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규(40)가 제주도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쭈그려 앉아 삼단 같은 머리를 감고 있을 때, 기자도 모르게 ‘오, 박완규여’ 하며 한탄이 터져나왔다. 아웃사이더보다 이제는 대중과 소통하는 록 가수가 오히려 더 용기 있어 보이지만 연기자 변신이라니! 행여 어색한 연기에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은 아닐지 걱정부터 앞섰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브라운관을 응시하다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어쩜 저렇게 능청스러울까. 대사는 몇 마디 없지만 능구렁이 몇 마리는 삶아 먹은 듯 자연스럽다. 그새 연기 공부라도 한 걸까.
철옹성 같던 록 스피릿의 장벽을 부수고 대중 속으로 풍덩 뛰어든 지 3년. SBS 주말드라마 ‘결혼의 여신’에 등장한 박완규는 작정하고 망가진 로커가 아니었다. 마치 마지막 남은 겉치레와 가식마저 벗어버린 듯 자유로웠다. 물론 그런 박완규가 오히려 폼 나게 보인다.
로커의 연기자 변신
“‘결혼의 여신’의 정대현은 그냥 저예요. 싱크로율이 99%라고 보면 돼요. 삶의 형태가 똑 닮았어요. 웃기려고 억지 춘향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러운 모습이었어요. 그런데 방송을 보고 저에게 이런 모습이 있는지 몰랐다고 다들 놀라더라고요. 당연히 저를 잘 아는 사람들은 ‘완전 똑같다’고 했죠.”
PD는 ‘망가져라’ ‘체면 차리면 안 된다’고 주문했지만 박완규는 망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냥 평소대로 하면 됐으니까. 아내에게 구박받으며 발로 차이다가 아내의 발가락을 깨물고, 머리를 감다가 아내와 투닥거리는 것. 더욱이 화려한 연예계가 싫어서 제주도로 낙향한 고독한 로커는 박완규, 그 자체다. 그래서 그는 “연기지만 연기 같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드라마에 ‘연기’를 작정하고 뛰어든 것은 아니다. 박완규는 말이 좋아 크로스오버지, 가수에서 배우가 되는 게 언감생심 쉽게 꿈꿀 일이 아니란다. 그럼에도 ‘결혼의 여신’ 캐스팅에 응한 것은 이 또한 가수로서 대중과 만날 수 있는 기회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저 정도 나이를 먹은 가수들이 방송매체를 통해 대중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어요. 그나마 주기적으로 목소리를 들려드릴 수 있는 게 바로 드라마 OST죠.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콘서트도 쉽지 않거든요. 저를 똑 닮은 정대현이라는 인물을 연기한다는 게 좋았고 ‘결혼의 여신’ OST도 부른다는 조건이 제 마음을 돌려놓게 했어요. 막상 녹화를 하면서 ‘사람과 어울리려면 이만큼 오랜 기다림이 필요한 거구나’라는 것을 알게 됐죠. 노래하는 게 가장 편하다는 것도 알았고요. 연기는, 휴~ 못해 먹겠어요.”
마치 남의 밥그릇에 숟가락 꽂는 느낌이랄까. 연기를 하면서 흥을 느끼지 못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런 그의 마음과는 달리 제작진과 시청자의 반응은 예상보다 뜨거웠다. 처음 1·2회 카메오 출연만 약속했는데, 출연분이 10회까지 늘어났다. 아직까지 촬영분이 남아 있는데, 언제 드라마에서 하차하게 될지 결정된 바가 없다. 예정보다 출연횟수가 늘어나면서 뜻하지 않은 수확도 얻었다. 그는 ‘결혼의 여신’을 통해 여자를 조금 더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
‘음악보다 사랑이 먼저다’라는 그는 기부와 봉사로 주위를 둘러보며, 음악으로 감동을 전하는 삶을 살고 있다.
“드라마 제작발표회 때 기자들이 법적으로 갈라선 애기엄마랑 재결합 가능성을 묻더군요. 애기엄마랑 재결합을 하게 될지 제3자와 재혼을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다시 누군가와 함께 산다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좀 더 배우고 안 다음이어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예술이다 로커다 하며 노래를 부르는 한 예전에 하던 생활을 되풀이할 수 있거든요. 그 외로움과 괴로움을 반복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드라마를 통해 여자의 심리를 더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애기엄마랑 대립하는 동안 아직 본인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없는 아이들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됐으니까요. 그 상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좀 더 배워야 할 것 같아요.”
마흔 줄에 접어든 지금의 박완규는 1999년 ‘천년의 사랑’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와는 전혀 딴판이다.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풍기는 이미지나 목소리까지 몰라볼 정도다. 2010년 겨울 부활과의 콜래보레이션으로 ‘비밀’을 내놓으며 간만에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켰을 때 사람들은 “그때 박완규 맞아?”라고들 했다. 누군가는 하늘을 뚫고 치솟던 그의 날카로운 샤우팅이 사라졌다고 아쉬워했을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달라진 박완규를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사람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그는 짙은 선글라스에 가려져 있던 선한 눈매의 반전 매력을 내뿜으며 한편으로는 ‘천년의 사랑’ 이후 무명과도 같은 암흑기 동안 켜켜이 쌓인 삶의 내공을 방송을 통해, 노래를 통해 쏟아놓았다.
“1996년 처음 부활에 들어왔을 때 엄청난 대우를 받았어요. ‘부활 보컬이니까 잘하겠지’를 넘어 ‘진짜 실력파가 나왔다’고들 했거든요. 태원 형(김태원)조차 대한민국을 뒤엎을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칭찬했어요. 그런데 마음이 좁으니까 표현하는 감정이 없는 거예요. 노래를 아무리 잘하면 뭐 하겠어요. 감동을 못 주니 감동의 대가를 주는 사람도 없는걸요. 그럴 자격이 없던 거죠.”
그는 실력만 믿고 자신을 인정해준 김태원을 ‘배신했다’고 말했다. 부활을 뛰쳐나와 홀로 ‘천년의 사랑’을 발표할 때까지만 해도 박완규의 선택이 옳은 듯 보였다. 하지만 그는 사회를 너무 몰랐다고, 아니 상식이 부족했다고 말한다.
“계약서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르고 무작정 도장을 찍었다가 10년간 무명의 세월을 보냈어요. 가난은 죄가 아니지만 무식한 것이 죄가 돼 그 고생을 부모님과 아내, 아이들이 다 떠안았죠. 그러는 사이 거울 보는 것도 무서울 만큼 몸도 마음도 망가졌죠.”
그에게 음악만이 전부이던 시간. 밥과 음악, 가족과 음악, 사람과 음악을 분리해놓고 음악의 존귀함만은 좇던 시간이었다. 이미 부활에 영입될 당시 결혼을 한 상태였고, ‘천년의 사랑’으로 인기몰이를 했을 때는 두 아이의 아빠였지만 그 후로는 경기도 미사리에서 고정적으로 노래하는 것을 제외하면 행사나 방송 출연은 1년에 서너 번밖에 하지 못했다. 벌이라고는 많아야 한 달에 80만원. 하루 한 끼 먹는 것을 걱정해야 했고, 아들과 딸의 급식비를 못 내서 애간장을 태웠다. 연로한 아버지가 폐차장에서 일하며 번 돈을 생활비에 보탰지만 하루하루를 아등바등 살아야 했다.
“그때까지 골방에서 음악을 들으며 자기만의 음악세계에 빠져 있었죠. 그게 용의 꼬리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뱀의 꼬리도 못 됐던 거예요. 여전히 밥보다 음악이 중요하냐고 자문해 보았더니 그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죠. 음악을 통해 내 아이들을 배불리는 게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나에게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음악의 가치보다 사람의 가치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그제야 알겠더라고요. 그게 상식이었는데 그걸 몰랐던 거죠.”
깨달음의 순간, 박완규를 세상 밖으로 꺼내놓은 이는 바로 김태원이었다. 부활과 함께 ‘비밀’을 발표한 후 MBC ‘위대한 탄생’과 KBS2‘남자의 자격-청춘합창단’에 출연하며 사회와 대화하는 법도 터득했다.
“제게는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어요.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늘 대화를 이어가는 게 어려웠거든요. 민망하고 어색하고…. 그런데 포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어색하지만 손 하트도 날리고 웃어도 보면서 제 마음을 표현하려고 했죠. 안 보여주면 모르는 게 사람의 마음이니까.”
‘나는 가수다’ 이후 호화로운 삶 살고 있다
마음을 바꿔 먹으니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마음의 중심에 ‘사람’을 두고 나니 열 살은 더 먹은 듯 보이던 얼굴이 밝아지는 것도 느꼈다.
“마음이 어두울 때는 밝은 것을 보는 게 싫어요. ‘인생이 이토록 괴로운데 뭐가 아름답다는 거지?’ 하는 마음이거든요. 아름다운 것은 죄다 피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는 영화를 보게 되고 사람들의 사연을 접하곤 눈물을 흘리기도 하죠. 시커먼 딱지가 가슴에 얼마나 눌어붙어 있었는지 그걸 뜯어내는 한참이나 걸린 거죠.”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박완규의 가창력은 예전 같지 않다. 10년간 무명시절을 지내며 의사가 포기할 만큼 목 상태가 나빠졌고, ‘노래를 부를 수 있을 만큼’의 상태로 돌려놓는 데도 오랜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3옥타브 정도는 누워서도 불렀다’던 그의 말마따나 송곳처럼 찔러대며 속 시원하게 불러젖히던 박완규의 목소리는 많이 달라졌다.
그럼에도 기자는 박완규의 지금 목소리가 더 좋다. 굳이 비교하자면 예전에는 곡예를 넘듯 스릴이 넘쳤다면 지금은 마치 낡은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아련한 음악처럼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감성을 깨운다. 그가 ‘나는 가수다’(이하 ‘나가수’)에 출연해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원곡 가수 김목경)를 부를 때 첫 소절부터 감정이 울컥 복받쳐오른 것이 비단 기자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방송이 끝날 때마다 인터넷 검색어 순위 수위를 장악했고, 그가 부른 노래는 음원사이트를 접수했다. 소위 대박을 친 것이다. 그 열기는 1, 2주가 아니라 ‘나가수’가 방송되는 내리 계속됐다. 십수 년간 노래 잘하기로 소문난 박완규의 진가가 비로소 드러난 것이다.
“2011년 12월이었죠. ‘나가수’에서 ‘사랑했어요’(원곡 가수 김현식)를 부른 다음 날 행사 섭외가 3개 들어왔어요. 1년에 3개 하던 놈한테 하루에 3개가 들어 온 거예요. 다음 주에 ‘고해’(원곡자 가수 임재범)를 불렀죠. 행사가 10개 들어오더라고요. 그 다음 주에 꼴등을 했는데도 비슷하데요. 그 다음 주에 ‘하망연’(대장금 OST)을 부르고 나니까 매니저가 거의 전화를 붙잡고 있더라고요. 하루에 들어온 행사만 67개였어요. 물론 출연료도 몇 배가 뛴 상태였고요. 그렇게 들어오는 족족 무대에 다 올라갔다면 아마 지금 ‘결혼의 여신’에서 정대현을 연기하는 박완규는 없었을 거예요.”
영화 ‘라디오 스타’에서처럼 박완규 곁을 지켜온 10년 지기 매니저 또한 당시에는 박완규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나가수’에서 집중 조명을 받을 때도 여전히 일산 MBC 드림센터 부근에 위치한 모텔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매니저가 자신의 집에서 빨래를 해오는 동안 ‘나가수’ 1등 가수 박완규는 모텔 방에 앉아 다음 경연 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그러면서도 들어오는 행사를 안 하겠다는 가수를 보며 매니저의 속이 타들어갈밖에.
“간신히 재활해서 예전의 60~70% 상태로 빛을 봤는데, 겹치기 행사라뇨. 무리하면 좋은 음악을 들려드릴 수 없을 테고 목 상태도 급격히 나빠졌겠죠. 그러면 모든 게 다 끝인 거죠. 두세 달 바짝 돈 벌고 끝나는 거예요.”
행사를 뛸 시간에 그는 음악에 대한 감정을 최대한 끌어올리려고 노력했다. ‘하망연’을 부르기 전에 드라마 ‘대장금’을 2백 번이나 봤단다.
“제가 팬들한테 가끔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여러분의 사랑을 쉽게 인출하지 않겠습니다.’ 팬들의 사랑을 받는 족족 현금화하면 나중에는 가장 중요한 사랑이 남지 않거든요.”
봇물 터지듯 쏟아지던 관심과 사랑을 저축해둔 남자. 지금 그 사랑 덕분에 요즘에는 호화롭게 산다며 특유의 손짓으로 긴 머리를 쓸어 넘긴다.
“드라마에도 출연하고 지금처럼 인터뷰하는 것도 다 호화로운 거예요. 예전 같으면 누가 저를 알아봐줬겠어요. 인터넷에서 큰 커뮤니티에 제 이름으로 방도 만들어졌고(웃음)…. 비교도 안 될 만큼 아주 호화롭죠.”
아마도 그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화로움은 새 앨범 작업일 것이다. 얼마 전 ‘로커로서의 은퇴’를 전격 선언한 그는 ‘블루스’로 장르 변환을 시도하고 있다. 그렇게 오랜 세월 지키고자 노력한 ‘록’을 어떻게 버렸냐고 물었더니 첫 대답은 “원래 록의 모태가 블루스다. 그게 그거다”고 하더니 결국 “이제는 노래 부르며 욕을 못 하겠다”고 털어놓았다.
“록을 부를 수 있는 에너지가 고갈됐다는 육체적인 문제도 있지만 이제 더 이상 욕을 못하겠어요. 마음이 ‘소나기’(황순원의 소설)의 주인공 같아졌거든요. 풋풋하고 설레는 감정으로 변한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욕을 해요. 예전에는 발라드를 들으면 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듯 간질거렸는데, 이제는 좋아요. ‘천년의 사랑’도 사랑 노래지만 메시지가 없었어요. 허구의 음만 잔뜩 높여놓은 소위 ‘뽕필’ 충만한 노래거든요. 진정한 메시지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형식으로 노래를 만들고 싶어요.”
대중의 사랑 덕에 호화로움을 즐길 수 있다면 ‘사랑에 대한 세금’도 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최근에는 박완규 팬클럽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다정지사’ 활동에 시간과 정성을 쏟고 있다. ‘다정지사’는 박완규가 KBS1 ‘사랑의 리퀘스트’를 통해 인연을 맺은 어린이들을 후원하고 있다. ‘수호’라는 이름의 콘서트를 통해 기부금을 마련하기도 하고, 때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공원을 가거나 학습지 비용을 지원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후원하는 아이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장례식장을 찾아 아이의 곁을 지켰다.
“함께하는 분 중에는 어르신도 꽤 있어요. 마음은 젊은이들도 가능한데, 운영은 삶의 고수들이 하는 게 맞거든요. 실제로 아이들 집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니까요. 최근에는 후원하는 아이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비상이었어요. 상을 치르면서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았거든요. 더 많은 아이를 돕기 위해 더 많은 활동을 하고 싶어요.”
방 세 칸짜리 집이 너무 넓다
물론 ‘나가수’ 이후 박완규의 살림살이도 많이 나아졌다. 3평 남짓한 방에서 매니저와 지내던 생활을 청산하고 최근에는 방 세 칸짜리 집으로 옮겼다. 공기 좋은 파주 지역이라 잠만 자고 일어나도 치유되는 느낌이란다.
“낮에는 잘 모르겠는데 밤이 되면 집이 너무 크다고 느껴져요. 불러도 대답하는 사람도 없고(웃음)…. 그래서 TV를 틀어놓고 자죠. 아이들과 애기엄마가 사는 집도 커졌어요. 예전에는 거실에 작은 방 하나 있는 집에 살았거든요. 이제 아들이 고등학교 1학년이고 딸이 중학교 3학년이라 각자 방이 필요했는데, 이제 아이들도 각자 방이 생겼어요. 아직까지 둘 다 세를 살고 있지만 좀 더 노력해서 애기엄마 앞으로 집을 하나 사주고 싶어요. 그냥 저는 평생 세를 살까 생각 중이고요.”
요즘은 이혼하면 양육비를 놓고 정확하게 법정금액을 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박완규는 전 부인에 대해 ‘자신이 평생 책임져야 할 여자’라고 표현하곤 했다. 그 말 때문에 2011년 초 이혼했던 두 사람이 박완규의 성공 이후 재결합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원수가 돼 이혼한 건 아니었어요. 서로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게 된 거죠. 각자 아이들만 챙기면서 살자는 거였어요. 편모 가정이 되면 급식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고요. 이혼한 시점이 막 ‘비밀’이 성공해서‘위대한 탄생’에 출연하고 있던 때였는데,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보이던 때였죠. 오히려 아내가 ‘이제 태원 아저씨하고 활동 열심히 해서 돈을 많이 벌면 아이들이나 편하게 살 수 있게 해줘’라고 하더라고요. 그만큼 지쳐 있었던 거죠.”
박완규에게 아내는 1992년 처음 만나, 만난 지 일주일 만에 동거를 시작할 만큼 뜨겁게 불타오른 첫사랑이었다. 1994년 혼인신고를 한 후 두 아이를 낳으며 17년간 살 비비며 살아왔다.
“제게는 완벽하게 첫사랑이었어요. 게다가 아이들의 엄마죠. 그 두 가지만으로도 평생 책임져야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나중에 아내가 재혼한다면, 그 상대방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할 때까지는 그렇게 할 거예요. 이혼할 때 적어도 둘째 딸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서로 재혼하지 않기로 약속했거든요. 최소한 그 부분만큼은 아이들을 존중해 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살림살이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아버지 노릇은 쉽지가 않단다. ‘음악’을 고집하다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던 때를 생각하면 더 잘하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다.
“자식 문제는 평생 숙제인 것 같아요. 그래서 아버지와 자주 상의를 하죠. 그럴 때면 ‘너는 더했다’며 ‘그러면서 부모가 된다’고 힘을 주세요. 아이가 아파하며 보내는 시간은 부모도 같이 아파하면서 보낼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아이들 키우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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