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문학인생 40년을 맞은 소설가 이청준씨(66). ‘서편제’와 ‘당신들의 천국’ 등을 통해 ‘진실한 영혼의 궤적을 그려온 작가’라는 찬사를 받아온 그가 불혹에 이른 문학인생을 자축하며 두 권의 산문집을 펴냈다.
“‘아름다운 흉터’는 제 유년과 고향 마을을 중심으로 한 동화풍의 이야기들로 꾸몄고, ‘이청준의 인생’은 지금까지 제가 보고 생각한 우리 삶과 세상 풍물의 표정들을 모은 것이죠.”
7월10일, 강남 교보문고 문화이벤트홀에서는 우리 시대 최고의 화가와 작가가 만나는 ‘그림, 소설을 읽다’라는 행사의 하나로 ‘이청준-김선두 전’이 열리고 있었다. ‘취화선’으로 유명한 화가 김선두씨가 이씨의 소설들을 화폭에 옮겨 놓은 그곳에서 백발의 노장 이청준씨를 만났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는 담배를 많이 피웠다. 당뇨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담배를 줄여야 하지 않냐”고 걱정하자 “우리 나이에 끊어서 뭐해요. 하고 싶은 거 그냥 하는 게 낫지” 하며 해맑은 미소를 짓는데, 그 미소 뒤에 그의 고집이 엿보였다. 40년 동안 오롯이 글만 써온 것이 저 고집스러움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문학을 ‘삶의 길 찾기’라고 말한다. ‘아름다운 흉터’에 담은 유년시절의 이야기와 ‘…인생’에 담은 이웃과 세상 이야기는 그 삶의 길 찾기 과정인 것이다. 그는 이번에 산문집을 내면서 “내가 오랫동안 길을 못 찾고 헤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어느새 그의 글 향기에 취하게 된다. 그의 글엔 은은하지만 한번 향기를 맡으면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마력이 있다. 누군가 그를 두고 “글로 마음을 훔치는 큰 도둑”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래서일까? 그에게는 잊을 수 없는 특별한 독자가 있다.
“소설을 쓰다 보면 이따금 제 작품이 어떤 독자의 삶에 예상치 못한 큰 영향을 끼칠 때가 있어요. 그런 때면 보람이나 긍지보다 당황스러움과 두려움이 앞서죠.”
그의 대표작인 ‘당신들의 천국’의 주인공 조백헌의 실제 모델이었던 조창원 원장으로부터 “전반부 삶은 내가 살았지만, 책이 나온 이후의 삶은 책을 닮으려고 살았다”는 고백을 들었을 때도 그는 작가로서의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를 적잖이 놀라게 한 독자가 있었다. 바로 ‘당신들의 천국’을 읽고 감동을 받아 소록도 병원 근무를 자원했다는 여자 약사였다.
“소설을 쓴 지 20년 가까이 되던 해, 신문사 문학담당 기자와 함께 ‘당신들의 천국’의 배경인 소록도를 찾았어요. 그때 그곳 병원장이 제게 꼭 만나보고 갈 사람이 있다며 약사 한 분을 소개시켜 줬어요.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그 여자분이 저를 보자마자 웃으며 ‘선생님이 제 젊음을 빼앗아 갔으니 어떻게 책임지실래요?’ 하는 거예요.”
영문을 몰랐던 그는 그녀의 농담에 당황했다. 그런데 잠시 후 병원장의 설명을 듣고 난 후에는 더욱 당황하고 말았다. 병원장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원래 큰 병원에서 약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당신들의 천국’을 읽고 깨달은 바가 있어 소록도 병원 근무를 자원했고, 결혼도 잊은 채 환자들을 돌보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내 소설을 만든 것은 어머니와 유년 시절의 고향”
그는 마음이 무거워져서 그녀에게 어떤 격려도 건네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그리고 4~5년쯤 지나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비로소 그녀의 삶에 대한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녀와 한나절을 함께 보내면서 그녀의 마음이, 그 봉사의 삶이 소록도에서 아름답게 꽃피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걸 보고 제 글쓰기가 다른 사람의 운명에 영향을 끼친다는 두려움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어요.”
‘서편제’ ‘당신들의 천국’ 등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이청준씨가 올해로 불혹의 문학인생을 맞았다.
2년 후 다시 소록도를 찾았을 때, 그녀는 언제 돌아올 거라는 기약도 없이 에티오피아 난민촌으로 의료봉사를 떠나고 없었다고 한다.
그는 “내 소설 절반은 어머니와 유년의 고향에 뿌리를 둔 이야기”라고 고백한 바 있다. 그의 고향은 전라도 광주에서 버스를 타고 2백리 길 장흥읍을 지나서도 90리를 더 가야 하는 대덕읍 종점 마을이다. 그는 60년대 초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면서 상경한 후 근 20년간을 고향에 발길조차 들여놓은 일이 없었다고 한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우리 마을의 자랑거리가 돼야 한다”는 주민들의 격려가 고향에 뭔가를 베풀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작용했고, 그래서 무언가를 이룬 후 자랑스럽게 돌아갈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그런 자존심과 부담감은 세월 앞에서 무너졌다. 결국 남루한 삶의 피곤기와 꿈이 구겨진 부끄러움을 안고 고향을 찾았다.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고향은 밖에서 이루고 얻은 자들의 금의환향만을 기다리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밖에서 지친 자들을 위해 휴식과 위안을 더 많이 준비하고 기다리는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고향은 그저 언제나 베풀기를 기다리는 곳이었던 것이다.
그는 지금은 비록 도회에 머물러 있지만 언젠가는 결국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한다.
“도회에선 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고, 고향에선 좀더 도회살이를 참고 견뎌보고 싶어져요. 그래서 저는 다시 고향을 떠나 도회로 돌아오고, 도회를 떠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떠남과 돌아옴의 왕복 연습과정에 살고 있어요.”
자신의 유년과 어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그에겐 생각나는 것이 있다. 바로 상한 게자루다. “광주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고향과 어머니를 떠나 광주의 친척집에서 더부살이를 했어요. 광주로 떠나기 전날, 어머니는 빈손으로 아들을 보낼 수 없어 게라도 한 자루 잡아서 손에 들려 보내려고 개펄을 헤매며 게를 잡았어요.”
그러나 이튿날 막상 광주의 친척집에 도착하고 보니 게자루는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 돼버렸다. 덜컹대는 찻길에 종일을 시달리다 보니 자루 속의 게들은 이미 부스러지고 깨어져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게자루와 함께 제 자신이 그토록 초라하고 부끄럽게 느껴질 수가 없었어요. 친척 누님이 코를 막고 상한 게자루를 쓰레기통에다 내다 버렸을 때, 마치 제 자신이 쓰레기통 속에 내던져진 듯한 비참한 기분이 들었죠.”
그때의 궁색한 게자루와 그 속에 담겨져 함께 버려진 어머니의 마음. 돌이켜보면 그것은 두고두고 그의 삶과 문학의 숨은 씨앗이 되어왔던 것 같다고 그는 말한다.
그의 어머니는 두 아들과 남편의 연속적인 죽음을 겪으며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많은 고통과 인내 위에 힘들게 지탱되는 것인가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가 여섯 살이 되던 해 봄날, 세 살짜리 아우가 홍역으로 죽었다. 하지만 식구 중 아무도 아우의 죽음을 슬퍼하지 못했다. 결핵으로 2년 넘게 누워 있던 맏형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반년 후 “막내가 맏형 대신 간 것”이라는 식구들의 믿음을 저버리고 맏형마저 끝내 세상을 떠났을 때는 그간의 쌓인 슬픔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화가 김선두씨가 자신의 소설을 화폭에 담은 그림을 전시한 ‘그림, 소설을 읽다-이청준·김선두 전’에 참석한 이청준씨.
그리고 그 슬픔은 다시 아버지를 쓰러뜨렸다. 두 아들의 죽음에 대한 충격 때문에 기력을 잃고 안방 아랫목에 누워 있던 아버지는 이듬해 초봄 두 아들의 뒤를 따랐다. 남은 식구들은 더 이상 울지 못했다. 그의 어머니는 동네가 부끄럽다고 자식들의 울음을 말렸다.
“어머니는 집안에서 모든 죽음의 흔적을 샅샅이 지워 없애기 시작했어요. 가고 없는 사람들의 옷가지나 약병들, 일상의 생활용품들을 눈에 띄는 대로 태우고 버리고 파묻어버렸죠.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죽은 사람들의 기억을 깡그리 지워나갔던 거예요. 그래도 다행히 큰 누님과 작은 형의 만류로 사진첩 몇 권과 손대지 않은 새 문방구와 맏형의 책들은 간신히 구할 수가 있었죠.”
초등학교를 늦게 들어간 탓에 일찍 한글을 깨우친 그는 초등학교 2~3학년 무렵부터 다락에 있던 맏형의 소설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한사코 책을 읽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책들의 곳곳에 작은 글씨로 남겨진 맏형의 간략한 메모나 독후감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형님은 책의 곳곳에다 그때그때의 느낌을 간단하게 기록해두거나 때로는 상당한 분량의 독후감 같은 걸 별지에 적어 끼워뒀어요. 그 기록들을 보니까 제가 미워한 사람은 형님도 미워했고, 제가 좋아한 사람은 형님도 좋아했더라고요. 그게 그렇게 신기하고 기쁠 수가 없었어요.”
그는 형의 기록을 만나기 위해 지루함을 참으며 책을 읽었고, 책을 통해 맏형과 대화를 했다. 그런 그의 책읽기는 책더미 속에서 형의 일기장을 겸한 독후감 노트를 찾아냄으로써 지속성을 갖게 됐다.
“형은 이미 죽었지만 저에게 형은 영원했어요. 사람이란 원래가 육신의 죽음만으로 끝나지 않는 또 다른 생명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것을 보게 되었죠.”
그는 몸에 남은 흉터 역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눈에 보이는 흉 자국은 희미해지기도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흉 자국은 반대로 갈수록 짙어진다는 것이다.
“누구나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삶의 쓰라린 상처와 흉터를 지니고 살아가게 마련이죠. 그런데 아쉬운 것은, 요즘 사람들이 작은 상처나 흉터 하나 지니지 않으려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남의 아픈 상처에 숨어 있는 뜻은 조금도 읽어주지 못한다는 거죠.”
문득 ‘흉터 걱정 하나 없다’는 어느 약품 광고가 생각났다. 정말 지금 우리는 작은 흉터 하나도 용납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살고 있다. 그가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자기 흉터엔 은근한 긍지를 갖고, 남의 흉터엔 위로와 경의를 표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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