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차밭으로 알려진 화개 녹차밭에서 직접 차를 따보고 있는 개그우먼 엄정필씨와 딸 유정이, 조카 태영이와 언니 엄신혜씨(사진 왼쪽부터).
91년 대학 개그제에서 장려상을 받고 데뷔, ‘한바탕 웃음으로‘ ‘유머 1번지‘ ‘웃음한마당‘ 등에 출연하며 ‘아! 다리 좀 놔주세요’ 등의 유행어를 퍼뜨린 개그우먼 엄정필씨(32). 그는 현재 아로마 테라피스트로 인생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브라운관을 떠난 뒤 한동안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그는 여전히 씩씩한 웃음을 간직한 채 열심히 살고 있었다.
“제 별명이 에너자이저예요. 그런데 솔직히 재작년까지는 방황 좀 했어요. 97년에 남편(조정규씨·36)에게 한눈에 ‘뿅’가서 결혼했는데 방송일이 워낙 불규칙하잖아요. 이쪽 생리를 모르는 남편에게 눈치가 보였고 유정이를 갖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공백기간이 생겼어요. 출산 후 리포터로 출연을 하며 방송계 복귀를 시도했는데 왠지 영 어색하기만 했어요. 개인기가 너무 춤 일색으로만 짜여진다는 것도 불만스럽고…. 저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제 자신을 깨닫게 되었어요. 진정 원하는 것이 뭔가 알게 되었다고 할까요.”
대학 때 간호학을 전공했지만 전공과는 무관하게 개그우먼의 길을 걸어왔던 그는 인생의 전환을 꾀하면서 다시 전공으로 돌아갔다.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아로마 테라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 아로마 테라피는 허브에서 정유를 채취, 그 오일을 가지고 각종 질병을 치료하는 분야다. 심리학과 더불어 아로마 테라피를 공부해온 그는 지난 2월부터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논산병원으로 출퇴근하며 두통,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도시락 두 개를 싸 가방에 담고 6시 10분경 집을 나서 기차를 타요. 10시 조금 넘어 논산병원에 도착, 분주하게 일을 하고 아침에 왔던 코스를 역으로 해서 밤 11시경에 집으로 돌아옵니다. 주중에는 유정이를 시누이에게 맡겼다가 주말에야 데려와요. 정말 빡빡한 생활이지만, 일한 만큼 대가가 주어지기에 보람 있어요.”
다음달에는 다니고 있는 병원(Y&T 성모의원)에서 서울에 분원을 개원해 이곳으로 출퇴근하게 되어 생활이 한결 편해질 거라며 그는 활짝 웃었다. 평소 유정이와 보내는 시간이 너무 적어 안타까웠다는 그는 앞으로 딸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질 것이란 사실이 무엇보다 기쁘다고 했다.
이런저런 사연이 있던 터라 모처럼 유정이와 함께 한 지리산 여행은 즐거움 일색일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회사일로 함께 못 왔지만, 대신 언니 엄신혜씨(34)와 조카 태영(6)이가 동반해 자매간의 우의를 다지는 계기가 됐다.
꽃 그림자 어린 샘, 쪽으로 뜨네/한 바가지 샘물에 꽃 그림자 열 말/솔잎 백 개 불 지펴 차를 다리니/ 찻잔 속의 꽃향기 천 섬…. 인정은 만냥이라
초의선사가 지은 차 예찬에 대한 시구를 읊조리며 고속도로를 달려 지리산 자락의 화개면에 닿았다. 승용차 문을 열자 꽃샘추위가 이들을 반겼다. 야생차밭을 돌아보기 전에 따뜻한 차 한잔으로 몸을 풀며 워밍업을 하기로 했다. 화개 터미널 우측 길가에 있는 쌍계작설차 총직매장에 들어서자 감미로운 차향이 코끝에 감돌았다.
화개 야생차밭 인근에 각종 사적지가 많아 자녀들을 위한 역사학습장이 되기도 한다. 인근 최고의 명소 화개사
“왼손으로 찻잔을 받치고 오른손으로 잔을 잡고 은은한 찻물의 색과 향을 음미하면서 마시면 됩니다.”
쌍계제다 주인 정혜숙씨(50)가 일러주는 대로 찻잔을 들었다. 역시 무공해 청정지역에서 마시는 차맛은 서울에서와는 달랐다. 좀더 순하고 그윽하다고 할까. 감탄을 하며 거푸 두잔을 마시고 어른들이 잔을 내려놓자, 유경과 태영 두 꼬마도 찻잔을 들고 홀짝거렸다. “엄마 너무 맛있다. 그치?” 하며 올려다보았다. “지들이 무슨 차맛을 안다고” 정필, 신혜 자매의 얼굴엔 웃음이 번졌다.
정혜숙씨는 예로부터 차의 오공(五功)과 육덕(六德)을 높이 쳐주었다며 이에 대해 일러주었다.
“오공은 다섯가지의 공이 있다는 뜻입니다. 독서시 갈증을 없애주고, 화날 때 울분을 풀어주고, 손님과 주인의 정을 화합하게 하고, 뱃속 기생충의 고통을 없애고, 마지막으로 술을 깨게 한다는 것입니다. 육덕은 장수하게 하고, 병을 없게 하고, 기운을 맑게 하고, 마음을 편하게 하고, 신선 같게 하고, 예의롭게 한다며 차의 공덕을 칭송한 말입니다.”
학구열이 발동한 엄정필씨는 녹차, 홍차, 우롱차 등 천연 차의 종류는 어떻게 분류되는지를 물었다. 정혜숙씨는 차를 분류하는 기준은 발효 정도, 채엽 시기나 횟수, 찻잎의 모양 등에 달라진다며 먼저 녹차와 홍차, 우롱차 등을 분류하는 방법부터 설명해주었다.
“녹차는 발효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은 차, 발효 정도에 따라 청차, 황차, 홍차, 흑차, 백차 등으로 나뉩니다. 우롱차, 재스민차, 청차, 백차 등은 반발효차고 홍차는 발효차에 속합니다.”
녹차는 중국 북부, 우리나라, 일본 등지에서 주로 생산되는데 제조방법에 따라 증기로 쪄서 만든 증제차와 가마솥에서 덖어서 만든 덖음차, 1차 가공된 증제차를 고온으로 처리하여 가열 향이 나오도록 한 배차 등이 있다고 한다. 증제차는 대량생산하기에 알맞은데 화개골에서는 야생차를 수작업으로 덖어 만드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또 채엽 횟수에 따라서 4월 중순부터 5월 초순까지 딴 차를 첫물차라고 한다. 첫물차는 맛이 좋고 향이 뛰어나 고급차로 꼽힌다. 6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딴 차는 두물차로 여름철의 무더운 날씨로 인해 떫은맛이 강한 것이 특징. 8월 초순에서 중순 사이에 딴 차를 세물차라 하는데 이것은 떫은맛이 더 강하다. 9월 하순부터 10월 초순 사이에 따는 차는 네물차로 분류한다. 섬유질이 많아 거칠다. 화개골에서 생산하는 야생차는 5월말경 봄철에 작업한 것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값은 조금 비싸지만, 맛과 향을 높이 친다고 한다.
녹차에 대해 설명을 들은 후 엄정필씨 일행은 쌍계사 일주문 밖, 석문 부락에 있는 차 시배지 구경에 나섰다.
화개면의 녹차음식 전문가 정영숙씨가 특별히 다양한 녹차음식을 만들어주었다. 녹차가루만 있으면 가정에서도 얼마든지 다양한 음식을 만들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 흥덕왕 3년(828)조에 보면 ‘당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대렴이 차종자를 가지고 오자 왕이 지리산에 심게 했다.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지만 이 때에 이르러 성하게 되었다’는 글이 적혀 있다. 김대렴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최초의 차밭은 차 시배지로 정부 지정 기념물 경남 제61호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유정아, 태영아! 지금부터 1천년 전에 대렴이라는 아찌가 여기에 차나무를 심었대.”
다년생 상록수인 차나무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꼬마들. 정혜순씨가 차나무 잎을 들어 어긋난 긴 타원형 사이 새순이 올라온 모습을 보여준다. 기념사진을 한장 찰칵! 이번엔 본격적인 야생차밭 순례에 나섰다.
그런데 차밭이 평지가 아닌 산비탈에 있는 것이 이채로웠다. 지리산 화개골의 차밭은 산록의 비탈에서 자라는 것이 특징이라더니 정말 그랬다. ‘영차, 영차!’ 다섯살, 여섯살 꼬마는 엄마와 이모의 손을 잡고 등산하는 기분으로 차밭에 올랐다. 차밭에 오르니 멀리 지리산과 섬진강이 보였다. 섬진강과 화개천, 지리산록의 고산지대가 한데 어우러진 모습이 한폭의 그림 같았다.
이번엔 쌍계제다로 옮겨와 차 제조과정을 보았다. 기본적으로 차는 익히기, 비비기, 건조의 세 과정을 거친다. 익히기는 신선한 찻잎을 높은 열로 짧은 시간에 익혀 찻잎의 산화를 막는 과정. 녹색과 찻잎 성분을 그대로 유지시켜 풋풋한 향을 간직하게 한다. 비비기는 찻잎의 표면과 내부의 수분을 균일하게 하고, 찻잎의 세포조직을 파괴하여 찻물이 잘 우러나게 하기 위한 과정. 비비기 과정을 통해 고유의 찻잎(잎차)의 모양이 만들어지게 된다. 비비기로 고유의 모양이 만들어지면 찻잎을 변질 없이 보관하기 위해 건조하는데 함수율은 5%전후. 1차 가공이 끝나면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필요시에 백탄 숯불로 수시간 덖어서 마무리하면 언제나 싱싱한 차맛을 유지할 수 있다.
화개동에선 증제차가 아닌 덖음차를 만든다. 덖음차야말로 한국 전통 녹차라고 하는데 덖음차는 달이면 다갈색이 나온다. 엄정필씨 가족은 직접 녹차를 덖어보고, 가루차인 말차를 만들어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엄정필씨와 유정이가 백탄 숯불에서 차를 덖는 과정을 따라 해봤다. 손에 닿는 온기가 기분 좋게 따뜻하여 처음엔 신나게 차를 덖는 두 사람. 그런데 이 과정을 무려 1시간 20여분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자, 비명을 질렀다. 차의 표피에 붙어 있는 솜털을 걸러내고 맛과 향이 오래 응축되도록 하려면 장시간의 덖음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
“아하, 포도주도 품질을 따질 때는 산지를 확인하는 것처럼 워낙 수공이 많이 들기에 지리산 야생차를 최고로 쳐주는구나.”
곡우 전에 딴 우전차가 100g에 10만원 한다는 정씨의 말에 깜짝 놀랐던 엄정필씨는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조과정을 지켜보고 나니 차맛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서울서 손님이 온다고 정씨는 녹차로 떡, 김밥, 주먹밥, 과자 등 음식을 푸짐하게 만들어놓았다. 가루차인 말차를 차선에 곱게 풀어 돌아가며 한 모금씩 마시고 녹차음식으로 달콤함을 더했다. 우전, 세작, 중작 등의 다양한 차맛을 보고 향과 색을 구별해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지리산 기슭의 천년 향기에 취해 이렇게 봄날은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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