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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

권말부록|명문대 진학한 6인의 공부습관

하버드대 진학한 2002년 미스코리아 진 금나나

“태어난 천재가 아니라면 만들어진 천재가 되자는 각오로 공부했어요”

■ 기획·이한경 ■ 글·조득진 ■ 사진·조영철 기자

2004. 11. 16

지난 4월 MIT와 하버드대에서 동시에 합격통지서를 받아 화제가 된 2002년 미스코리아 진 금나나.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그는 두 가지 모두 피나는 노력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하버드대 진학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는 금나나를 만나 그만의 독특한 공부법에 관해 들었다.

하버드대 진학한 2002년 미스코리아 진 금나나

경북대 의예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지난 2002년 미스코리아 진에 당선된 금나나(21). 흔히 미스코리아 경력을 방송이나 연예계 진출의 발판쯤으로 생각하는 풍토 속에서 과학고를 졸업하고 의대에 재학 중인, 장래 꿈이 외과의사인 미스코리아의 탄생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올해 봄, 그는 또 하나의 놀라운 소식으로 화제가 됐다. 바로 세계 최고의 수재들만 다닌다는 미국의 명문 대학인 MIT와 하버드대에 동시 합격한 것.

지난해 미스 유니버스 대회 참가 후 더 큰 세계로 나가고 싶은 욕심 생겨
대한민국 최고의 미인이라는 미스코리아의 영예에 졸업만 하면 의사로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는 그가 아무도 예상치 못한 하버드대 진학을 결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는 늘 자신을 긴장하게 하고, 그 긴장을 즐긴다고 한다.
그가 미국으로의 유학을 결심하고 추진하게 된 계기는 지난해 여름 파나마에서 열린 미스 유니버스 대회 참가였다. 미스 유니버스 대회를 위한 영어 인터뷰 준비를 하면서 처음으로 더 큰 세계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직접 대회에 참가한 후 더욱 구체화되었다고.
메이크업 아티스트, 디자이너, 원어민 영어교사 등을 동반하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일본 대표와 달리 달랑 혼자 옷가방을 메고 떠나야 했던 그. ‘외부적인 조건이 안 되면 말이라도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대회 출전을 앞두고 영어 인터뷰 준비를 위해 대구의 한 유학원을 찾았다고 한다. 그는 유학원의 문을 여는 순간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회상했다.
“원장 선생님으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았는데 단어 50개를 외워 오라 해서 숙제를 해가면 다음날은 60개, 그 다음날은 70개를 내주는 거예요. 마치 ‘똑똑한 미스코리아라고? 그래, 네가 얼마나 버티나 보자’는 생각으로 저를 혹사시키는 듯했죠. 그러나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다 보니 어느 순간 영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됐어요.”
그는 인터뷰 강훈련 덕분에 미스 유니버스 대회 인터뷰 심사에서 72개 국가 참가자 중 최고점수인 9.80을 받았다. 하지만 세계 무대라는 높은 장벽과 자기 자신의 한계에 대해 깨닫게 됐다고 한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좁은 세계를 벗어나 세계 최고의 외과의사에 도전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이왕이면 아이비리그, 그중에서도 최고라는 하버드대에 도전해보자는 각오를 갖게 됐죠.”
귀국하자마자 5개월에 걸친 그의 불도저식 공부가 시작됐다. 경북대 의대를 그만두고 다시 수험생으로 돌아가 무서운 집중력으로 공부에 전력 질주한 것. 그리고 지난 4월, 그는 MIT와 하버드대로부터 합격통지서를 받아냈다.
성적 밑바닥 맴돌아 원형탈모증·폭식증에 시달린 고교시절

그에게도 원형탈모증과 폭식증에 시달렸던 힘겨운 시절이 있었다. 경북 영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포항의 경북과학고로 진학한 초기 시절 그의 학교 성적은 바닥을 맴돌았다. 각 도시의 중학교에서 공부 잘 한다는 아이들이 다 모인 학교이다 보니, 경쟁이 만만찮았던 것.

하버드대 진학한 2002년 미스코리아 진 금나나

“여기서 밀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원형탈모증과 폭식증에 걸렸어요. 그래도 악에 받쳐 열심히 했더니 한 학기 만에 학교 생활에 적응이 됐고, 성적도 상위권으로 오르더군요. 원형탈모증세는 그때 사라졌지만, 폭식증은 오래갔어요.”
그는 자신을 이끌어온 것은 욕심과 체력이라고 한다. 항상 최선을 다해 최고가 되고 싶다는 욕심과, 체육교사인 아버지가 물려주신 건강한 체력이 자신이 해왔던 저돌적인 도전의 바탕이 되었다는 것.
“학창시절엔 아이큐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특히 과학고 시절 주변엔 수재·천재 소리를 듣는 아이들뿐이었죠. 하지만 평범한 두뇌는 제게 ‘노력’의 중요성을 알게 해주었어요. 100m 달리기를 날마다 연습한다고 해서 누구나 칼 루이스가 되는 건 아니지만 이전보다는 잘 달리게 되잖아요. 그게 바로 노력의 묘미인 것 같아요.”
태어난 천재가 아니라면 만들어진 천재가 되자는 것이 그의 결심. 그 결심을 뒷받침해준 것은 ‘방목형’ 교육을 펼친 부모의 힘이었다.
“아이를 자유롭게 방목하여 키우겠다는 어머니의 철학 덕분에 집 안 벽지는 일찌감치 저희들의 도화지였어요. 그림과 낙서, 전화메모, 엄마 아빠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적으면 그에 대한 엄마 아빠의 응답으로 채워졌어요. 그때 부모님과 저희 남매 사이에 강한 신뢰가 생긴 것 같아요.”
그의 부모는 아이들에게 학원에 갈 것을 강요하거나 무엇을 가르치려 들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이 스스로 가고 싶다고 하면 무엇이든 다 배울 수 있도록 지원했다고 한다.
그는 인터뷰 내내 당당한 말솜씨, 솔직한 성격, 고정관념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를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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