아이돌 목소리로 한국사를 공부하는 이 흐름은 단순히 영화의 팬심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다. 조선왕조를 자신만의 감성으로 해석하고 주체적으로 향유하는 새로운 문법이 생겨난 것이다. 임금님 덕질은 이제 전 세대가 함께 즐기는 가장 지적인 취향으로 자리 잡았다. 600년 전 영월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 소년 왕의 서사는, 그를 기억하는 이 시대 백성들이 있는 한 가장 뜨거운 생명력으로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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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뉴스1 사진출처 국가유산진흥원 국립고궁박물관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 네이버 영화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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